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옷 주머니에 틀니비용 넣은 프란체스카…며느리 “어머님의 스위스 비밀 은행”
1954년 11월 27일 국회는 제2차 헌법 개정안을 표결에 부쳤다. 개표해 보니, 찬성 135표, 반대 60표, 기권 7표였다. 개헌안은 재적 의원의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통과되는데, 당시 재적 의원은 203명이었다. 따라서 제2차 개헌안은 135.333…명의 찬성이 필요했다. 1표가 모자라자, 사회를 맡은 최순주 부의장은 부결을 선언했다.
이튿날 갈홍기 공보처장이 “개헌안은 통과된 것으로 본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재적 의원 203명의 3분의 2는 135.333…인데, 인체는 소수점으로 나눌 수 없으므로, 소수점 이하는 사사오입을 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11월 29일 최 부의장은 개헌안의 가결을 선포했다. 그러자 개헌에 반대하는 의원들이 거칠게 항의하고서 퇴장했다. 자유당 의원들만이 참석한 회의는 ‘부결된 개헌안이 가결 통과’된 것으로 수정해서 정부로 이송했다.
‘사사오입 개헌’이라 불리게 된 제2차 개헌에서 핵심적 내용은 시장에 대한 정부의 과도한 통제를 줄여서 헌법을 시장경제의 원리에 맞도록 한 것이었다. “광물 기타 중요한 지하자원, 수산자원, 수력과 경제상 이용할 수 있는 자연력은 국유로 한다”는 조항과 “중요한 운수, 통신, 금융, 보험, 전기, 수리, 수도, 가스 및 공공성을 가진 기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한다”는 조항을 삭제한 것은 대표적이었다. 제1차 개헌으로 대통령 간선제를 직선제로 바꾸고 제2차 개헌으로 사회주의적 색채를 많이 지우면서, 비로소 대한민국 헌법은 자유민주주의 헌법의 모습을 제대로 갖추었다.
연임 제한 조항의 우회
제2차 개헌안의 핵심은 실은 본문이 아니라 “이 헌법 공포 당시의 대통령에 대하여는 제55조 제1항 단서의 제한을 적용하지 아니한다”는 부칙이었다. 여기서 언급된 제55조 제1항은 “대통령과 부통령의 임기는 4년으로 한다. 단, 재선에 의하여 1차 중임할 수 있다”였다. 따라서 제헌헌법 공포 당시의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연임할 수 있게 되었다.
제2차 개헌은 재적 의원 3분의 2에 미치지 못하는 찬성표를 ‘사사오입’으로 억지스럽게 맞추었다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었지만, 그래도 그것은 형식적 문제였고, 어떤 뜻에선 사소한 일이었다.
대통령의 임기를 중임으로 제한한 제헌헌법의 규정은 결코 제2차 개헌의 부칙과 같은 편법으로 우회해선 안 되는 본질적 규정이었다. 설령 개헌안이 더 많은 지지를 받아 적법하게 통과되었더라도, 그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대통령의 임기를 중임으로 제한하는 관행은 가장 먼저 그리고 성공적으로 대통령제를 운영해온 미국에서 나왔다. 미국 헌법은 처음엔 대통령 임기를 제한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지 워싱턴이 중임한 뒤 물러나고 다른 대통령들도 그를 본받으면서, 중임제가 불문율로 자리 잡았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1933년부터 1940년까지 재임했다. 그리고 당시 유럽에서 한창인 전쟁을 이유로 들면서 3선에 나서서 당선되었다. 이어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가했다는 사정을 내세워 네 번째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루스벨트의 장기 집권은 여러 중대한 문제들을 드러냈고, 1947년에 대통령의 임기를 중임으로 제한하는 수정 헌법 제22조가 만들어졌다.
이 대통령은 조지 워싱턴을 숭배했다. 그리고 루스벨트의 장기 집권이 낳은 문제들을 잘 알았다. 그러나 그는 워싱턴 대신 루스벨트를 따라 종신 대통령의 길을 걸었다.
여기서 어쩔 수 없이 안타까운 물음이 나온다, ‘왜 이 대통령은 그렇게 연임에 집착했는가?’ 그는 권력 자체에 집착한 지도자가 아니었음을 우리는 그의 삶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왜 1954년엔 연임을 시도했는가?
이내 떠오르는 답변은 당시 동아시아의 위태로웠던 정세다. 1953년 7월의 휴전협정엔 ‘협정 발효 뒤 3개월 안에 정치회담(political conference)을 연다’는 조항이 있었다. 이 조항에 따라, 1954년 4월에 제네바에서 자유 진영의 한국과 미국을 비롯한 유엔 참전국이 공산 진영의 북한, 중국, 소비에트 러시아와 회담을 열었다. 특이한 것은 러시아가 중립국으로 참가한 것이었다. 러시아가 중립국일 수 없다는 한국의 주장을 미국이 끝내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었다.
