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완, 불가해하고 불투명한 노래·詩를 만났을 때
신간 시집 '빛과 이름' 동시 출간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인디음악계 1세대인 뮤지션 겸 시인 성기완이 데뷔 30주년을 맞아 새로운 솔로 프로젝트 밴드 '쿰바와 영실들'(Kumba and the Soul Chambers)을 시작했다.
성기완은 국내 최고 권위의 대중음악상 '한국대중음악상' 3관왕에 빛나는 밴드 '3호선 버터플라이'의 전(前) 리더다. 2005년부터 4년 간 EBS 라디오 '세계음악기행'을 진행해 음악 마니아들 사이에서 지지도 얻고 있다. '김현문학상'을 수상한 시인이기도 하다.
2018년 서아프리카 뮤지션 아미두 디아바테(Amidou Diabate), 드러머 김하늘 등과 함께 밴드 '앗싸(AASSA)'를 결성해 리더로 활약해왔다. 현재 이 팀의 음반 제목이었던 '트레봉봉(Tresbonbon)'을 밴드 이름으로 내세워 활약 중이다.
이 팀과 별개로 시작된 쿰바와 영실들에서 '쿰바'는 성기완의 얼터 에고(Alter ego)다. 즉 이종 자아로서, 다양한 장르가 융합된 솔풀한 음악을 구사하는 뮤지션이자 시인임을 뜻한다. 그리고 '영실들'은 제주도 한라산 영실 등산로에서 영감을 얻어 '영혼의 거처'라는 의미로 붙였다. 영실의 '영'은 흑인음악의 한 장르인 '솔(Soul)'을 암시하기도 한다.
쿰바와 영실들은 결국 성기완이 그간 쌓은 음악적 흔적들을 집대성하는 성소인 셈이다. 이를 기반으로 탄생하는 음악들은 이제 '네오 솔(Neo Soul)'로 묶인다.
최근 발매된 '네오 솔' 첫 번째 결과물인 싱글 '네오 솔 곡집 Vol. 1'엔 두 곡이 실렸다.
특히 이번 싱글 타이틀곡 1번 트랙인 '피버 송(Fever Song)'은 전설의 블루스 듀오 '유앤미블루' 출신 음악감독인 고(故) 방준석(1970~2022)을 기리는 추모곡이다. 성기완은 방준석이 세상을 떠난 그 시기에 공교롭게도 코로나에 걸리는 바람에 격리 중이었다. 감염의 아픔과 친구를 잃은 슬픔을 동시에 느낀 그가 방준석에게 음악으로 작별인사를 하고, 음악으로 그 영혼을 위로하고자 만든 노래가 '피버 송'이다. 열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방준석의 불꽃같은 삶이 지닌 열기(fever)를 상상했고 공감했다. 원곡의 러닝타임은 무려 7분25초인데 라디오 버전은 5분51초로 줄였다.
영화음악가 달파란, 서울전자음악단의 신윤철, 삐삐롱스타킹의 권병준(고구마), 영국 런던 애비 로드 스튜디오(Abbey Road Studios)의 마일스 쇼웰(Miles Showell) 등이 연주 및 편곡 그리고 마스터링 등에 참여했다.
싱글의 두번째 트랙인 '몽유세한도'는 성기완의 신간 시집 '빛과 이름' 제1부의 제목이자 마지막 시다. 성기완 특유의 몽롱한 분위기가 전편에 흐르는 이 시는 마치 꿈 속의 이야기처럼 맥락없이 펼쳐진다. 우발적인 시적 이미지들을 신비로운 상징으로 기록하는 일종의 즉흥시 형식이다. 목소리는 세 트랙이 더빙돼 있는데 모두 성기완의 것이다.
이처럼 성기완은 노래나 시가 가진 불가해한 아름다움과 불투명한 내용을 해석과 해제가 가능한 물성의 무엇으로 만들어낸다. 다음은 최근 을지로에서 만난 성기완과 나눈 일문일답.
