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나이란 없어요, 마지막까지 가슴 뭉클한 삶을…
# 33년 은행원이었다가 준비없이 퇴직, 방황 뒤 수산가공업으로 화려한 재기
▮ 오용환 나라수산 대표
오용환 나라수산 대표는 부산은행에서 33년 간 근무했다. 이후 고등어 제조가공기업 대표로 인생이모작에 성공했다.
오 대표는 퇴직 후 길고 긴 터널을 걷는 것 같이 막막했다. 그는 “부산은행에서 33년 동안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승진을 꿈꿨고, 퇴직이라는 말은 와닿지 않았다”며 “먼일 같던 퇴직이 내 일이 됐다. 준비 없는 퇴직이다 보니 갈 곳이 없었다. 취업도 해봤지만, 1년도 못가 퇴사 압박을 받았다. 막막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아내의 응원으로 힘을 얻었다. 오 대표는 “매일 금정산에 오르는 게 낙이었다. 김밥을 사서, 같은 길을 걷고 또 걸으며, 같은 곳에서 쉬며 밥을 먹었다. 반복되던 하루가 싫어 아침에 눈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고 했다. 이어 “어느 날 집사람이 도시락을 싸주었다. 산에서 열어보니 응원의 편지가 있었다. 펑펑 울며 도시락을 먹었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시작할 용기를 냈다”고 말했다.
그는 우연히 찾아온 고등어 가공업의 기회를 살려, 자기 회사를 일구었다. 오 대표는 “지인에게 고등어 가공업 제안을 받았다. 일단 배운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며 “이후 독립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라수산’을 창업했다”고 말했다. 부지런히 발로 뛰며 거래처를 늘린 덕분인지 줄곧 매출이 올랐다. 하지만 또 다시 시련이 찾아왔고, 오 대표는 또 다시 용기를 내 지금은 제 궤도를 찾았다.
그는 “2021년 5월 회사 건물이 전소하는 사고가 있었다. 공장장까지 잃었다. 사업 2년 차였는데 모든 것이 사라졌다. 주저앉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다시 힘을 내기로 했다. 아내도 재건에 힘을 보탰다. 지금은 매출을 완벽히 회복했고 특허까지 냈다”고 덧붙였다. 그는 응원의 한 마디로 발표를 마쳤다.
“100세 인생 모두가 청춘입니다. 늦은 나이는 없습니다. 안 된다고 하면 될 일도 되지 않습니다. 힘내서 열심히 살아봅시다.”
# 고난에 지친 삶 매일 10㎞ 도보 수행, 기대치 않았던 ‘걷기 전문가’ 길 열려
▮ 박미애 걷기 전문가
두 번째 발표자는 매일 10㎞씩 걷는 박미애 걷기전문가였다. 그는 교육 관련 직종에서 15년간 근무했다. 이후 동서대 시니어운동처방학과에 입학했고, 끊임없이 걷기 운동을 한다.
결혼 전 자신만의 인생을 열심히 살았지만, 결혼 후 여러 악재가 겹쳤다. 그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나와 대기업에 4년간 근무했다. 그 후 남들이 졸업한 뒤 결혼하던 시기에 대학에 들어갈 정도로 열심히 했다”며 “그런데 결혼 후 남편과 갈등도 있었고, 아이를 봐주신다고 해 시댁에 들어갔는데 시어머니는 암 판정을 받고 시아버지는 치매를 겪는 일이 생겼다. 간호는 오롯이 내 몫이었다”고 회고했다. 이어 “유일한 희망은 착실히 공부하는 아이였다. 외고에 다니던 아들이 자랑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전학을 원했다. 마음이 크게 아팠다”고 말했다.
그는 걷기를 통해 어려움을 견뎌낼 수 있었다고 힘줘 말했다. “처음에는 무작정 걸었다. 힘들었지만 집에 들어갈 땐 상쾌했고 기분이 나아졌다”며 “나중에는 남편까지 몸이 아파 식사를 직접 먹여 줘야 할 정도였다. 새벽 4시에 병원에 나와 울며 걸었다.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 창구였다”고 박 씨는 회상했다. 남편은 이제 재활을 통해 걸을 수 있을 만큼 상황이 나아졌다. 그는 걷기 전문가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 중이라 했다. 그는 “걷기는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다. 더 성장하고 싶었다”며 “잘 걷는 방법을 찾아 걷기전문가 과정을 수강했다. 걷기에 관해 더 배우려고 동서대에 입학했다”고 말했다.
그는 걷기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돕는 것이 최종 목표라고 했다. 박 씨는 “걷기를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암 환자들과 함께 걷고 싶다. 사람들이 걸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싶다”며 “걷기학교도 세우고 싶다. 걷기 강의로 세계를 다니는 게 꿈이라 영어도 열심히 공부한다”고 했다. 이어 “좋아하는 것을 지금 당장 도전하면 희망을 가져다줄 것이다”고 강조했다.
# 사업가에서 정치인으로 교수로 변신, 이젠 전무후무 ‘모델가수’로 새 인생
▮ 박태희 모델 가수
“가슴 뭉클한 삶을 사세요. 자신감과 열정을 꼭 가지세요.”
마지막으로 발표한 사람은 경남도의원에서 ‘모델가수’로 변신한 박태희 씨였다. 모델가수는 모델과 가수 활동을 동시에 하는 사람으로 생각하면 된다. 그는 간주가 나올 때 모델 포즈를 취하는 우리나라에서 사실상 유일한 모델가수다.
그의 인생은 순항했다고 한다. 순항하던 인생은 밀양시장 선거 낙선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박 씨는 “1990년대 초에 건설사를 운영했다. 이후 경남도 교육위원을 맡았고 도의원까지 했다”며 “뒤에는 밀양시장 공천까지 힘들게 받았는데 여러 악재 때문에 낙선했다. 충격을 많이 받았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는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고, 어릴 적 꿈이었던 가수가 되겠다는 결심까지 했다. 박 씨는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공부를 시작해 대학원에서 정치학 학사를 받았다. 모 대학에 교수로 근무도 했다”며 “힘든 순간을 잘 이겨냈다고 생각했지만, 문득 이전에 꿈이 가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걸 접고 데뷔곡을 발표했다. 디너쇼 3번과 콘서트 4번을 열었다. 박태희 노래경연대회도 만들어 2회째를 맞았다”고 그간 변화를 들려줬다.
그는 곡 홍보와 새로운 배움 등 끊임없는 도전을 이어갔다. 박 씨는 “곡 홍보를 위해 전국 노래교실을 계속해서 다녔다. 코로나19 시기에는 유튜브로 홍보했다”며 “최근 판소리를 배우기 위해 예인을 찾아가 수업을 받았다. 박태희 TV라는 유튜브 채널도 개설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메시지를 전하며 발표를 마쳤다. 박 씨는 “노래한다고 하니 처음에는 대부분 ‘하다 말겠지’라고 말했습니다. 더구나 당시 트로트라는 장르를 곱지 않게 보는 시선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열정을 다해 도전하다 보니 모든 사람이 ‘부럽다’는 말을 합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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