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총선, 문화전쟁이냐 부동산투표냐 [이형석의 불편한 편집숍]

2023. 11. 22.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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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미국 abc뉴스는 ‘문화전쟁: 정체성은 어떻게 미국 정치의 중심이 됐나’라는 제하의 보도에서 “모든 정치적 스펙트럼을 망라해 미국민이 ‘미국적인 가치’를 (새롭게) 정의하려는 노력 속에서 인종, 성적 지향, 젠더 등을 포함하는 정체성은 각 주의회에서 수백건의 법안을 빨아들이는 ‘블랙홀같은 의제’가 돼왔다”고 했다. 이어 “정체성 이슈에 대한 논쟁은 2024년 대통령선거전이 전개됨에 따라 더욱 격화되고 있다”고 했다.

미국 내 한인사회의 시각도 같았다. 김동석 미주한인유권자연대(KAGC) 대표는 지난달 30일 워싱턴 주재 한국특파원단과의 간담회에서 내년 11월 미 대선이 ‘문화전쟁’의 양상이 될 것이라며 성소수자(LGBTQ), 낙태, 사회보장, 의료보험, 교육 등 주요 이슈를 놓고 자유주의(진보)와 보수주의 세력 간 대결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우리 선거는 어떨까. 지난 8월 국회 입법조사처 허석재·송진미 정치의회팀 입법조사관이 발간한 ‘제20대 대통령선거 분석’ 보고서(이하 ‘대선보고서’)에 따르면 부동산이 후보별 승패를 좌우한 중요한 요인이 됐다. 서울지역 아파트 가격과 후보별 득표율이 유의미한 상관관계를 보인 것이다.

대선보고서는 부동산 문제가 투표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기 위해 서울지역 동 단위 이재명·윤석열 후보의 득표율과 아파트 가격 간 관계를 분석했다. 그 결과, 아파트 가격이 높을수록, 가격상승폭이 클수록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의 득표율은 높아졌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낮아졌다. 유권자의 지지 정당·후보와 투표행위가 ‘아파트 평수’를 따른다는, 이른바 ‘부동산 계급 투표’가 통계로도 입증된 것이다.

문화전쟁이냐, 부동산 투표냐.

내년 4월 10일 치러지는 제22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결정짓는 요인은 무엇이 될까. 한국의 경우 1987년 민주화 이후 ‘군부독재세력 대 민주주의’ ‘영·호남 간 지역주의’는 거의 모든 선거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구도였으나 대선보고서가 보여주듯 최근 들어선 부동산 이슈가 미치는 영향이 커졌다. 또 지난 2021년 서울·부산시장 재보궐선거와 2022년 대선 및 지방선거 등 최근 3차례의 선거에선 새로운 양상의 세대·성별 투표 경향이 나타났다. 전통적으로 이념·지역이 갈라왔던 선거구도가 한층 복잡해진 것이다. 한국에서도 서구적인 의미의 문화전쟁이 본격화된 양상이다.

미국도, 한국도 ‘문화전쟁’

‘문화전쟁(culture war)’은 한국에서는 비교적 생소한 개념이다. 문화전쟁의 현대적 의미는 미국에서 유래된 것으로, 서로 다른 집단들이 한 사회나 국가를 자신들의 도덕, 이념, 가치로 규정하거나 바꾸기 위해 벌이는 투쟁이나 갈등, 충돌을 뜻한다. 미국의 사회·종교학자인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 버지니아주립대 교수가 1991년 출간한 저서 ‘문화전쟁: 미국을 정의하려는 투쟁’에서 사용하면서 널리 퍼졌다. 헌터 교수는 인종, 낙태, 이민, 사유화, 정교분리, 총기 소지, 동성애, 마약 등을 두고 벌이는 미국 내 집단·세력 간 갈등을 분석하며 다양한 이슈에 걸쳐진 진보적인 자유주의와 전통을 옹호하는 보수주의의 대립을 ‘문화전쟁’이라는 개념으로 파악한 것이다. 헌터 교수는 지난 2017년 9월 워싱턴포스트에 기고한 ‘미국의 문화전쟁은 어떻게 계급전쟁으로 진화해왔는가’라는 칼럼에서 ‘미국은 과거에 무엇이었으며, 현재는 무엇이고, 앞으로는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두고 극심하게 양극화된 입장들이 미국이라는 나라의 의미를 정의하기 위한 투쟁을 벌이고 있다’고 썼다.

