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다방부터 신촌공원·이태원바까지…레즈비언 공간 50년 변천
(서울=연합뉴스) 오보람 기자 = "너희들, 나한테 이모라고 부르지 마. 나는 명우 형이야. 알았지?"
백발의 짧은 머리를 한 윤김명우(67) 씨가 카메라를 바라보며 어색하게 당부한다. 옷깃을 한껏 올린 코트에 동그란 선글라스, 빈티지한 구두 차림이 언뜻 멋쟁이 노신사 같기도 하다.
그는 이태원에서 레즈비언들을 위한 술집 '레스보스'를 운영한다. 가게 이름은 기원전 7세기 그리스 여성 시인 사포(Sappho)가 살았다는 에게해의 레스보스섬에서 따왔다.
레스보스는 1996년 공덕동에서 처음 문을 열었다. 한국 최초의 레즈비언 바가 생기자 아지트에 목말랐던 여성 동성애자들이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명우 씨도 당시 이곳을 드나들던 손님 중 하나였다. "우리만의 공간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좋았다"는 명우 씨는 2000년 가게 운영을 이어받았다. 그는 스스로를 '섬 지기'로 부르며 레스보스를 사랑방처럼 꾸려나갔다.
레스보스는 신촌으로 확장 이전한 이후 요즘 말로 '핫플' 중에서도 최고 핫플이 됐다. 4층 가게 앞부터 건물 밖 대로변까지 대기 줄이 이어질 정도였다.
이들은 왜 그토록 자신들만의 장소를 갈구했을까.
권아람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홈그라운드'는 레즈비언 공간의 50년 변천사를 되짚으며 그 이유를 들려준다. 동성애자의 '동' 자도 꺼내기 어려웠던 때에 청년 시절을 보내고, 칠순을 앞둔 나이에도 묵묵히 레스보스를 지키는 명우 씨의 삶을 조명하면서다.
권 감독은 레즈비언은 어디에서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쌓아나가는지를 탐구하는 작품을 구상하던 차에 과거 만났던 '명우 형'이 떠올랐다고 한다. 다시 만난 명우 씨는 촬영을 수락한 뒤 자신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2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세대의 성소수자 인터뷰와 인권센터 등 각종 커뮤니티에서 보관해온 영상·구술 자료도 카메라에 담았다. 자료가 부족한 부분은 과감하게 재연 영상으로 선보인다.
명우 씨는 고등학생 때 명동의 '샤넬 다방'에 간 기억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여성 전용 다방이었던 이곳은 1970년대부터 동성애자들이 하나둘 모이면서 퀴어 공간으로 거듭났다. 걸리면 퇴학당할 각오까지 했다는 명우 씨는 이곳에 간 덕에 숨통이 트이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샤넬 다방이 숨구멍이 되어 준 사람은 명우 씨뿐만이 아니다. 최옥진 씨도 "나 혼자서 숨어서 하는 건가 했는데, 나가 보니 그게 아니더라"고 명동을 주름잡던 당시를 회상한다. 일흔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그때를 회고할 때만큼은 청년 모습 그대로다.
정부는 1974년 이곳을 퇴폐 업소로 낙인찍고 경찰 기동대를 투입해 손님 120여 명을 체포했다. 언론은 이들에게 '짙은 담배 연기 속에 흔들고 포옹하고 속삭였다'는 혐의를 갖다 붙이며 경찰의 퇴폐 현장 급습 소식을 전했다.
나와 말이 통하는 사람과 한 공간에서 대화하고 노는,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너무나 일상적인 일이 성소수자에게는 쟁취해야만 하는 권리이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서도 레즈비언 공간은 혐오의 대상이긴 마찬가지였다. 청소년 레즈비언 수백 명이 모여 놀던 이른바 '신촌공원'이 그 사례 중 하나다. 한 방송사는 이곳에 잠입해 취재한 내용을 내보내 10대들을 아웃팅했다. 신촌공원은 '레즈공원'이라는 멸칭으로 불렸고, 레즈비언들은 오프라인 공간 대신 온라인으로 몸을 숨겼다.
명우 씨는 10대들이 갈 곳이 없어 방황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이 길거리에서 몰려다니다 봉변이라도 당할까 하는 걱정도 앞섰다. 그때부터 레스보스에서는 음료수와 식사 같은 청소년을 위한 메뉴를 팔기 시작했다.
그가 심각한 재정난을 겪으면서도 레스보스를 닫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곳에서나마 자유롭게 웃고 떠드는 '후배'들을 끝까지 책임지고 싶다는 것이다. 명우 씨는 지금도 식당 아르바이트를 뛰며 레스보스를 건사 중이다.
그와 레스보스를 찾는 이들이 바라는 건 좋은 사람들과 함께할 안전하고 편안한 장소다. 성소수자가 주홍글씨가 되지 않는 포용적인 세상도 꿈꿔 본다. 과거 레스보스 벽에 걸린 간판에 쓰여 있던 문구 그대로다.
'한 그루의 나무처럼 홀로 자유롭게 그리고 하나의 숲처럼 자매애로 뭉쳐 살아가는 것. 이것이 우리들이 그리는 삶.'
12월 6일 개봉. 85분. 12세 이상 관람가.
ramb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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