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K 다음은 SON, 그다음은 LEE!...프랑스 현지 “이강인이 한국 축구 아이콘 이어 받는다”

가동민 기자 2023. 11. 22. 06:5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포포투=가동민]


한국 축구를 이끌 재목들이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다.


PSG 소식통인 'PSG 토크'는 21일(이하 한국시간) “토트넘 훗스퍼의 손흥민은 한국 축구의 상징이었다. 그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활약한 박지성에게 스타의 자리를 받았다. 그는 31세로 전성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 다음 스타는 이강인이다. 이강인이 손흥민으로부터 한국 축구 아이콘을 이어 받는다”라고 전했다.


‘해버지’ 박지성은 한국 축구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선수다. 프리미어리그(PL) 1호 코리안리거로 당시 최고의 팀이었던 맨유에 입단했다. 박지성은 맨유에 이름만 올려놨던 것이 아닌 레전드로 남을 만한 업적을 세웠다. 박지성은 교체와 선발을 오가며 맨유에서 많은 경기를 소화했고 중원에서 그의 활동량은 엄청났다.


박지성은 공수 양면에서 모두 좋은 활약을 했다. 안드레아 피를로를 껌딱지처럼 쫓아다니며 막아냈고 첼시전, 울버햄튼전, 아스널전 등에서 귀중한 득점을 터트리기도 했다. 박지성은 맨유에서 PL 우승 4회, 잉글랜드 풋볼리그컵(EFL컵) 3회,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UCL) 1회를 차지했다.


박지성은 대표팀에서도 굉장했다. 지금까지도 박지성이 보여준 투혼과 투지는 자주 회자된다. 거스 히딩크 감독의 선택을 받아 2002년 한일 월드컵 대표팀에 승선했고 조별리그 3차전 포르투갈전에서 16강을 확정짓는 결승골을 넣었다. 이후 대표팀 주장을 역임했고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원정 첫 16강이라는 쾌거를 달성했다.


손흥민은 박지성을 이어 해외 축구의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손흥민은 어린 시절부터 유럽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함부르크 유스를 통해 함부르크에서 프로 데뷔에 성공했다. 레버쿠젠을 거쳐 토트넘의 유니폼을 입으면서 PL에 입성했다. 손흥민은 PL 첫 시즌에는 비판적인 여론이 많았다. 터치도 부정확했고 오프 더 볼 움직임도 좋지 않았다.


하지만 손흥민은 포기하지 않았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나갔다. 결국 PL 최고의 선수로 거듭났다. 2021-22시즌 PL 득점왕을 차지하기도 했다. 손흥민은 23골을 터트리며 모하메드 살라와 함께 PL 공동 득점왕을 수상했다. 아시아 선수 최초의 5대 리그 득점왕이라는 기록을 세운 것.


지난 시즌엔 스포츠 탈장, 안와골절 등으로 고생하며 부진을 면치 못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손흥민은 리그에서 10골 6도움을 기록했다. 이번 여름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쳤고 다시 일어섰다. 손흥민은 이번 시즌 최전방으로 위치를 옮겨 맹활약 중이다. 12경기 8골로 득점 3위다.


손흥민은 박지성과 마찬가지로 대표팀에서도 주축이었다. 2018년부터 대표팀의 주장을 맡았고 대표팀의 공격을 이끌었다. 손흥민은 파울루 벤투 감독과 함께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서 16강 진출에 성공했다. 12년 만이었다. 16강 진출에 손흥민의 역할이 컸다. 안와골절로 인해 마스크를 썼지만 그래도 위협적이었다. 조별리그 3차전 포르투갈전에서 역습 상황에서 손흥민이 황희찬의 골을 도우면서 대표팀은 16강에 올라갈 수 있었다.


차범근부터 시작된 해외리거의 역사를 박지성, 손흥민이 이어받았고 다음 차례는 이강인이다. 이강인은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재능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이강인은 어린 나이에 가족과 함께 스페인 발렌시아로 넘어가 타지 생활을 했다. 발렌시아는 이강인을 특별히 관리에 나섰다.


이강인은 발렌시아에서 데뷔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경기를 뛰지 못했다. 결국 이강인은 마요르카로 팀을 옮기며 돌파구를 찾았다. 이는 성공적이었다. 이강인은 마요르카 전술의 핵심이 됐다. 마요르카는 선수비 후역습 위주의 플레이를 구사했는데 마요르카의 공격은 대부분 이강인의 발부터 시작됐다. 시즌 내내 맹활약했고 리그 36경기 6골 6도움을 기록했다.


라리가에서 경쟁력 있는 모습을 보여준 이강인에게 빅클럽들이 관심을 보냈다. 맨체스터 시티,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파리 생제르맹(PSG) 등이 이강인의 다음 행선지로 거론됐고 결국 이강인은 PSG의 유니폼을 입었다.


이강인은 부상으로 이탈하는 시간도 있었지만 입지를 다졌다. 우스망 뎀벨레가 영입되면서 이강인과 주전 경쟁을 펼칠 것으로 예상됐지만 뎀벨레가 부진하면서 이강인의 평가는 더욱 높아졌다. 루이스 엔리케 감독은 “이강인은 좌우측 윙어, 미드필더, 가짜 9번도 소화할 수 있다”라고 평가했다.


이강인이 부상 회복 직후 아시안게임 대표팀에 차출됐고 경기력을 빠르게 회복했다.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좋은 흐름을 유지했다. A매치 데뷔골, 2경기 연속골을 기록하고 PSG에 돌아왔다. 이강인은 PSG에서도 득점, 도움을 가리지 않고 공격 포인트를 양산해 나갔다. 주전 걱정을 말끔히 없앨 만큼 좋은 기량을 보여주고 있다.


PSG뿐만 아니라 대표팀에서도 이강인의 존재감은 남달랐다. 우측면에서 탁월한 공 간수 능력을 바탕으로 많은 득점 기회를 만들었다. 안으로 들어오면서 직접 마무리하기도 하고 날카로운 패스로 도움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강인은 11월 A매치 동안 1골 2도움을 기록했다. A매치 4경기 연속 공격 포인트였다. 왜 이강인이 한국 축구의 현재이자 미래인지 알 수 있었다.


가동민 기자 syg100151@fourfourtwo.co.kr

ⓒ 포포투(https://www.fourfourtwo.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Copyright © 포포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