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스도 싫지만 이스라엘은 더 싫다”
● “갈등의 원흉은 이스라엘” 목소리 커져
● 이스라엘은 ‘나크바(아랍어로 대재앙이란 뜻)’
● 앙숙이던 사우디-이란 긴밀히 협력
● 히마스도 설 자리 잃어가는 형국
* '신동아'는 11월호에서 아키바 토르 주한 이스라엘 대사를 만나 가자지구 전쟁과 관련한 이스라엘의 시각을 확인했다. 12월호에서는 카타르 수도 도하를 찾아 이슬람권이 장기화되는 이번 전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살펴봤다.
같은 날 오후 5시 카타르 수도 도하의 복합 문화·공연 단지인 '카타라'에서는 팔레스타인 영화제가 한창이었다. 영화제의 이름은 '팔레스타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Voices from Palestine)'. 이날 이 영화제에서는 '3000일의 밤'이라는 영화가 상영됐다. 영화는 이스라엘군을 공격하다 부상당한 팔레스타인 청소년을 도와준 팔레스타인 여성 교사가 8년(약 3000일)간 이스라엘 교도소에 수감된 내용이다. 실화를 기반으로 한 영화다.
점점 거세지는 反이스라엘 정서
주인공은 상대적으로 온건 성향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사는 요르단강 서안 지역 출신이다. 힘든 팔레스타인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캐나다 이민을 준비하고 있다. 양국의 갈등과는 무관해 보이기까지 하는 현실적이고 평범한 사람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교도소에 수감된 뒤 생각이 달라진다. 감옥에서 아이를 출산하고 이스라엘 당국의 각종 인권탄압에 대항하면서 강한 투쟁 정신을 가지게 된다.도하 도심의 일부 건물에선 발광다이오드(LED)를 이용해 '가자를 위해 기도하자' '가자를 구하자'란 문구가 반짝였다. 팔레스타인 깃발을 LED로 표현한 건물과 전광판도 있었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 중에는 흰색 바탕에 검은색 체크무늬가 들어간 '케피예'(keffiyeh·중동 남성들의 전통 두건)를 어깨에 두른 이들이 많았다. 검은 체크무늬가 들어간 흰색 케피예는 팔레스타인 남성이 많이 두른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분쟁이 시작된 뒤부터는 팔레스타인의 저항 정신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통한다. 팔레스타인 깃발을 꽂아둔 상점도 보였다.
가자 지구를 기반으로 활동해 온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대규모 공격으로 시작된 이번 전쟁으로 아랍권, 나아가 이슬람권이 부글거리고 있다.
사태 초기만 해도 노골적으로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이슬람 국가는 드물었다. 하마스의 도발로 충돌이 시작됐고, 이스라엘에서 120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무장정파의 도발로 이스라엘에서 이렇게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건 처음이다. 그만큼 이스라엘의 충격도 컸다.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이슬람권의 이스라엘에 대한 반응은 거칠어지고 있다. 팔레스타인 사망자 수가 크게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어린이를 포함해 민간인 피해가 크게 늘어나고, 참혹한 모습을 담은 영상물이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급속히 퍼지면서 반이스라엘 여론이 빠르게 조성되고 있다.
"범죄 책임은 점령 당국에 있다"
2010년 12월 시작된 '아랍의 봄' 움직임으로 독재정권이 무너진 경험이 있는 이집트에선 정부가 '시위 트라우마'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시위에 민감하다. 원천 봉쇄하거나, 발생 시 강하게 진입한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지지 시위는 모른 척하며 사실상 허용해 줄 정도다.
가자 지구 전쟁에 대한 이슬람권의 민감한 반응은 11월 11일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에서 열린 이슬람협력기구(OIC) 특별 정상회의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이번 회의가 마련된 이유는 이스라엘의 공격이 거세지고 가자 지구에서 희생자가 계속 늘어나는 데 있다.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뿐 아니라 친(親)이란, 친(親)하마스 성향인 레바논과 시리아로도 공격을 확대하고 있다는 점도 OIC가 특별 정상회의를 구성한 이유로 꼽힌다.
