“우리 모두가 바우덕이…숙명이었던 예인의 삶” [인터뷰]
조선 최초 여성 꼭두쇠 바우덕이 담아
박지나ㆍ서진실ㆍ조하늘…암덕 연기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1. 아홉 살에 남사당에 들어가 열세 살 때부터 줄타기를 시작한 어름사니(살얼음 위를 걷듯이 아슬아슬한 재주를 부려야 한다는 ‘얼음’과 기술의 어려움을 신과 인간의 중간 단계로 표현한 ‘사니’의 합성어) 박지나(35·안성시립바우덕이풍물단 단원). 체구가 작고 잘 뛰어 놀던 소녀는 어른들의 제안에 줄을 타게 됐다. “뭔가 엄청난 꿈을 꾸고 시작한 길은 아니었다”는 그는 매일 쉬지 않고 연습하고 눈물을 흘리다 보니 오늘을 맞았다. 대한민국에 단 두 명 뿐인 여성 어름사니로서 말이다.
#2. 가야금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악기를 배우다 열한 살 때부터 판소리를 시작한 서진실(37·퓨전 밴드 억스 보컬). 변성기가 찾아온 중 3 때부터 대학 때까진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대회에 나가면 번번이 순위에서 밀리고, 눈 앞의 많은 기회를 놓쳤다. 소원은 ‘하루종일 소리를 해도 끄떡없는 튼튼한 성대를 갖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스타 소리꾼이자, ‘조선팝’의 선구자가 됐다.
#3.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무용을 시작한 조하늘(35·국립정동극장 예술단). 체구가 작아 신체조건을 뛰어넘어야 하고,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를 극복해야 한다는 압박이 늘 그를 괴롭혔다. 살 길은 오직 연습 뿐. 포기하지 않고 도전해왔던 시간들이 켜켜이 쌓였다. 결국 그는 명실상부 국립정동극장 예술단의 상징이자 간판이 됐다.
어름사니 박지나, 소리꾼 서진실, 무용수 조하늘. 각기 다른 분야의 세 사람이 한 인물로 되살아났다. 여성 최초의 남사당패 꼭두쇠(우두머리)였던 바우덕이(본명 김암덕) 이야기를 담은 국립정동극장 예술단의 신작 ‘암덕: 류의 기원’(11월 22~26일까지·국립정동극장)에서다. ‘전통연희 대중화’의 시초로 1964년 국가무형문화재, 2009년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대표 목록으로 등재된 남사당놀이를 소재로 한 이 작품은 짧은 생을 살다 간 조선시대 유일의 여성 꼭두쇠였던 바우덕이 김암덕(1848~1870)의 이야기를 담는다.
개막을 앞두고 한창 연습 중 만난 소리꾼 서진실은 “암덕은 그 시대의 연예인이자 스타였다”고 했다. 당대 바우덕이의 인기를 보여주는 구전 민요도 있었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소고만 들어도 돈 나온다/안산 청룡 바우덕이, 줄 위에 오르니 돈 쏟아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는 모두 광대이고 바우덕이예요. 내면의 깊은 우여곡절과 세월을 경험해왔죠. 어떻게 보면, 대단한 사명감은 아니었을지 몰라요. 운명인 줄 알고 지내왔는데, 그 삶은 숙명이었죠.” (안무가 이현)
악가무희에 능했던 바우덕이 김암덕의 삶을 보여주기 위해 연희, 노래, 춤 등 각 분야에서 ‘예인의 길’을 걷는 세 사람이 소환됐다. 어린 암덕은 이유주가 맡았으니, 총 네 명이 한 사람을 연기하는 셈이다.
“암덕은 외면은 아름답고 여리지만 내면은 굉장히 외로우면서도 강한 사람이었어요. 그 시대에 여성이 남사당패의 꼭두쇠가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어요.” (박지나) 작품의 안무를 맡은 이현은 “봉건사회에 나타난 현대적 여성상”이라고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에 줄을 타는 사람은 45명. 그 중 여성은 박지나를 포함해 두 명 뿐이다. 안성시립바우덕이풍물단이 올리는 공연에서도 그는 바우덕이를 독점하고 있다. 정성숙 국립정동극장 대표는 “2001년부터 안성에서 바우덕이 축제가 시작됐는데, 13세의 박지나 씨가 줄을 타는 모습을 처음 봤다. 바우덕이 이야기에 가장 잘 맞는 캐스팅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바우덕이의 삶을 무대에 올리며 4명의 주인공이 태어난 것은 현재는 당대와 달리 장르가 세분화된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 시대의 ‘만능 엔터테이너’였던 바우덕이의 모습이 이들을 통해 유기적으로 그려진다. 이현 안무가는 “관객의 입장에서 이 네 명이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긴밀하게 연결하는 데에 주안점을 뒀다”고 했다. 그 안엔 풍물(농악)·버나(대접돌리기)·살판(땅재주)·어름(줄타기)·덧보기(탈놀이)·덜미(꼭두각시놀음) 등 남사당놀이 등 6가지 주요 종목을 담았다.