문화전쟁은 쉽게 말하면 사회의 다양한 부문과 이슈로 확장·확대된 ‘이념전쟁’이라 할 것이다. 미국 사회를 설명하기 위해 동원된 개념이지만 급속히 서구화된 우리 사회의 갈등 변화 양상을 진단하는 데에도 유용하다. 우리 사회의 경우 좌우, 진보-보수 간 이념대립은 주로 노동·인권·경제·남북관계 등에 집중됐으나 최근엔 페미니즘, 성소수자인권, 장애인인권, 외국 난민수용 정책, 학생인권·교권 같은 교육 정책 등 훨씬 다양화됐다. 원자력발전이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을 두고 벌어졌던 극심한 갈등에서 보듯 기후위기나 친환경·재생에너지 정책, 재해·재난 대책에 대해서도 극단적으로 상반된 입장들이 충돌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통일, 노동, 인권, 민주주의 등 거대 담론은 약화되고 미시·일상적인 영역에서의 갈등과 대립이 급속히 정치 영역에서의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또 지난 2~3년간의 선거에선 과거의 지역·이념 구도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세대·성별 입장 분화가 새로운 경향으로 등장했다.

정치에서 거대 담론의 약화와 의제의 다양화 및 미시·생활정치화는 정치의 양극화 추세와 맞물려 향후 우리 사회에서도 ‘문화전쟁’을 더 가속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이미 여성가족부 폐지와 외국인 난민 제주 수용,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시위 등 전통적인 이념대립 밖의 이슈가 우리 사회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왔고, 여전히 진행 중이다. ‘전염병 감염을 막기 위해 마스크 착용을 법적 의무로 하는 것이 맞는가’ ‘노키즈존을 허용하는 것이 정당한가’ ‘남녀 신체를 자세히 묘사한 성교육도서는 금지해야 하는가’ 등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일어났던 논쟁은 미시·일상적인 문제들이 진보-자유주의적 가치관과 전통-보수주의적 이념이 충돌하는 정치적 의제, 곧 문화전쟁의 전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회갈등 스트레스’ 큰 대한민국

지난 2022년 영국 킹스칼리지가 여론조사기관인 입소스에 의뢰해 발간한 자료는 ‘세계의 문화전쟁: 사회갈등(분열)에 대한 각국의 인식’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다. 28개국 국민을 대상으로 각국의 다양한 집단 간 갈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조사한 자료다. 특정 사회갈등에 대해 ‘심각하거나 상당하다’고 생각하는 국민이 얼마나 되는지를 보여준다. 이에 따르면 한국은 총 12개의 조사항목 중 무려 7개 부문에서 1위였다. 그중에서도 우리 국민이 가장 많이 뽑은 사회갈등은 ‘서로 다른 정당 지지자 간 갈등’으로, 무려 91%가 ‘심각하거나 상당하다’고 답했다. 부유층과 빈민층 사이의 갈등도 91%였다. 진보-보수 간(87%), 남녀 간(80%), 세대 간(80%), 종교 간(78%) 갈등도 응답자의 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았다. 대졸 이상과 고졸 이하의 학력 차이로 인한 갈등도 70%로, 세계에서 응답률이 가장 높았다. 계층 간(87%), 도시-지방 간(58%), 도시전문직-일반노동자 간(78%) 갈등도 비교적 높은 순위였다.

이 조사는 한 사회의 갈등이 실제로 얼마나 심각한가를 보여주는 지표가 아니라 각 국민이 얼마나 심각하다고 인식하고 있느냐를 보여주는 자료다. 달리 말하면 우리 국민은 사회갈등으로 인한 심리적 스트레스를 세계 어느 나라의 국민보다 많이 받고 있다는 얘기다.