레바논은 친이란, 시아파 무장정파인 헤즈볼라가 정치권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시리아는 현재 중앙정부가 이란과 가까우며 이란의 최정예 군사조직으로 이란에서 '정부 위의 정부'로 통하는 혁명수비대가 직접 군대를 파견한 나라다.
이번 OIC 회의 때는 무함마드 빈 살만 알 사우드 사우디 왕세자,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 압둘팟타흐 시시 이집트 대통령,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 안와르 이브라힘 말레이시아 총리 등 이슬람권 주요국 정상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들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또 강경했다.
"팔레스타인 주민이 당한 범죄 책임은 점령 당국(이스라엘)에 있다." (무함마드 왕세자)
"이스라엘에 저항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라이시 대통령)
"이스라엘 정부는 서방의 버릇없는 아이처럼 행동하고 있으며 이들은 자신이 저지른 피해에 대해 보상해야 한다." (에르도안 대통령)
OIC 특별 정상회의에서 특히 눈길을 끈 건 라이시 대통령이 이란 대통령으로서는 11년 만에 사우디를 방문했다는 것. 사우디와 이란은 각각 이슬람 수니파와 시아파의 종주국이며 중동 패권을 놓고 경쟁해 온 라이벌이다. 2016년 1월부터 올해 3월까지는 단교 상태이기도 했다. 2016년 1월 사우디가 정부에 비판적인 자국 내 시아파 고위 지도자들을 대거 체포하고, 일부에 대해선 사형을 집행하자 이란 내 보수 시아파 세력이 주이란 사우디 대사관과 총영사관을 공격하며 '단교 사태'가 터졌다. 올해 3월 중국 중재로 두 나라는 외교 관계를 정상화했지만 여전히 양국 사이의 분위기는 냉랭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사우디와 이란은 이번 사태 발생 초기인 10월 12일에도 무함마드 왕세자와 라이시 대통령이 전화 통화를 하는 등 긴밀히 협력하는 모양새다. 사우디 싱크탱크인 킹파이잘 이슬람연구센터의 조셉 케시시안 수석연구위원은 "두 나라 정상 간에 이번 사태를 원활히 해결하고 중동 지역 내 긴장을 완화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분명히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스라엘군의 가자지구에 대한 대규모 공습을 비판하는 것 외에는 뚜렷한 결과물이 없는 회의였지만 국제사회에 이슬람권의 걱정과 분노를 보여주는 효과는 분명히 있었다.
이스라엘은 '대재앙'
하마스의 도발로 전쟁은 시작됐다. 2014~2017년 이라크와 시리아 일대에서 국가를 선포하고 온갖 만행을 저질렀던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세력 이슬람국가(IS)만큼은 아니지만 하마스에 대한 이슬람권의 인식은 부정적이다. 극단주의 성향, 대안 없이 무고한 인명을 대거 희생시키는 투쟁 방식, 부정부패, 무능력 등 하마스에 대한 평가나 인식은 매우 나쁘다.하지만 여전히 이슬람권, 특히 아랍권에서 이스라엘은 '나크바(아랍어로 대재앙이란 뜻)'로 통한다. 나크바는 이스라엘 건국이 선포된 다음 날인 1948년 5월 15일 70만 명 이상의 팔레스타인인이 추방된 사건을 지칭하는 단어로 쓰인다. 말 그대로, '하마스도 싫지만 이스라엘은 더 싫다'는 인식이 강하다.
중동 국가에서 여러 차례 근무했고, 아랍권 나라의 대사도 지낸 한 전직 외교관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과 관련한 이슬람권 국가들의 스탠스는 분명하고 거의 예외 없이 일치한다. '문제의 원인은 이스라엘에 있고, 우리는 팔레스타인을 도와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다"고 말했다.
2020년 8월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 중재 아래 이른바 '아브라함 협정'을 통해 이스라엘은 아랍에미리트(UAE), 바레인과 외교관계 정상화에 성공했다. 이후에도 모로코, 수단과도 수교했다. 이집트와 요르단과는 이보다 이른 시기인 각각 1979년과 1994년 평화조약을 맺었고, 외교관계도 정상화했다.
