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기후위기, 늙어가는 세계…‘어린이 렌즈 투자’ 필요해

신기섭 2023. 11. 21.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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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세프 등 잇따라 ‘어린이 렌즈 투자’ 필요성 촉구
“세계 아동 상황 개선에 정부는 물론 민간의 관심 시급

코로나19 대유행 충격에 이은 경제위기에 기후위기까지 깊어지며 세계적으로 빈곤 아동이 늘고 있다. 이에 더해 세계 주요국에서 진행 중인 고령화 흐름 속에서 미래를 떠받칠 젊은 세대의 중요성도 커지면서 ‘어린이를 고려한 투자’ 개념이 새롭게 제기되고 있다. 인권·환경 등을 고려한 ‘사회 책임 투자’(SRI)나 남녀 성 차이 문제 등을 고려한 ‘성인지 투자 개념’에 이어 아동의 복지와 미래를 고려하는 투자도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유니세프(유엔아동기금)와 미국 싱크탱크 ‘크라이티리언 연구소’는 최근 잇따라 ‘어린이 렌즈(시각) 투자’ 개념의 도입을 촉구하는 보고서를 내놨다. 이들의 보고서는 환경, 성평등만큼이나 아동 문제도 민간 업계의 투자 결정에서 중요하게 인식해야 할 때가 됐다며 이 개념을 새롭게 정착시키는 작업에 각국 정부와 민간 투자업계의 동참을 촉구했다.

유니세프는 ‘어린이 렌즈 투자 프레임워크’ 보고서에서 ‘어린이 렌즈 투자’를 “어린이들에게 끼치는 해악은 줄이고 긍정적인 결과는 극대화하기 위해 어린이 관련 요소들을 적극 고려하는 투자 접근법”으로 규정했다. 예컨대, 환경을 고려한 투자는 재생에너지 사업 확대만을 생각한다. 하지만 어린이를 고려한 재생에너지 사업 투자라면, 집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을 고려해 야간에도 안정적으로 전기를 공급하는 방안까지 투자 계획에 포함시켜야 한다. 모든 투자 결정에 어린이들의 필요와 복지를 고려하자는 관점이다.

유니세프 미국 지부의 투자 조직인 ‘어린이 영향 펀드’의 크리스티나 셔피로 대표는 최근 개발 전문 매체 ‘데벡스’ 인터뷰에서 “모든 투자 결정이 어린이에게도 영향을 끼치지만, 오늘날 투자 결정에 있어서 어린이는 거의 고려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게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 어린이 고려 투자 제기 배경

어린이의 복지를 증진하고 그들의 미래를 위해 투자한다는 목표 자체는 딱히 새로운 것이 아니다. 유엔이 2016년부터 2030년까지 추진하고 있는 ‘지속가능 개발 목표’(SDGs)에도 빈곤 퇴치, 양질의 교육 등처럼 어린이의 복지와 직결되는 목표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럼에도 아동인권단체들과 개발도상국 개발 전문가들이 어린이 문제를 새로 부각시키는 것은, 지속가능 개발 목표 추진이나 사회 책임 투자만으로는 세계적으로 후퇴하고 있는 어린이들의 인권 상황을 개선하기 어렵다는 절박한 인식 때문이다.

최근 몇년 사이 코로나19 대유행 충격, 기후위기 가속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쟁 등으로 세계 어린이를 둘러싼 상황은 급격하게 나빠졌다. 저소득 국가의 상황은 특히 심각하다. 세계은행·유네스코 등 6개 국제기구가 지난해 6월 내놓은 전세계 ‘학습 빈곤’ 현황 보고서를 보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10살 어린이 가운데 간단한 문장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학습 빈곤층은 89%로 추산됐다. 2015년 87%에서 2019년 86%로 소폭 줄었던 학습 빈곤층이 코로나19 유행에 따른 경제위기와 학교 폐쇄 등으로 다시 늘어난 것이다.

아이들의 굶주림을 완화하면서 교육 기회를 확대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는 학교 급식도 저소득 국가에서는 줄어드는 추세다. 세계식량계획(WFP)의 세계 163개국 분석 결과를 보면, 지난해 무상 급식 또는 급식비 보조를 받은 초등학생 규모는 2020년보다 7% 늘었지만, 저소득 국가는 4% 감소했다. 저소득 국가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련 지원금이 2020년 2억6700만달러(약 3460억원)에서 지난해 2억1400만달러(약 2775억원)로 줄어든 것이 주요 요인으로 꼽혔다.