한국은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이므로 북한에서만 유엔이 주관하는 선거가 치러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은 중립국들이 선거를 주관하는 방안을 내놓았고 북한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양측 다 양보할 뜻이 없었으므로, 회담은 나아가지 못했다.
그러자 영국이 주도해서 ‘참전국 타협안’을 내놓았는데, ‘유엔의 주관으로 남북한 전역에서 총선거를 치른다’는 내용이었다. 미국은 이 안을 받아들이라고 한국에 강권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참전국 타협안’이 본질적으로 “유엔과 대한민국이 스스로 과거의 결의와 행동을 부인하는 것”이라는 점을 들어 미국의 거센 압박에 맞섰다. 결국 한반도 문제를 다루는 정치 회담은 결렬되었다. 그렇게 해서, 이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기초를 허물려는 공산 진영의 술책과 그것에 동조한 우방의 압력을 끝내 물리치고 나라를 지켰다.
당시 제네바에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문제도 다루어졌다.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군이 베트남 공산군에 항복한 날에 시작된 협상에서,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삼아 북쪽의 공산주의 지역과 남쪽의 자유주의 지역으로 나뉘었다. 이런 상황에서 100만가량 되는 북부 사람들이 남부로 탈출했다. 이들은 주로 하이퐁 항을 통해서 미국이 보낸 배들로 탈출했다. 현장에 있었던 기자들은 200만 내지 300만 명이 배를 못 타서 북부에 남았다고 추산했다.
1950년 12월 미군의 흥남철수작전 덕분에 탈출한 북한 주민은 10만 가까이 되었다. 당시 배가 부족해서 흥남 부두에 모인 피란민들의 절반만 싣고 나왔다고 철수작전의 보급을 지휘한 제임스 도일 제독은 술회했다. 따라서 하이퐁 철수는 흥남 철수의 10배가 넘는 규모였고 남겨진 사람들은 20 내지 30배가 되었다. 흥남 철수의 비극을 노래한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가 국민 가요가 된 그때, 하이퐁 철수의 비극은 먼 나라 얘기가 아니었다.
세계적으로 자유주의 진영이 공산주의 진영에 속절없이 밀리는 상황에서 이 대통령은 자신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내가 물러나면, 공산주의 국가들은 틀림없이 제네바 회담을 다시 열자고 할 터이고 미국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것이다. 그리고 틀림없이 공산주의자들은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새로 총선거를 치르자고 할 것이다. 거의 틀림없이 미국은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때 과연 내 후임자가 미국의 압력을 견딜 수 있을까?”
그 심중한 물음에 그는 고개를 저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그의 답변에 동의했을 것이다. 당시 그의 후임으로 유력했던 신익희, 장면 및 조병옥은 미국의 뜻을 거스를 의사도 의지도 없었다.
아마도 그래서 하이퐁 철수의 비극이 막 펼쳐지던 1954년 여름에 이 대통령은 연임 제한 조항의 우회를 결심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선택을 ‘대의를 위해 소절에 얽매이지 않는 결정’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이런 추론은 그의 오랜 친구 윌리엄 불리트가 남긴 글에 의해 떠받쳐진다. 첫 소비에트 러시아 주재 미국 대사를 지낸 불리트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행태에 환멸을 느껴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된 외교관으로 1953년 6월에 서울에 와서 이 대통령을 만났다. 당시 미국에선 ‘미국이 공산주의자들의 휴전 조건을 받아들인 것 때문에 이승만이 거의 공황 상태(hysteria)가 되었다’는 얘기가 돌았다. 막상 만나보니, 이 대통령은 “차분하고, 기지가 넘치고, 현명하고, 결심이 서고, 양심에 거리낌이 없었다.” 불리트는 그를 “자신의 임무를 자신이 이해하는 대로 감히 수행하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3·15 정부통령 선거 부정
이 대통령이 장기 집권을 꾀하면서, 그의 둘레엔 뛰어난 추종자들이 크게 줄어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고른 후계자는 그의 비서 출신인 이기붕이었다. 이 선택은 연임 결정의 문제점들을 키웠다. 이기붕은 큰 흠이 없고 능력도 상당했지만, 정치 지도자로선 자질과 경험이 부족했다. 무엇보다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서, 당선 가능성이 낮았다.
