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자들이 제대로 미쳤다, 유연석은 특히 더('운수 오진 날')
[엔터미디어=정덕현] 돼지 꿈을 꿔서 무언가 운수가 좋을 거라 기대했던 택시기사 오택(이성민). 실제로 딱딱 떨어지는 손님들로 3일치의 요금을 벌지만, 묵포까지 100만원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행운은 불운으로 바뀐다. "밀항하려거요"라고 말하는 이 손님 금혁수(유연석)에게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농담이라 여긴 오택은 점점 그것이 농담이 아닌 실제 사실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공포의 묵포행을 하게 된다.
tvN 월화드라마 <운수 오진 날>은 여러모로 현진건의 단편소설 <운수 좋은 날>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일제강점기 인력거꾼 김첨지에게 유독 손님이 넘쳐나서 꽤 큰 돈을 벌었던 운수 좋은 날이, 돌아와 보니 병을 앓던 아내가 죽은 운수 최악의 날이었다는 걸 뒤늦게 알고 절망하게 되는 이야기의 소설이다. <운수 오진 날>은 일제강점기 대신 현재를, 인력거꾼 대신 택시기사를 세워 놓았다.
'좋은' 대신 '오진'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오진'은 '허술한 데가 없이 매우 야무지고 실속이 있는'이라는 뜻이다. 긍정적인 뉘앙스처럼 보이지만 '오지게도 추웠다'처럼 뒤에 붙는 말에 따라 부정적인 의미가 되기도 한다. 그만큼 <운수 오진 날>이 진짜 실속이 있는 날이 될지, 아니면 힘겹기만 한 날이 될지는 바로 그 '날'의 결과에 달려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운수 좋은 날>을 떠올리게 하는 서사의 밑그림 위에, 이 드라마는 연쇄살인범이 등장하는 스릴러를 얹었다. 갑자기 "나한테 그랬어?"라며 반말을 하는 금혁수에게 오택은 섬뜩함을 느끼며 뭐라 말을 못하는데, 금혁수는 짐짓 그것이 마틴 스콜세이지 감독의 <택시 드라이버>에 나오는 로버트 드니로가 한 대사 "You talkin' to me"를 연기한 거라고 눙친다. 그러면서 오택에게도 한번 따라 해보라고 권한다.
이 이상한 손님은 자꾸만 자신의 과거에 대해 수다를 떨기 시작하는데, 그 이야기는 점점 범죄의 뉘앙스를 풍긴다. 버스 전복 사고로 고통도 공포도 느끼지 못하게 됐다는 이야기부터, 마치 자랑하듯 실제 손에 상처를 내고도 아무렇지 않다고 하고, 급기야 이야기는 살인의 향기가 느껴진다. 그리고 결국 맞이하게 된 이 연쇄살인범의 실체에 오택은 살아남기 위해 묵포까지만 가자 생각하지만, 도움을 청하다 발각당하기도 하는 등 사건은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운수 오진 날>은 아포리아 작가가 쓰고 그린 동명의 원작을 리메이크한 작품으로, 원작과는 다른 설정이 들어있다. 아들을 죽인 연쇄살인범을 추적하는 피해자의 엄마 황순규(이정은)라는 인물이 그것이다. 이 인물의 등장은 <운수 오진 날>에 '추격전'이라는 새로운 요소를 부여하면서 동시에 사회적 의미도 담고 있다. 그건 피해자가 존재하지만 가난한 서민보다는 권력에 의해 동원되는 공권력에 대한 비판적 관점이 이 인물을 통해 투영되기 때문이다.
황순규는 김형사(정만식)에게 그토록 범인을 잡아달라 애원하지만, 형사들은 정치인들의 행사에 보디가드처럼 동원된다. 물론 그런 상황에 형사들은 냉소적이지만 어쩔 수 없이 행사에 나가고, 그 사이 연쇄살인범은 살인행각을 이어가며 밀항을 하려 한다. 황순규는 피해자의 엄마이고, 오택은 이제 피해자가 될 수도 있는 처지에 놓은 인물이다.
결국 서민들은 스스로를 지켜내거나 스스로 범죄와 맞서야 하는 상황이다. 숨쉴 틈 없이 전개되는 범죄스릴러 속에 드라마는 이처럼 서민들을 향해야할 공권력이 권력자들을 위해 작동하는 현실이라는 사회비판적 요소를 심어 놓았다. 서민들의 고단한 삶을 표징하는 듯한 택시는 그래서 축소된 우리 사회처럼 보이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불안과 공포에도 방치되고 있는 오택 같은 인물은 서민들의 자화상처럼 보인다.
이 범죄스릴러는 결국 금혁수라는 연쇄살인범과 그에게 어쩌다 발목을 잡힌 오택이라는 택시기사가 끌고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도 여러 공간에서 펼쳐지는 범죄 스릴러가 아니고, 묵포까지 달리는 택시라는 좁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스릴러다. 전적으로 배우들이 보여주는 연기와 그로 인해 만들어지는 몰입감이 전제되어야 가능해지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의 이성민과 유연석이 보여주는 연기는 압도적이다. <재벌집 막내아들>이나 <형사록> 같은 작품에서 카리스마를 선보이던 모습과는 정반대로 겁 많고 마음 약한 서민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성민의 연기는 역시나 명불허전이다. 여기에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그 선한 의사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거의 미친 듯한 모습으로 긴장감을 시종일관 유지하게 만드는 유연석의 연기는 소름돋을 정도로 놀랍다. 아울러 이정은의 믿고 보는 연기까지 더해지니, 작품은 제목처럼 '오진' 작품이 됐다. 물론 긍정적인 의미로서.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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