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균의 어반스케치] 돌계단이 있는 골목길-팔달산 자락에서
초겨울이다. 남아 있는 잎들이 세금 고지서처럼 흩날리는 스산한 날씨에 창밖에는 주먹눈이 쏟아진다. 일찍 찾아온 첫눈이다. 그러나 그 어떤 아름다운 서정도 가슴에 도달하지 못하는 시절이 온 것 같다. 지나가는 세월처럼 덤덤하고 떨어지는 단풍잎처럼 성가시기도 하다. 겨울이 오면 암울했던 청년 시절이 자꾸만 마음 창을 가린다. 첫 상경에 맞닥뜨린 성북동의 겨울, 양남동 뚝방촌, 문래동과 청파동의 음지도 거쳤다. 전역 후는 오류동 언덕길을 힘겹게 오르내리며 지난한 운명에 도전해 왔다. 꺼질 수 없는 연탄불의 지속성처럼 냉혹한 겨울은 길었다.
그러나 추억은 고달프지 않다. 도저히 올 것 같지 않던 봄이 찾아오듯 고난의 극복은 현재를 따뜻하게 위로해 주기 때문이다. 팔달산 기슭의 교동 골목길도 가파른 시간의 무늬가 남아 있다. 굴곡진 계단 길이 현재와 과거의 여정 같은 원근감을 준다. 이상을 향하는 소실점 너머엔 분명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의 궁극이 있을 것이다. 오늘을 단단하고 간결하게 살아야지.
첫눈 오는 아침 문득 이런 시가 떠오른다. ‘그래도 첫 마음은 잊지 말자고/또박또박 백지 위에 만년필로 쓰는 밤/어둡고 흐린 그림자들 추억처럼/지나가는 창문을 때리며/퍼붓는 주먹눈, 눈발 속에/소주병을 든 김종삼이 걸어와/불쑥 언 손을 내민다/어 추워, 오늘 같은 밤에 무슨/빌어먹을 짓이야. 술 한잔하고/뒷산 지붕도 없는 까치집에/나뭇잎이라도 몇 장 덮어줘, 그게 시야!’ -전동균 ‘주먹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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