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관서 폰 게임하면 ‘강냉이’ 한봉지… “놀이로 가장된 노동 다뤘죠”

유승목 기자 2023. 11. 21.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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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각예술 컬렉티브 그룹 ‘랩삐’
국립현대미술관 ‘강냉이…’ 전
직접 경작지 구해 옥수수 재배
관객 소통하며 실험데이터 수집
시각예술 컬렉티브 그룹 랩삐. 왼쪽부터 최혜련, 강민정, 안가영, 제닌기.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선 ‘강냉이 털어 국현감’이라는 기이한 제목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이곳의 풍경은 여느 미술관과 다르다. 관람객들은 작품을 감상하긴커녕 스마트폰에 고개를 숙이고 앉아 게임에 열중한다. 짧게는 10분, 길게는 30분 넘게 걸리는 게임 미션을 모두 완수한 관람객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랩삐 팩토리’로 걸음을 옮겨 강냉이 한 봉지를 받아 든다. 미술관이 예술을 즐기는 곳이 아니라 마치 일하고 보상을 받는 일터로 변한 듯하다.

4명의 젊은 여성 현대미술 작가들이 뭉친 시각예술 컬렉티브 그룹 ‘랩삐’(lab B, 강민정·안가영·최혜련·제닌기)는 한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장소 중 한 곳인 국립현대미술관을 ‘놀이노동’(Playbor) 현장으로 만들어냈다. 지난 8일 미술관에서 만난 4인방은 예술을 쫓아내고 노동을 심은 전시장에서 관람객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전시 개·폐막을 제외하면 작가가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드물다는 점에서도 관람객 곁에 있는 모습도 생경하다. 강민정 작가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작가들이 돌아가면서 게임을 완수한 관람객들에게 강냉이를 주며 감상을 묻는다”면서 “우리는 지금 또 다른 실험을 위해 관람객과 소통하며 데이터를 모으고 있다”고 말했다.

랩삐는 뭉쳤다가 흩어지길 반복하는 예술 그룹이다. 공식적으론 “비(非)주류의 혹은 비(B)급의 길을 걸으며 소외된 존재를 챙기겠다”는 뜻으로, 비공식적으로 “B라는 이름의 대학원 연구실에서 만난 동기들이 모여 시작한 그룹”인 이름처럼 독특한 실험을 하고 있다. 강민정 작가는 “각자 활동하다 같이 해볼 만한 주제가 생기면 뭉친다”면서 “랩삐넷이라고 2019년 각자가 생각하는 여성주의를 담은 선언문을 만드는 작업을 함께했다가 이번에 다시 모이게 됐다”고 말했다.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이 현대자동차의 후원을 받아 신진 예술인을 발굴하는 ‘프로젝트 해시태그’에 선정돼 탄생한 결과물이다. 51대 1의 경쟁률을 뚫었는데, 한 명의 비뚤어진 생각과 그에 대한 동조가 이들을 4년 만에 뭉치게 했다. 최혜련 작가는 “올해 초 어느 날 점심 무렵에 서울시립미술관 앞을 지나는데 직장인들이 대거 모여서 스마트폰만 바라보더라”며 “한 금융 플랫폼이 미술관 근처에서 앱을 켜면 돈을 주는 행사를 기획한 건데 정작 미술관엔 사람이 없고 사람들은 스마트폰만 바라보는데 이 풍경이 묘했다”고 말했다. 제닌기 작가는 “자동화가 되면서 쉬는 시간에도 일종의 비물질 노동을 하고 있는 것 아니냐”며 “예술을 즐기고 쉬러 오는 미술관에서도 놀이로 가장되는 노동을 하는 현상에 대해 다뤄보기로 했다”고 말했다.

옥수수를 키우며 수집한 움직임, 자연 풍경과 사운드를 재구성한 영상작품인 ‘강냉이 느리게 먹기’.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그래서 랩삐는 직접 노동을 했다. 3000만 원의 창작지원금으로 강화도를 비롯해 곳곳에 경작지를 구해 옥수수를 심은 것. 최혜련 작가는 “작물을 키우고 수확해 먹을 수 있는 제품으로 만드는 과정이 어떻게 보면 작품 만드는 과정과 비슷하고 ‘강냉이를 턴다’는 것도 함의하는 게 많지 않으냐”며 “미술로서 사회 문제를 얘기하는 것에 대한 자기반성 차원도 있었다”고 했다. 강민정 작가는 “무엇보다 행위와 작품 자체가 갖는 무게감이 남다른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이런 실험을 한다는 게 중요했다”면서 “원래는 미술관 광장에 옥수수를 심으려고도 생각했을 정도”라고 말했다.

옥수수 농사 과정을 스마트폰에 담은 게임도 랩삐가 직접 개발했다. 시작은 회화였지만 설치, 게임아트까지 전공을 끊임없이 확장해온 결과다. 제닌기 작가는 “고정적인 형태를 내놓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관계나 시스템 같은 무형의 것을 주제로 하는 것도 미술”이라며 “우리 작업을 미술이 아니라고 생각할 때 오히려 더 재밌다”고 말했다. 강민정 작가는 “너무 어렵고 철학적인 얘기보다 생활 속에 맞닿으면서 사람들이 소통할 수 있는 관계 미술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전시 관람보단 전시 탐험이 맞다”면서 “강냉이를 받아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게임 난이도를 어렵게 조절해 전시가 시시각각 바뀌는 점도 재밌는 요소”라고 했다.

유승목 기자 mok@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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