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역할 왜? 모든 걸 다 할 수 있어야 진짜 광대"… '고도를 기다리며' 박정자
신구·박근형 등 연극사 산증인 집결
"무대 위 광대라는 게 성별이 관계가 있나요? 뭐든지 다 할 수 있어야 배우지."
우문에 현답이었다. 다음 달 19일부터 내년 2월 18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공연되는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원작에 남자로 설정된 럭키 역을 맡은 배우 박정자(81)는 이 배역 도전 이유를 묻는 질문에 "배우 안에는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빛깔이 모두 들어 있어야 하고 빨간색만 꺼낼 줄 안다면 그것은 배우가 아니다"라고 답했다.
아일랜드 극작가 사뮈엘 베케트(1906~1989) 원작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임영웅 연출가가 1969년부터 50년간 1,500회 무대에 올린 극단 산울림의 히트작. 오경택 연출가의 손에서 새롭게 탄생할 이번 프로덕션은 연극사의 산증인들이 대거 참여한 캐스팅 발표만으로도 관심을 모았다. 끝내 나타나지 않는 고도(Godot)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두 주인공 에스트라공(고고)과 블라디미르(디디)는 신구(87)와 박근형(83)이 각각 맡았다. 박정자는 목줄을 맨 짐꾼 럭키를, 럭키를 노예처럼 부리는 포악한 지주 포조는 김학철(64)이 연기한다.
최근 제작사인 서울 종로구 동숭동 파크컴퍼니 사무실에서 만난 박정자는 "프로듀서도, 연출자도 나를 캐스팅하지 않았지만 작품 소식을 듣자마자 내가 번쩍 손을 들었다"며 "배우는 선택받는 직업이지만 나는 캐스팅되지 않았을 때도 자발적으로 도전 의사를 밝혀 성공을 거둔 사례가 여러 번 있다"고 말했다. 그의 럭키 역 캐스팅에 대해 오 연출가는 "박정자 선생님이 럭키를 하겠다고 하셔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도전이라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면서도 "인간의 보편적 이야기여서 성별이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기자간담회에서 밝히기도 했다.
최근 몇 년 사이 극 중 남성 역할을 여성 배우가, 여성 역할을 남성 배우가 연기하는 '젠더프리' 캐스팅이 늘었다. 박정자는 이보다 20여 년 앞서 남자 캐릭터를 연기한, 어찌 보면 이 분야의 개척자다. 2001년 여성 연기자 최초로 '에쿠우스'의 정신과 의사 다이사트 역을 소화했고, 2011년엔 연극 '오이디푸스'에서 주로 남자 배우가 맡아 온 예언자 티레시아스를 연기했다. 그는 "언제나 어머, 저게 정말 박정자야, 하는 즐거운 놀라움을 관객에게 주고 싶다"며 "상식적 역할보다는 깜짝 놀라게 하는 낯선 역할을 늘 하고 싶다"고 말했다.
1962년 이화여대 문리대 연극부의 '페드라'로 데뷔한 박정자는 한 해도 쉬지 않고 연극에 출연했다. 그는 "슬럼프가 알게 모르게 지나갔을 수는 있지만 쉬고 싶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며 "쉬는 건 호흡을 멈추는 것과 다름없다"고 했다. 기억에 남는 작품을 묻는 질문엔 "지금 하는 작품이 기억에 남는 작품이고 살아 있는 매 순간이 전성기"라며 "나 스스로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항상 이렇게 답한다"고 털어놓았다.
당연히 그는 '고도를 기다리며' 폐막 후 계획도 이미 세워 뒀다. 내년 6월에는 뮤지컬 '영웅' 15주년 공연에서 안중근 모친 조마리아를 연기한다. 올해 계획했다 불발됐던 김아라 연출가의 연극 '페르시아인들' 그리스 공연도 재추진돼 출연할 수 있게 되길 바라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1989년 베케트의 부고 기사에서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구원자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 고도는 결코 나타나지 않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그를 기다린다. 베케트에게 기다림이란 공연한 공백이 아닌 영감과 인식, 이해, 또는 죽음을 기다리는 본능적 삶의 방식이다.'
박정자 역시 '고도를 기다리며'의 주제를 이와 유사하게 바라본다.
"고도를 막연하게만 생각하면 너무 희망이 없잖아요. 관객이 고고와 디디처럼 '그냥' 기다리는 마음으로 연극을 보면 좋겠어요. 고도를 만나는 순간을 우리는 일상에서 스스로 만들 수 있죠. 내가 늘 경이롭게 여겨 온 작품 '고도를 기다리며'의 럭키를 통해 고도를 만났다고 생각하는 것처럼요. 우리 인생이 뭐 그렇게 거창하던가요."
김소연 기자 jollylif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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