게다가 ‘지속가능 개발 목표’를 위한 투자 자금도 만성적인 부족 상태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유엔에 따르면 유엔이 공식적으로 지속가능 개발 목표를 추진하기 2년 전인 2014년 개도국들의 관련 사업 자금 부족분은 연간 2조5천억~3조달러(약 3240조~3890조원) 수준이었으나 최근에는 4조2천억달러(약 5445조원)까지 늘었다. 유니세프는 “이런 상황에서 공식적인 개발 원조나 자선 활동만으로는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강조했다. 민간 투자자들이 어린이 문제에 관심을 적극 기울이지 않으면 현재의 추세를 바꾸는 데 역부족이라는 지적이다.

크라이티리언 연구소가 내놓은 ‘어린이의 미래에 대한 투자: 영역 구축 보고서’는 아동 문제가 단지 개도국 상황 개선만이 아니라 고령화 대응 측면에서도 중요하게 인식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경제활동 가능 인구 대비 고령층 비중은 느는 반면 미성년자의 비중은 줄고 있는 현시점이 성장과 안정적인 경제 구축의 중요한 기회”라며 이 기회는 시간을 다투는 문제라고 짚었다. 고령화가 더 심화하기 전에 젊은층에 대한 투자를 확대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학교가 폐쇄되자 항의 차원에서 학교 앞 거리에서 공부를 하는 이탈리아 토리노의 학생들. 토리노/EPA 연합뉴스

■ 어린이 관련 투자는 막대한 기회

어린이에 대한 투자는 단지 복지 확대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경제적 기회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크라이티리언의 보고서는 “지금은 인구 구성 측면에서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어린이들에 대한 투자가 중요한 시기이며, 이런 인구 구성의 변화 추세는 시장의 기회이기도 하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현재 전세계 인구의 약 30%가 어린이이며, 2015년부터 2030년까지 새로 태어나는 인구가 세계적으로 21억명에 이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기간에 아프리카의 출생 증가율은 24%에 달할 전망이다. 이에 따라 2021~2030년 전세계의 모자 보건 관련 시장도 연평균 13.7%, 아동 교육 관련 시장 규모도 2029년까지 13.5%의 성장이 예상된다. 이와 함께 2015년부터 2030년 사이에 청년층에 진입하는 인구도 전세계에서 19억명에 이를 전망이다. 이 가운데 56%는 아시아인, 25%는 아프리카인으로 추산된다. 노동 시장에 새로 진입하는 청년층에 대한 직업 교육의 중요성도 그만큼 커질 것으로 보인다.

보고서는 아프리카가 청소년 인구 증가 추세에 제대로 대응할 경우 “2050년까지 1인당 국민소득이 지금보다 4배까지 늘어날 잠재력이 있다”고 평가했다. 이어 “이런 투자 기회를 놓칠 경우, 빈곤과 사회 불안이 더욱 커질 것이며 인도주의적 지원 필요성 증가와 천연자원 관리 어려움 등의 파급 효과도 적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유니세프도 어린이 렌즈 투자는 사회기반시설, 농업, 주택 등의 분야에서 어린이는 물론 성인에게도 물질적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된다며 이는 “상업 측면에서 보면, 매력적인 수익을 제공하고 새로운 시장을 창조하며 잠재적인 고객을 확보할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짚었다.

■ 아동의 다양성 고려하는 시각도 필요

전문가들은 어린이 렌즈 투자는 전세계 어린이의 공통적인 필요와 요구를 고려하는 동시에 각 지역·국가·집단별 어린이들의 차이·다양성·환경까지 모두 고려하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유니세프 보고서는 이런 관점을 포괄하는 원칙으로 △어린이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보호’ 원칙 △보호자와 어린이를 둘러싼 주변 환경까지 모두 고려하는 ‘전인적인 어린이’ 원칙 △전세계 어린이가 지역, 성별, 사회경제적 지위 등에서 모두 제각각임을 고려하는 ‘정체성’ 원칙 △각각의 나라와 사회, 지역별로 ‘아동’에 대한 인식이 다른 걸 고려하는 ‘사회’ 원칙을 제시했다.

크라이티리언의 보고서는 “(1990년에 발효된) 유엔의 아동권리협약이 어린이의 권리를 모두 포괄하는 기반을 제공하지만, 여기에는 유럽 중심적인 시각이 유지되고 있다”며 “문화적 인식론이 다른 공간을 창조하고 세대 간 연결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어린이의 권리에 대한 탈식민주의적이고 각 지역 특성에 맞춘 접근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미래 세대에 대한 투자는 서양의 가치관을 보편화하는 방식이 아니라 다양성을 촉진하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다.

신기섭 선임기자 mari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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