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인의 눈에 비친 전쟁 속 한국인
우리는 ‘6·25전쟁’(한국전쟁) 하면 흔히 미국을 연상하지만, 동남아시아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당시 타이와 필리핀은 유엔군 일원으로 전투부대를 파병했고, 인도네시아는 국내 문제로 인해 물자만 지원했다. 또한 인도네시아인 종군기자가 자카르타~발릭파판~마닐라~도쿄를 거쳐 한반도에 도착했다. 유엔의 초청으로 목타르 루비스(Mochtar Lubis)는 1950년 9월21일 인도네시아에서 출발해 오랜 여정 끝에 부산에 도착했다. 이후 목타르는 유엔군과 함께 부산, 밀양, 대구, 대전, 김포, 인천, 서울로 이동하면서 전쟁이 가져온 비극에 대해 담담하지만 연민의 감정을 투영시켜 기술했다.
그에게 6·25전쟁은 국제정치의 현실을 목도하는 전장이었지만, 한편으로 폐허가 된 공간, 가족을 잃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 이데올로기로 인해 누구도 믿을 수 없는 현실이기도 했다. 특히 주목되는 점은 목타르가 다른 외신기자와 달리 전쟁 당사자인 한국인에게 관심을 보인 것이다. 다른 외신기자들이 미군과 한국군이 전투에서 세운 혁혁한 공로 보도에 집중했다면, 그는 “역 근처 길가에서 자신의 소지품을 보관해뒀던 너덜너덜한 바구니를 놓고 잠자는 난민 노인의 마음과 생각을 알고 싶었을 뿐”이라고 기술한다. 목타르는 인도네시아로 돌아간 뒤 1951년 <한국에서의 기록>(Tjatatan Korea)이란 제목의 책을 출판했다.
외곽도서 출신의 청년, 민족주의 이념과 조우
목타르는 무엇보다 전장에 있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려 했다. 그는 인간에 대한 사랑, 즉 평등·자유·우애의 감정으로 전쟁의 ‘실질적인’ 당사자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이런 인류애는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발현된 것이 아니라, 기자이자 문학가로서 목타르의 삶 전반에서 나타난다.
목타르는 1922년 3월7일 서부 수마트라의 번화한 항구도시인 파당에서 태어났다. 목타르의 아버지는 만다일링족 귀족 출신으로 네덜란드 식민 정부의 고위 공무원을 지냈다. 아버지의 직업은 목타르가 부유한 학창 시절을 보내며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발판이 됐다. 목타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입학한 학교는 민족주의 성향을 지닌 경제학교였다. 그는 다양한 언어로 된 문학책을 읽고 민족주의적 영감을 받은 선생님들의 영향으로 점차 민족 정체성이 더욱 확고해졌다.
하지만 당시 유행하던 공산주의에 대한 의심과 반감은 더욱 강해졌다. 특히 교사 중 한 명이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귀족이자 식민지 관료가 독립 이후 공산주의자의 첫 번째 표적이 되리라고 말했던 것이 평생 공산주의에 반감을 갖는 원인이 됐으리라 추정된다. 목타르는 1939년 학교를 마쳤으며, 파당 인근의 작은 섬에서 네덜란드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으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학생들에게 독립 이후 국가로 지정된 ‘인도네시아 라야’를 가르치면서 첫 직장에서 해고됐다.
직장을 잃은 뒤 목타르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대신 수도 바타비아(현재 자카르타)로 향한다. 바타비아에서 목타르는 은행원으로 일하면서 민족주의자들과 교류하는 데 더 큰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태평양전쟁이 일어났고 1942년 3월5일 일본군이 바타비아를 점령하면서 그는 다시 직장을 잃었다. 그리고 목타르는 앞으로 자신에게 수많은 영광과 시련을 안겨줄 일을 시작한다.
당시 일본군은 인도네시아를 점령한 뒤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영어가 능통한 인도네시아인이 필요했고, 목타르는 영어 방송을 요약하는 일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목타르는 신문과 방송의 영향력을 확인했고, 한편으로 일본과 협력하던 민족주의자들과 교류하는 기회가 늘어났다. 하지만 목타르는 일본에 의한 인도네시아인 강제동원·노동(로뮤사)을 수카르노가 독려하는 것에 비판적이었고, 이는 독립 이후 목타르와 수카르노의 악연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신문 발행 그리고 체포와 석방
1945년 8월17일 인도네시아는 세계사에 유례없을 만큼 길었던 식민지배를 끝내고 독립을 이뤄냈다. 국내적으로 다양한 정치집단 사이의 갈등이 있었고, 국외에서는 네덜란드가 식민영토를 복원하려 했다. 당시 목타르는 인도네시아 국영 통신사 <안타라>에 합류하면서 기자로 활동한다. 취재 과정에서 여러 정치인과 교류했고, 아시아의 여러 신생 독립국가를 방문하면서 국제적 감각을 쌓아갔다.
네덜란드와의 독립전쟁 기간 목타르는 <안타라> <메르데카> <마사> <무티아라> 등의 매체에서 기자와 편집자로 일했다. 또한 그의 첫 번째 소설 <내일은 없다>(Tidak ada Esok)로 등단하고, 예술가협회 창립을 주도하는 등 문학과 예술 영역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저널리즘이 사회 발전에 중요한 일임을 인식했지만, 한편으로 허구의 글쓰기가 그의 삶에 자양분이 됐다.