-싱글 발매와 함께 여섯 번째 시집 '빛과 이름'(문학과지성사)도 펴내셨어요.
"아버지가 2013년에 돌아가셔서 올해가 10주기가 됐어요. 이번 시집에 실린 시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당시에 썼던 시들이에요. 그 때 저도 모르게 막 썼었던 시들인데 당시에는 못 보겠더라고요. 너무 슬퍼 쳐다보기가 싫고…. 근데 10년 가까이 되니까 죽음, 헤어짐에 관해 '감정의 흔적이 남겨져 있구나'라는 걸 느끼게 됐어요."
-'쿰바와 영실들'이라는 새 프로젝트 싱글과 시집은 어떻게 맞춰 나오게 된 겁니까?
"작년에 (음악감독) 방준석이라는 친구가 세상을 떠났잖아요. 저는 그때 (코로나19로 인해) 격리 중이어서 빈소에도 못 갔어요. 노래('피버 송') 하나 만드는 것밖에 추모할 수 있는 게 없었죠. 마침 시집도 그런 의미라 둘이 성격이 맞는 것 같아서 발매했습니다."
-'몽유세한도'는 이번 싱글의 커플링 곡인데요. '빛과 이름' 제1부의 제목이자 마지막 시이기도 합니다. 시를 실험적으로 낭독한 일종의 '슬램(slam)'(힙합적인 시낭송 장르)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그림 '몽유도원도' '세한도'를 합쳐 지은 제목이에요. '몽유도원도'가 꿈속에서 그린 그림이잖아요. 그런 느낌으로 꿈을 이야기한 거예요."
-노래와 낭송의 다른 부분은 무엇인가요? 시는 곧 노래이기도 한데요.
"흥얼거림이냐 중얼거림이냐 차이인 거 같아요. 흥얼거림으로 나오면 노래로 가는 거고, 중얼거림으로 나오면 시로 가는 거죠. 그 정도 차이밖에 없는 것 같아요. 둘이 동전의 앞뒷면처럼 존재하죠. 기본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차이를 두고 음원을 발매하지는 않아요. 2017년에 발매한 평론집 '노래는 허공에 거는 덧없는 주문'(성기완의 노랫말 얄라셩)도 시는 아주 심각하게 진지한 태도로 평론을 하는데 노랫말은 그러기보다는 그냥 즐기고 소비하고 경우가 많은 것 같아 시와 같은 관점으로 평론을 해본 거였어요. 시와 노래는 늘 같이 간다고 생각해 왔던 것 같아요."
-올해가 데뷔 30주년이라고 하셨는데 정확히 어디서 시작이 되는 겁니까?
"1993년에 토마토라는 밴드의 음반이 나왔어요. 권병준(고구마)이 리더였고요. 고구마 피크밴드 고구마가 리더였고, 저도 같이 참여했죠. 제가 중간에 군 복무를 해야 해서 음반이 나올 때까지 끝까지 함께 못 했는데 판이 나오고 보니까 제가 참여한 노래가 포함돼 있더라고요. 음반으로 등록된 첫 노래가 된 거죠. 토마토는 초기 얼터너티브 밴드 같은 느낌이었어요. 새로운 방식의 스타일을 표방한 밴드였죠. 당시 메이저였던 오렌지 레이블에서 발매됐는데, 성향 자체는 인디적이었죠."
-또 내년은 시인으로 등단하신 지 30주년이 됩니다(성기완은 1994년 '세계의 문학' 가을호로 등단했다).
"내년엔 또 '뭘 해야 되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하하."
-이렇게 경력이 오래됐음에도 안주하지 않고, 계속 새로운 걸 하신다는 게 대단합니다.
