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는 아르헨티나를 구할 수 있을까

이윤정 기자 2023. 11. 21.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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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은행을 폐쇄하는 것은 도덕적 책무”라고 공언했던 ‘무정부 자본주의자’는 무너져가는 아르헨티나 경제를 살릴 수 있을까.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 당선자가 자국 통화인 페소를 버리고 달러를 공식화폐로 채택하겠다는 공약을 진짜로 실행에 옮길지 세계의 눈이 쏠리고 있다.

밀레이 당선 이튿날인 20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CNN 등 해외 주요 매체들은 일제히 아르헨티나의 ‘달러라이제이션(Dollarization·달러화)’ 가능성과 성공 여부 등을 분석했다. 달러화란 자국 화폐를 폐지하고 미국 달러를 공식 화폐로 사용하거나 자국 화폐와 달러를 함께 공식 화폐로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밀레이 당선자는 유세 기간 동안 무능한 중앙은행과 가치가 급락한 페소를 비판하며 달러를 공식 화폐로 채택하겠다고 공언했다.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 당선자가 19일(현지시간) 당선 소감을 밝히고 있다. AFP연합뉴스
달러로 인플레이션 잡으려는 아르헨티나

달러를 공식 화폐로 채택한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현재 파나마·에콰도르·엘살바도르 등이 달러를 공식 화폐로 사용 중이고, 소말리아·짐바브웨 등은 자국 화폐와 달러를 병용하고 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처럼 경제 규모가 큰 국가가 달러화를 선언한 경우는 전무하다. 그간 달러화는 극심한 경제 불안을 겪는 개발도상국이 채택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여겨졌다. 아르헨티나는 지난해 명목 국내총생산(GDP) 기준으로 중·남미에서 브라질, 멕시코에 이어 3번째로 경제 규모가 크다. 세계 경제 순위로도 22위에 올라있다.

그럼에도 밀레이 당선자가 달러화를 주장하는 이유는 치솟는 인플레이션 때문이다. 그동안 아르헨티나 정부는 ‘퍼주기’식의 방만한 재정지출을 해왔고, 중앙은행은 이에 발맞춰 돈을 찍어냈다. 재정 적자를 메우기 위해 시장에 쏟아진 페소는 가치가 폭락하며 물가상승을 부추겼다. 최근 페소는 1년 전보다 95% 이상 가치가 급락했고, 올해 아르헨티나 물가상승률은 135%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설상가상 전문가들은 올해 말에는 물가상승률이 200%까지 치솟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현재 아르헨티나의 기준금리도 133%에 달한다.

아르헨티나가 달러화를 공식 화폐로 채택하면, 중앙은행의 역할이 유명무실해진다. 화폐 발행으로 통화량을 조절하는 중앙은행의 기능을 잃는 것이다. 대신 중앙은행이 돈을 더이상 찍어내지 못하기 때문에 화폐 가치가 급락하는 사태 또한 막을 수 있다는 게 밀레이 당선자의 주장이다. 기축통화인 달러를 채택함으로써 통화가치 하락과 환율 변동 위험을 제거하고 대외 신인도를 높여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유세 기간 동안 “페소는 배설물 가치조차 없다”며 중앙은행을 부패한 기관으로 묘사했다.

달러 채택할 준비금조차 없어

일부 전문가들도 국가의 재정적 신뢰도가 산산조각 난 경우 자국 통화 대신 달러를 채택하는 것이 합리적일 수 있다는데 동의한다. 다만 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정교한 준비와 은행 시스템을 뒷받침할 대규모 초기 자금이 필요하다. 문제는 아르헨티나가 둘 다 부족하다는 점이다.

페소를 달러로 전면교체하기 위해서는 달러 대출을 받아야하는데 아르헨티나 정부는 대출을 위한 최소한의 외환보유액도 없는 상황이다. 현재 아르헨티나의 외환보유고는 100억달러 이상 적자 상태다. WSJ는 “달러화 전환을 위해 300억달러 이상의 준비금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

현재 아르헨티나는 국제통화기금(IMF)에 440억달러(약 56조원)의 빚을 지고 있는 만큼 여력이 없다. 아르헨티나는 중국에도 수십억달러의 위안화 빚을 지고 있다. 밀레이 당선자는 국영 기업을 민영화시켜 달러화 정책의 초기 자금을 마련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아르헨티나 통화의 굴곡진 역사는 수십년 간 이어져 왔다. 1980년대에도 600%대에 달하는 인플레이션으로 경제가 휘청하면서 페소 가치가 급락했고, 1990년 전후로는 연간 물가상승률 3000%가 넘는 ‘초인플레이션’을 경험하기도 했다. 결국 1992년 금융당국은 환율 불확실성을 없애기 위해 ‘1달러=1페소’로 고정하는 페그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이 또한 외환 시장 변동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주범으로 지목돼 2002년 폐기됐다.

밀레이 당선자가 달러화 계획을 밀어붙이기에 충분한 의석수를 확보하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아르헨티나 의회는 어떤 정당도 과반을 차지하지 못했고, 밀레이가 이끄는 자유전진당은 하원 257석 중 37석, 상원 72석 중 7석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해당 정책이 대법원에서 막힐 가능성도 있다. 지난 9월 호라시오 로사티 대법원장은 페소를 외화로 대체하는 것은 위헌이며 국가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달러화, 만병통치약 아냐”

WSJ는 전문가들이 달러화로 인플레이션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는 있겠지만, 고질적 문제인 공공 재정 악화를 개선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고 설명했다. 2000년 달러화를 채택한 에콰도르는 물가상승의 고삐를 잡는데는 성공했지만, 2020년 재정난이 악화돼 결국 채무불이행(디폴트)를 선언했다. 엘살바도르 또한 미국 정부가 2008년 금융위기, 2020년 코로나19 대유행 등 위기 때마다 달러를 대거 풀자 급격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렸다. 1990년대 에콰도르 중앙은행 총재를 지낸 아우구스토 드 라토레는 “달러화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라며 “구조개혁을 대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자국 통화를 포기하면 경제 주권 또한 흔들리게 된다. WSJ는 “아르헨티나에 자국 통화가 없다면 외부 충격을 완화할 통화 수단이 부족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제금융연구소의 라틴아메리카 대표 마틴 카스텔라노는 “아르헨티나는 수출 가격 급락, 농산물 가격 변동성, 유가 상승, 전쟁이 수출 수요에 미치는 영향, 예금 회수로 이어지는 정치적 불안정 등의 충격을 흡수할 유연성이 없다”고 설명했다.

섣불리 달러화를 추진했다가 최악의 경우를 맞닥뜨릴 수도 있다. 달러화 전환율이 페소화에 매우 불리하게 작용해 급격한 페소화 약세를 가져오면 1990년대 겪었던 3000%이상의 초인플레이션을 다시 겪을 수도 있다. 현재 40%수준인 빈곤율이 더 올라가며 아르헨티나 경제가 파탄 수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골드만삭스는 지난 19일 발행한 보고서에서 “경제학에서 모든 것이 그렇듯 공짜 점심은 없다”며 “달러화를 채택하고 유지하면서 혜택까지 누리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윤정 기자 y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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