얼핏 봐서는 아랍권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고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아랍권의 민심은 여전히 이스라엘에 적대적이다.
카타르의 유명 싱크탱크인 아랍조사정책연구원(Arab Center for Research and Policy Studies·ACRPS)이 지난해 아랍권 14개 나라에서 3만33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84%가 "이스라엘과의 수교를 반대한다"고 답했다. 찬성은 8%에 그쳤다. 또 76%가 "팔레스타인 문제는 아랍 전체의 문제다"라고 답했다. ACRPS가 2019~2020년 진행한 설문조사에서는 조사 대상자의 89%가 "이스라엘이 아랍권의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답했다.
정착지 늘린 이스라엘
이번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하마스 보건부에 따르면 가자지구에서는 1만1000명 이상(11월 14일 기준)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됐다. 당연히 아랍권의 반이스라엘 감정은 커질 수밖에 없다.아랍권 나라의 한 현직 외교관은 "하마스의 민간인 공격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이스라엘이 자국민 사망자보다 훨씬 많은 사람을 죽여도 되는 건 아니다"고 말했다. 이어 "이스라엘 정착촌 거주자들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공격하는 것을 이스라엘군이 보호한 적도 있다"고 덧붙였다. 아랍권의 시각으로는 이스라엘군 역시 민간인 공격에서 자유롭지 못하단 뜻이다.
이스라엘 정착촌은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거주하는 정착 단지를 조성하는 정책이다. 사실상 팔레스타인 영토를 줄이는 조치로 국제사회는 불법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상대적으로 온화한 성향의 팔레스타인인이 많이 살고 있는 요르단강 서안을 중심으로 정착촌을 꾸준히 확대해 왔다. 실질적인 팔레스타인 영토 줄이기 및 자국 영토 넓히기 전략을 꾸준히 펼쳐 온 것이다.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는 지난해 12월 취임 선서를 하면서도 정착촌 확장 의지를 강조했다. 실제로 네타냐후 정부는 6월 서안 정착촌에 5700여 채의 추가 주택 건설 계획도 승인했다.
한국 근무 경험이 있는 아랍권 나라의 전직 대사급 외교관은 "이스라엘이 정착촌 확정 정책을 유지하는 한 '2국가 해법(이스라엘, 팔레스타인이 각각 나라를 세워서 공존한다는 내용)'은 조금도 현실성이 없다"고 말했다.
이번 가자지구 전쟁은 좀처럼 '출구'가 안 보인다는 평가가 많다. 미국과 카타르가 중재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은 '인질 석방'이 완전히 이뤄지기 전까지 휴전 계획은 없다고 강조해 왔다. 다만 가자지구 내의 지상전, 특히 하마스가 조성한 총 길이 500㎞ 정도의 땅굴에서 전투가 장기화되는 것은 이스라엘에도 부담이다. 아무리 네타냐후 총리와 보수 진영에서 '하마스 궤멸'을 외쳐도 실질적으로 이 목표가 달성될지 장담하기 어렵다.
아랍권에서는 시간이 갈수록 반이스라엘 정서가 강해지지만 하마스에 대한 평가 역시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가자지구 주민들의 안전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행태와 이스마엘 하니예 등 최고 지도부가 다른 나라로 피신한 건 어떤 형태로든 인정받기 어렵다.
사우디-이스라엘 수교 당분간 어려워져
가뜩이나 복잡한 중동 정세가 더욱 꼬이면서 한동안 기대를 모았던 '이스라엘과 사우디 수교' 역시 적어도 당분간은 어려울 것이란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물론 이번 가자지구 전쟁은 사우디와 이스라엘 간의 직접적인 충돌은 아니다. 그러나 이슬람 3대 성지(메카, 메디나, 예루살렘) 중 두 곳(메카와 메디나)을 보유한 '성지 수호국'이며 동시에 '아랍의 큰형'인 사우디가 이스라엘이 무장정파인 하마스와 전쟁을 벌이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대거 희생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스라엘과 관계 개선을 도모하는 건 구조적으로 어렵다.