"계속 솔로 프로젝트를 해왔었는데요. 공연 같은 걸 하게 되면 '원맨 밴드 형식'으로 프로젝트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예전부터 했어요. '네오 솔 곡집'이라는 싱글 타이틀은 흑인 음악적인 데서 영향을 받은 솔풀한 음악들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요. 근데 우리나라에서 흑인 음악이라고 하면 특유의 R&B적 창법을 떠올리시는 분들이 많은데 꼭 그런 창법만 있는 건 아닌 것 같고요. 영혼을 담았다고 할까, 그 안에 리듬이 녹아들어 있다고 할까. 그러면 솔이라고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무엇보다 이제 저도 나이를 먹었으니까 깊은 맛을 내는 음악을 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영혼을 울린다'가 키워드가 됐습니다. 영실들은 한라산 '영실 코스'에서 따왔어요. 그 코스를 따라 가면 경사 끝에 평지가 펼쳐져요. 그 모습은 사계절마다 다른데 봄이 되면 자주색 꽃들이 피어요. 그게 엄청 사이키델릭해요. 겨울엔 '겨울 왕국'처럼 눈꽃이 피죠. 또 가을은 울긋불긋하죠. 그런데 영실의 한자가 영혼할 때 영(靈) 자에 방 실(室)자로 돼 있더라고요. 그걸 보니 '영혼의 거처'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근데 전 '영실들'이라고 복수로 지었으니까 그 방에 초대할 수 있는 뮤지션들이 여러 분들이죠."
-쿰바는 어디서 따오신 거예요.
"아프리카 추장 이름이래요. 누군가가 저한테 한번 쿰바라는 말을 했어요. '너는 쿰바야. 쿰바답게 행동해'라고요. 이후 행동에 대해 계속 고민해요."
-'피버 송'은 무려 7분25분초짜리 곡이에요. 듣다 보니까 그 길이가 수긍이 갔는데요. 왜 근데 7분25초짜리 곡이어야 했습니까?
"격리 중에 만든 곡인데 저도 모르게 시작 부분이 나왔어요. 곡이 변하는 부분이 있는데 한 번의 변화가 또 다른 변화를 끌어냈어요. 그 과정에서 방준석 음악감독이 많이 떠올랐어요. 변화무쌍한, 참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거든요. 어렸을 때 칠레로 가족이 이민을 가 그곳에서 영문도 모르고 한국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곳에서 살다가 뉴욕에서 학교 다니고 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고. 지구 끝에서 끝으로의 여정을 한 친구인데 그 여정을 떠올리다 보니 리듬이 변하고 변하고 또 변했죠. 방준석 감독이 갔던 길을 순례하는 느낌으로 작업했고 '그가 어딘가로 갔었는데'라는 생각이 중간에 끼어들면서 길어진 것 같아요. 다시 돌아왔다는 의미로 처음을 반복하고, 신윤철 씨의 멋진 기타 솔로가 후주로 나오고 그러면서 문이 닫히는 느낌으로 끝나죠."
-곡이 짧아지는 데다가 그 곡마저 여러 작곡가 동시에 작업하는 시대에 '피버 송' 같은 노래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젊은 친구들은 갑작스러운 변화들을 즐길 거라고 봐요. 그리고 한 사람이 일기를 쓴다고 했을 때 얘기는 다양하지만 쭉 한 글씨체로 쓰잖아요. 갑작스럽게 대화가 나오거나 갑작스럽게 묘사 또는 인용이 나올 수도 있죠. 이처럼 다양한 글의 스타일들이 들어갈 수 있지만 글씨체는 하나잖아요. 그래서 뮤지션의 '의식의 흐름'을 쫓아갈 때 급격한 변화도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변하지'라고 스스로 질문하기 시작하면 못 변하죠.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피버 송'을 만들 때 코로나에 걸려 당연히 열도 나고 해서 피버(fever·열) 송인데 열이 나니까 헛소리도 하는 거죠. 그리고 준석 감독도 열정적이고 열기가 가득 찬 삶을 살았다고 생각됐어요."
-준석 감독님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된 거예요.