‘스타 소리꾼’인 서진실은 전체의 서사를 풀어주는 역할이면서 그 스스로가 바우덕이다. 서진실은 “내가 암덕인가 싶을 정도로 몰입을 하게 된다”며 “때로는 무대 뒤에서 그림을 만들어주고, 때때로 자연의 소리, 암덕 내면의 소리, 연희를 하는 광대들의 소리를 대변한다”고 말했다. “가사를 뱉고 감정을 표현하는 직업”(서진실)을 가진 소리꾼이 구음으로 인물을 표현하는 것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그는 “언어의 제약이 없어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더 많다”고 했다. 작품의 하이라이트가 될 마지막 장면 이전까진 목소리로만 존재한다. 그는 “‘복면가왕’이라고 보시면 된다”며 웃었다.
‘춤 추는 암덕’은 “여성성과 리더십을 갖춘 진취적 모습”(안무가 이현)을 몸으로 표현한다. 조하늘은 “처음엔 여성으로의 광대의 일대기가 감이 오지 않아 감정을 잡는 것이 힘들었다”며 “춤추는 바우덕이는 어떻게 춤을 췄을까를 상상하며 작품을 준비했다. 고독하고 쓸쓸하지만 당당한 여장부의 모습, 끝없는 수련을 통한 인고의 세월을 담고자 했다”고 말했다.
박지나는 짧게는 2분, 길게는 3분 가량 2m 높이의 줄 위에서 시간을 보내며 그의 모든 것을 쏟아낸다. 본래 남사당놀이에서 어름사니는 줄을 타면서 재담도 펼친다. 재담은 어름사니가 유일하게 쉴 수 있는 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작품에선 재담없이 줄 위에서 오랜 시간을 머문다. 80분 길이의 작품에서 총 13분이나 된다. 박지나는 “줄을 탈 때는 언제나 역동적인 움직임을 담아냈다”며 “이 작품에선 멈춰있는 장면들이 많다 보니 작은 움직임에 집중하려 하고, 느리고 멈춰 있을 때 보여줄 수 있는 줄타기를 고민해 표현했다”고 말했다.
무대는 암덕의 이야기이자, 젊은 여성 예인들의 이야기이다. 네 사람이 표현하는 김암덕은 ‘하나의 에너지’로 이어진다. 안무가 이현은 “각기 다른 이들을 관통하는 것은 저마다 예인으로서 살아온 시간, 한 눈 팔지 않고 걸어온 길에 대한 숙명과 에너지”라고 했다. 이들이 걸어온 삶 자체가 천하 제일의 예인이었던 바우덕이의 삶이라는 것을 무대에 담아냈다.
박지나는 “아홉 살 때부터 제2의 바우덕이라는 말을 듣고 자란 내겐 이 작품의 드라마가 무척 와닿는다”며 “연습하면서도 순간 순간 벅찰 때가 있다”고 말했다.
예인의 삶은 걸음마다 가시밭길이다. 목숨을 걸고 뛰노는 남사당놀이는 ‘살판 죽을판’이라고 불린다. 어름사니 박지나는 20년 넘게 ‘줄 위의 인생’을 살며 작은 몸이 바스라질 만큼 위험한 순간들도 많았다. 그는 “이제는 바우덕이가 내 이름처럼 느껴지고 나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서진실은 “예인으로 산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인정받고 떳떳해질 때까지 끝없이 연마하고 갈고 닦는 길”이라며 “인내와 강인함을 가진 암덕의 내면이 나를 이 작품으로 이끌었다”고 말했다.
춤과 노래, 연희가 더해진 작품은 역사 속 인물을 조명하며 전통연희를 ‘현재의 무대’로 불러왔다. 서진실은 “그동안 무대에서 해오던 음악은 빠른 비트에 기술적인 면을 강조하며 쫓기듯 보여줬는데, ‘암덕:류의 기원’은 느림의 미학에서 오는 강인한 힘이 있어 기품있게 느껴진다”고 했다. 그 안에 정교하게 꽃 핀 예술혼이 담긴다.
정성숙 대표는 “남사당은 하층민에서 발생한 최고의 예술”이라며 “어린 암덕을 통해 민초의 애환을, 춤추는 암덕과 줄 타는 암덕을 통해 예인들의 삶과 수련의 과정을, 노래하는 암덕을 통해 서사를 보여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전통연희엔 한국적 감성과 대중문화 원류로서 미래의 전통이 담겨있다”며 “이 작품은 그것을 대중화, 현대화된 언어로 담아낸 시도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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