1956년 5월 15일의 선거에서 자유당은 이승만과 이기붕을 정부통령 후보로 공천했다. 민주당은 신익희와 장면을 공천했다. 신익희가 선거 열흘 전에 급사하면서, 대통령 선거는 이승만과 조봉암 사이의 대결이 되었는데 이승만이 70%를 얻었고 조봉암이 30%를 얻었다. 부통령 선거에선 장면이 46%를 얻었고, 이기붕은 44%를 얻었다.
선거 당시 이 대통령은 이미 81세였다. 그리고 노쇠의 기미를 보였다. 자연히, 사람들은 그보다 ‘미래 권력’인 이기붕 둘레로 모였다. 이기붕이 이 대통령의 수석 비서였으므로, 이 대통령의 측근들도 그가 장악하게 되었다. 게다가 이기붕의 아내 박마리아는 프란체스카 여사의 수석 비서 역할을 오래 했다. 이런 사정은 이 대통령 내외에게 올라가는 정보를 이기붕 내외가 통제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1960년 3월 15일의 선거를 앞두고, 승산이 작다고 판단한 이기붕과 그의 지지자들은 선거 부정을 획책했다. 1960년 2월 15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병사하면서, 이승만 후보는 자동적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자유당은 이기붕이 부통령에 당선되어야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으므로, 선거 부정을 강행했다.
선거 부정이 워낙 노골적이었으므로, 민주당은 투표 참관을 포기하고 3·15선거는 “선거의 이름 아래 이루어진 국민 주권에 대한 강도 행위”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런 발표에 촉발되어, 투표일 저녁에 마산에서 부정 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일었다. 시위는 전국으로 퍼져서, 4월 19일엔 서울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경무대 앞에서 경찰의 발포로 학생 100여 명이 죽었다.
이 대통령은 4월 26일에 하야를 선언했다. 그리고 허정을 수석 각료인 외무부 장관에 임명해서 새 내각을 이끌도록 한 뒤, 4월 28일에 경무대를 나왔다. 그 괴로운 과정에서 그는 끝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나로선 부정선거를 할 이유가 없었다”라는 한마디를. 긴 미몽(迷夢)에서 깨어나 맑은 정신이 든 것이었다.
하와이에서의 말년
속옷 주머니에 틀니비용 넣어온 프란체스카… 며느리 “그곳이 어머님의 스위스 비밀 은행”
이화장에서 기거한 지 한 달인 1960년 5월 24일, 이승만 내외는 하와이의 최백렬 한인동지회장으로부터 초청 전보를 받았다. 모든 비용을 부담할 터이니, 하와이에서 한동안 휴양하라는 얘기였다. 허정 내각 수반의 주선으로 5월 29일에 그들은 김포 공항을 떠나 하와이로 향했다.
이튿날 신문들은 이승만이 “망명”했다고 보도했다. 이어 재무부 차관이 그가 재임 시에 1700만 달러의 국고금을 유용했다고 발표했다. 한 신문은 프란체스카 여사가 막대한 금액을 미국과 스위스의 은행에 예금했다고 보도하면서, 이승만 부부는 그 이자만으로도 여생을 편히 지내리라고 덧붙였다.
정부가 귀국을 막아 하와이 체류가 길어지자, 주위 사람들은 이승만에게 다른 이유로 늦어진다고 둘러댔다. 이승만 부부는 옛 친구들과 제자들이 마련한 거처로 옮겼다. 길어야 3주 머물다 갈 생각이었으므로, 노부부는 가져온 것이 없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도와주었지만, 귀국이 마냥 지연되자, 점점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귀국을 막는다는 것을 깨닫자, 이승만은 절망했고 그의 건강은 빠르게 나빠졌다. 그는 1965년 7월 19일에 하와이에서 운명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장례 뒤에 혼절해서 치료를 받느라, 남편의 관이 서울로 떠난 뒤 하와이에 혼자 남았다. 한국에선 생계를 꾸릴 길이 없었으므로, 그녀는 오스트리아의 친정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상황이 안정된 1970년에야 이화장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양아들 내외에게 먼저 틀니를 하겠다고 말했다. 속옷 안쪽에 주머니를 달아 그 속에 3000달러를 넣어왔다면서, 치료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덧붙였다.
며느리가 물었다, “어머님, 왜 기술이 더 좋은 오스트리아에서 틀니를 하시지 않으셨어요?” 프란체스카 여사가 정색하고 대답했다. “너희 아버님이 독립운동 하실 때는 1달러도 아끼셨는데, 어떻게 몇 천 달러를 외국에서 쓰니?”
아들과 며느리는 3000달러가 들었던 그 속옷 주머니를 ‘어머님 스위스 비밀은행’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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