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맛에 딱 맞춘 美대법원, 트럼프에 약일까 독일까
미국에서 공화당 대통령들은 민주당 대통령들에 비해 연방대법관 임명 기회를 더 많이 누렸다. 빌 클린턴, 버락 오바마, 조 바이든이 임명한 대법관은 1, 2명에 그쳤지만 로널드 레이건은 3명, 도널드 트럼프와 리처드 닉슨은 불과 4년 임기 동안 각각 3명, 4명을 대법관에 앉혔다.
공화당 대통령들 중에서도 트럼프는 ‘타율’이 높기로 유명하다. 다른 대통령들이 보수적 가치를 실현해줄 것으로 기대하며 임명했던 대법관들은 막상 판결할 때 중도에 서거나 진보 대법관들과 의기투합하는 경우가 잦았는데 트럼프가 임명한 3인은 달랐다. 지명 당시부터 선명한 보수 성향으로 논란이 됐던 닐 고서치, 브렛 캐버노,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은 기대에 부응하며 대법관 9명으로 이뤄진 연방대법원을 확실하게 보수로 기울게 했다.
‘트럼프 대법관들’ 합류 이후 연방대법원에서 벌어진 하이라이트 사건은 지난해 6월 낙태권 폐지 판결이다. 1973년 낙태권을 최초로 보장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나왔을 때 이에 찬성한 7명 중 3명은 다름 아닌 공화당의 닉슨이 임명한 대법관들이었다. 1992년 대법원이 낙태권 존폐를 다시 다뤘을 때도 레이건이 임명한 대법관 3명 중 2명이 ‘존치’ 쪽에 서면서 낙태권은 살아남았다. 하지만 지난해 재판에서 ‘트럼프 대법관들’은 단 한 명도 이탈 없이 낙태권 폐지를 지지해 보수주의자들의 숙원을 이뤄줬다.
이 판결이 나온 날 트럼프는 “다른 대통령들이 실패했던 일을 내가 해냈다. 내가 임명한 3명의 대법관들과 함께”라며 자신의 업적을 부각했다. 이것은 근거 있는 자랑이었다. 트럼프는 2016년 대선에 나서며 “당선되면 태아의 생명을 지킬 것이다. 그런(낙태 금지) 판결을 할 2, 3명을 연방대법관에 앉히면 되는데 그러려면 나를 대통령으로 뽑아야 한다”며 보수 표심을 저격했다. 미국에서 대선 후보가 특정 이슈에 대해 특정 결론으로 판결할 대법관을 임명하겠다고 공언한 건 트럼프가 처음이었다.
사실상 ‘사법부를 정치에 이용하겠다’는 이 대국민 선언을 트럼프는 성공적으로 이행했다. 보수로 기운 연방대법원은 총기 규제, 소수 인종 우대, 학자금 채무 면제 등 바이든의 주요 정책을 번번이 무력화시켰다. 보수진영에선 “다른 건 몰라도, 우리 편 대법관 3명을 ‘알박기’ 한 게 트럼프의 최대 업적”이라는 평가가 많다.
하지만 대선을 1년 앞둔 지금, 트럼프가 ‘사법적 치적’으로 홍보해온 낙태권 폐지는 그의 최대 아킬레스건이 되고 있다. 주 정부가 낙태 허용 여부를 자체 결정할 수 있게 되면서 여성 등 낙태 찬성 유권자들을 꽁꽁 결집시켰기 때문이다. 특히 민주당과 공화당이 팽팽히 맞붙는 경합주나 공화당 지지세가 강한 지역에서 여론이 출렁이고 있다. 전통적인 민주당 성향 주에서는 주 정부가 낙태권을 계속 보호할 것이기 때문에 위기감이 덜하지만 ‘공화당 주’에서는 낙태가 금지될 상황에 놓였기 때문이다.
최근 각 주에서 낙태 관련 법안 주민투표가 이어지는데 대표적인 경합주인 미시간은 물론이고 공화당 표밭인 오하이오, 몬태나, 캔자스, 켄터키 등에서도 낙태 허용 법안은 속속 통과되고, 낙태 제한 법안은 제동이 걸렸다. 낙태 금지를 표방하며 출마한 주지사, 주 대법관들도 줄줄이 고배를 마시고 있다.
워싱턴포스트(WP)와 NBC방송의 9월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64%가 연방대법원의 낙태권 폐지 판결에 반대했다. 찬성은 30%에 그쳤다. 대법관들은 6 대 3으로 낙태권 폐지를 결정했는데 여론은 그와 정반대인 것이다. 트럼프는 대법원의 균형추를 인위적으로 옮겨 민의와 다른 판결을 이끌어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대가를 내년 대선에서 치르게 됐다.
민주당은 대선 전략으로 트럼프가 ‘낙태 반대’ 대법관 3명을 임명한 주역이란 점을 집중 부각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상원 다수당을 지킬 수 있었던 최대 요인은 낙태권 폐지에 반발한 중도층 흡수였는데 내년 대선에서도 비슷한 효과가 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다. 공개석상에서 좀처럼 트럼프 얘기를 꺼내지 않던 바이든도 14일(현지 시간) 정치자금 모금 행사에선 “미국에서 낙태가 금지된 유일한 이유는 바로 트럼프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안 된다”고 했다.
물론 트럼프가 역풍에 쉽사리 흔들릴 인물은 아니다. 그는 당내 경쟁 대선주자인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가 얼마 전 ‘임신 6주 후 낙태 금지’ 법안에 서명하자 “끔찍한 결정”이라고 비판하며 ‘낙태 금지 주역’ 꼬리표를 떼어내려 하고 있다. 낙태 표심이 곧바로 바이든에게 향할지도 지켜볼 일이다. 하지만 트럼프의 입맛에 딱 맞았던 낙태권 폐지 판결이 공화당을 늪에 빠뜨리고, 민주당엔 비벼볼 희망이 된 것은 분명하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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