또 정당·빈부·이념·계층·성별·세대·종교·직업·학력 등으로 사회가 분열돼 있다는 인식이 크다는 뜻이다. 사회갈등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사회분열에 대한 인식은 서로 다른 집단 간 의사소통을 방해한다. 서로 다르다는 생각이 강조되고, 상호이해가 배타적이라는 인식이 팽배해진다. 서로 다른 정당 지지자끼리는 말 섞기를 꺼리고, 돈 많은 사람과 가난한 사람은 어울리지 않으려 한다. 남성과 여성, 청년층과 노년층은 서로를 적대시한다. 정치양극화와 문화전쟁은 심화된다.

한국의 사회갈등이 서구적인 맥락의 ‘문화전쟁’으로 변화하고 있는 양상은 ‘정치적 올바름(PC·political correctness)에 대한 인식에서도 나타난다. PC 혹은 ‘PC주의’는 어떤 종류의 차별이나 편견도 배제한 말과 표현, 행동만 하자는 신념을 뜻한다. 특히 인종과 성별, 종교, 성적 지향, 장애, 직업 등에서의 약자나 소수자를 차별하거나 배제하는 용어·행동을 엄격하게 금지하려는 입장을 의미한다. 이 역시 미국에서 미국 사회를 설명하기 위해 비롯된 용어로, 원래는 단어 하나하나까지 문제 삼을 정도로 피곤하게 구는 진보·자유주의자를 비꼬는 의미였으나 최근엔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동’이라는 말 뜻 그대로 쓰이고 있다.

킹스칼리지-입소스 조사에는 ‘각국의 PC에 대한 평가’가 포함돼 있었는데 한국은 PC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40%) 정도가 28개국 중 8위였고, 아시아에선 1위였다. 아직은 긍정적 인식(50%)이 부정적인 답변보다 많았지만 우리나라도 유럽과 북미 등 서구사회 이상으로 사람들이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상당한 부담과 피로감을 느끼고 있다는 얘기다.

이러한 PC에 대한 반감은 미국은 물론이고, 한국에서도 문화전쟁의 중요하고 강력한 동기가 되고 있다. 20·30대 남성을 중심으로 최근 몇 년간 우리 사회에서 확산된 페미니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나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가 지속해서 제기한 전장연 시위에 대한 비판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문화전쟁과 부동산투표 강화되는 선거

우리나라의 선거에서 정부의 부동산 정책과 유권자가 거주하는 부동산 가격이 투표에 미치는 영향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세계 보편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정치적 양극화 현상도 심각하다. 보수·진보 등 성향에 따라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으로 결집하는 경향이 더욱 강화되고 있다. ‘문화전쟁’은 정치양극화의 새로운 양상이다.

가까이는 내년 총선을 비롯해 향후 우리나라의 선거는 부동산 투표와 문화전쟁의 성격이 갈수록 짙어질 것이다. 벌써부터 여당은 ‘김포 서울 편입’ 정책을 던져놓고 수도권의 ‘부동산 민심’을 흔들어 놨다. 제1기 신도시특별법, 메가시티 정책 등에는 여도, 야도 없다. 이 정책들이 국토의 균형발전과 지속 가능성까지 내다본 것이라면 좋으련만 의원은 지역구의 땅값, 유권자는 내 아파트 집값만을 따져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주장하고 찍어주는 선거가 될까 걱정이다.

부동산이 지역을 가른다면, 진영과 세대·성별은 문화전쟁으로 구획될 것이다. 거대 양당 말고, 진보와 보수 말고, ‘제3의 정당’과 ‘제3의 세력’이 나와서 다양한 이슈와 다양한 이념·가치를 놓고 경쟁하면 좋으련만 돌아가는 판세를 보아 하니 기존 여야 말고는 기껏해야 ‘짝퉁 국힘’ ‘짝퉁 민주’에 이당 저당에서 밀려난 이들의 정체 모를 ‘잡당’ 정도나 나오기 십상일까 우려된다.

문제는 부동산투표가 강남-강북, 서울-지방, 수도권-비수도권으로 나뉜 지역의 양극화를 더 강화하리라는 것이다. 문화전쟁은 이념의 확증 편향과 정당 지지자의 결집 등 정치적 양극화를 심화시킬 것이라는 사실이다.

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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