1949년 12월27일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했다. 이틀 뒤인 12월29일 ‘인민으로부터,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이란 목표를 가진 일간지 <인도네시아 라야>(Indonesia Raya) 창간호가 발행됐다. 창간 당시 군부의 재정 지원을 받았지만, 목타르를 비롯한 창간 주역들은 신문 발행에서 독립성, 특히 특정 정치집단의 이익에 얽매이지 않는 언론을 지향했다.
<인도네시아 라야>가 발행되던 1950년대 인도네시아는 정당 간 연합을 통한 의회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었다. 당시 발행된 신문들은 대체로 특정 정당이나 정치집단과 느슨한 형태의 유대로 정파 이익에 부합하는 기사를 출고했다. 이런 가운데 <인도네시아 라야>는 도리어 공격적이고 탐사적인 기사를 제공하고 독립적인 편집 정책을 내세웠다. 이를 통해 ‘자카르타의 가장 우수한 감시 저널리즘’이라는 평판과 대중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
의회민주주의 체제에서 총리들은 수카르노가 대통령으로서 상징적 역할만 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여전히 군부와 수카르노는 독자적인 정치 역할을 수행하는 힘과 대중적 영향력이 있었다. 수카르노는 1952년 10월17일 지역군 사령관들이 벌인 쿠데타와 시위를 큰 소요 없이 해산시킴으로써 정치적 영향력을 재차 확인했다.
역사적인 인도네시아의 첫 총선거가 1955년 9월29일 실시됐지만, 의석을 획득한 정당이 28개로 늘어남으로써 정치 혼란은 더욱 가중됐다. 혼란한 정국을 수습한다는 명목으로 수카르노는 1957년 군부를 포섭하고 국가평의회를 설립했다. 이후 1959년 8월17일 독립기념일에 수카르노는 지도자의 교도(敎導)에 의한 질서 있는 토론과 만장일치를 원칙으로 하는 교도 민주주의 이념을 제시했다. 자유로운 정당 활동을 막고 의회를 해산하고 계엄령을 선포함으로써 국내 정치를 장악했다.
‘민주주의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연민’
목타르는 수카르노의 일방적인 정치활동과 정부 인사가 행한 부정부패에 관한 여러 기사를 게재하고, 이는 목타르를 궁지로 몰아넣고 만다. 결국 그는 1956년 12월21일 재판 없이 처음 구금됐고 <인도네시아 라야>는 폐간됐다. 목타르는 1961년 4월29일 가택연금에서 일시적으로 풀려났지만, 1961년 7월14일 다시 체포돼 동부 자바의 마디운 감옥에 재수감됐다. 이후 수카르노가 정치적 실권을 잃은 뒤인 1965년 10월25일 자카르타의 군교도소로 이감됐다. 수카르노에서 수하르토로 정권이 이양되는 혼란한 상황이 펼쳐지던 1966년 5월17일, 그는 마침내 석방됐다.
석방 이후 목타르는 1968년 <인도네시아 라야>를 재발행했다. 하지만 1974년 1월 일본 총리의 인도네시아 국빈방문에 항의하는 반일시위인 ‘말라리 사건’ 보도를 이유로 신문은 폐간되고, 그는 재수감된다. 목타르의 재수감은 전세계 언론인들의 항의로 이어지고 정부 당국은 2개월 만에 그를 석방한다. 목타르는 당시 인도네시아 권위주의 정부에 대항하는 상징적 인물이었고, 10여 년간의 가택연금과 수감생활을 거쳤다.
<인도네시아 라야>가 폐간되고 가택연금 기간에 목타르가 세상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소설 창작이었다. 구금된 시기에 집필한 <자카르타의 황혼>(1963년)은 목타르를 세계적 작가 반열에 오르게 했다. 그는 인도네시아 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의 심각성을 이야기하면서 빈민층이 겪는 참혹한 가난의 문제를 묘사했다. 목타르에게 인간은 최우선 관찰 대상이었고, 이들에 대한 보편적인 사랑과 연민이 그가 쓴 소설의 주요 관심사였다. 그는 소설 집필에 대해 “나는 항상 내 경험을 바탕으로 허구의 이야기를 쓴다. 내 문학은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실제 삶을 바탕으로 한다”고 설명했다.
특정 이데올로기에 매몰된 정치인은 들으라
목타르는 1950년대 비극적인 한반도 현실을 기록한 공로를 인정받아 1958년 ‘라몬 막사이사이상’을 받았다. 공익을 위한 그의 용기 있고 건설적인 공헌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목타르가 생각하는 이상적 사회는 어떤 사회였을까. 전쟁의 참상을 겪은 한국인을 통해 그가 인도네시아인에게 들려주려던 이야기는 무엇일까. “한 국가의 지도자가 적대관계에 있는 세계적 강대국들의 휘하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그 나라가 어떻게 파멸의 길에 이르는지 보고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이 특정 이데올로기에 매몰된 정치인에게 경종을 울렸으면 한다.”
정정훈 서강대 동아연구소 연구교수
Copyright © 한겨레2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