"홍대 쪽에서 음악을 시작하면서 후배로 자연스럽게 만났었고요. 90년대 중반쯤에 홍대 주차장 사거리 근처에 블루데빌이라는 클럽이 있었는데, 준석 감독이 이승열 씨와 '유앤미블루'로 공연했죠. 자우림 전신(미운오리)도 공연하던 곳이죠. 그리고 준석이가 '복숭아'라는 영화음악 창작 프로젝트 집단의 일원이었는데 일종의 느슨한 동인 같은 이곳의 공동 스튜디오 공간이 김포 쪽에 있었어요. 준석 감독은 그곳에서 살았어요. 3호선 버터플라이 3집 '타임 테이블' 작업 때 한 달 동안 그 공간 중 한곳을 렌트했어요. 나중에 그곳 멤버들이 나와 방이 비면서 제가 입주를 했고 2년 가까이 단둘이 그곳에 있으면서 많이 친해졌죠."
-'몽유세한도'는 구절이 반복돼 겹치는 부분이 있었어요. 어떤 의도가 있었나요?
"돌 바위에 걸려 넘어지는 장면이 하나 있는데 그런 식으로 사운드를 표현하면 바위가 불쑥 솟아있는 느낌이 더 날 것 같았어요. 어떤 부분은 리버브(Reverb)라고 하죠. 잔향을 줘서 소리가 확 퍼지게 했어요. '곁눈질로 쳐다보니'라는 말이 있는데 그때는 팬(PAN·PANORAMA의 약자. 소리를 다양한 공간에 배치하는 것)을 통해 소리가 곁눈질 하듯 왼쪽 오른쪽 왔다갔다 해요."
-이번 곡들과 '죽음과 부재, 그리고 그 너머의 존재'를 중심으로 잡은 시집이 잘 어울립니다. 주로 아버님에 대한 그리움을 담았는데, 시집을 내고는 어떤 감정이 드셨나요?
"감정보다는 생각 쪽에 가까운 것 같아요. 시로 생각하는 거 그러니까, 더 근사한 말로 하면 '사유'라고 할까요. 사상까지는 아니고요. 어떤 생각들을 시적인 언어로 정리한 느낌이에요. 죽음을 앞에 놓은 혹은 죽음을 겪은 가까운 사람의 체험에 관한 시적인 명상이라고 해야 될 거 같아요. 저는 철학자처럼 개념적으로 서술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시적인 이미지들로 그런 것들을 명상해보자는 화두가 있었죠."
-작업에 실험적인 면모도 강하고 평론가시기도 하셔서 앞서가는 냉철한 지식인 같은 느낌이 강했거든요. 그런데 막상 뵈니까 참 따듯한 느낌이에요.
"나이가 들다 보니 힘도 빠지고 송곳 같은 같은 면도 많이 줄었어요. 특히 어릴 때는 인디의 시작이니까 기존 메이저 시스템을 당연히 비판하고 나와야 되잖아요. 인디는 비주류적인 어떤 가능성을 제시하려는 마음인데 그러다 보면 주류는 비판 대상이 될 수밖에 없죠. 그런데 이제 30년 활동하다 보니까 무뎌진 건 확실한 것 같고 그 다음엔 나름 이제 '정리를 좀 해야겠구나'라는 생각도 드는 게 있어요. 제가 갖고 있는 걸 하나씩 막 펼치기만 했는데 이제는 하나씩 꾸려서 꽂아넣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죠. 또 장르적으로도 유연해지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아싸(AASSA)' '트레봉봉'을 거치면서 아프리카 음악을 우리만의 정체성으로 삼았는데, 그 넓은 아프리카를 이렇게 좁은 한국에서 제가 무슨 권리로 대변하듯 했는지에 대해 반성했거든요. 우리끼리만 놀지 말고 이질적인 것들과 잘 어우러지자는 마음이었는데, 생각이 너무 앞서 관념적으로 됐다고 할까요. 의미 있는 걸 하면서도 현실에서 붕 떠 있는 느낌이었어요. 이제 장르적인 선명성보다는 자연스러운 느낌을 추구하려고 해요. 네오 솔이 그런 것들을 아우르는 거죠."
☞공감언론 뉴시스 realpaper7@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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