외교관계 정상화 작업을 완전히 멈추지는 않더라도 상당한 속도 조절은 필요하다. 아키바 토르 주한 이스라엘 대사도 '신동아'(11월호)와 인터뷰하면서 "하마스와의 전쟁으로 사우디와 정식으로 수교하는 시기가 지연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하마스가 이번 공격을 감행한 핵심 이유 중 하나가 이스라엘과 사우디 수교를 늦추거나, 백지화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하마스가 목표를 달성했다고 볼 수 있다. 하마스는 계속되는 고립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과 사우디가 수교하는 것을 극도로 우려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 대한 대규모 공격 → 이스라엘의 강한 반격 → 가자지구 민간인 피해 급증 → 아랍권과 이슬람권의 민심 악화 → 사우디의 이스라엘과의 외교 정상화 움직임 중단'을 도모한 것.
하마스 역시 이스라엘의 반격과 민심 악화로 설 자리를 완전히 잃어가는 형국이다. 중동의 중재자 역할을 해오며 가자지구에 대한 재정 지원에 적극적이었고, 2012년부터 하마스 정치사무소(하마스의 공식적인 대외 협상 창구)의 활동도 허가한 카타르도 하마스에 대한 기존의 우호적 스탠스를 바꿀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워싱턴포스트(WP)와 로이터 등에 따르면 카타르 정부는 하마스에 납치돼 있는 인질 석방 문제가 해결되면 하마스와의 관계를 재검토할 예정이다.
김은비 국방대 안보정책학과 교수는 "카타르가 하마스와 지금처럼 관계를 유지하는 데는 너무 많은 부담이 있다. 가자지구 복구와 현지 민간인들을 위한 지원에는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지만 하마스와는 분명한 거리를 둘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하마스 행태 용납 안 돼
일각에선 아랍권과 이슬람권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걱정과 지원은 말뿐이지 구체적인 대안이나 움직임이 없다는 비판도 나온다. 당장 이슬람권 나라 주요 정상들이 모두 모인 OIC 특별 정상회의에서조차 구체적 대안은 제시되지 않았다.같은 '아랍 형제'이며 지리적으로도 가장 가까운(육로로도 이동 가능) 이집트는 가자지구 난민들을 자국에 받을 마음이 없음을 여러 채널을 통해 분명히 밝혀왔다. 이집트 정부는 가자지구 난민들이 이집트에 넘어오고 장기 거주하게 될 경우 팔레스타인 영토를 분명하게 보장하는 부분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식의 설명을 한다. 그러나 더 실질적 이유는 난민 유입으로 인한 치안 문제와 경제난 때문이다. 또 난민 중 하마스 구성원 등 극단주의자들이 포함돼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우려한다.
이란이 하마스에 다양한 재정, 군사 지원을 하면서 영향력을 키워온 것도 따지고 보면 아랍권에서는 반성해야 할 대목이다. 페르시아의 후예인 이란은 아랍이 아니다. 역사, 문화, 언어, 종파(하마스는 수니파)도 다르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이란은 아랍의 주요국인 사우디, UAE, 이집트 등과도 사이가 안 좋다. 그런데 같은 아랍이며 종파도 같은 이 나라들은 이란이 하마스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동안 이를 제재하거나 막지 못했다. 하마스의 강압적인 통치와 민간인 피해를 키우는 행태도 막지 못했다.
아무리 상대적으로 약자인 상황에서 택한 군사전략이라지만 병원이나 종교시설 근처에 군사시설을 만들고, 무기를 배치하는 하마스의 행태도 용납받을 수 없다. 하마스는 이스라엘군의 공격을 막거나 지연시키는 목적에서 병원, 모스크, 교회 인근에도 군사시설을 만들어왔다. 민간인 피해가 커질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이수정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 연구교수는 "그동안 하마스가 보인 여러 행태는 자신들의 이스라엘에 대한 저항의 정당성과 명분을 훼손하기에 충분했다. 가자지구와 아랍권 나아가 이슬람권 전반에 걸쳐 자신들의 지지 기반을 크게 잃은 상황을 자초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도하=이세형 채널A 기자·前 동아일보 카이로 특파원 turt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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