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9개월 기다린 우승… 26억원짜리 ‘샷 이글’
LPGA(미국여자프로골프) 투어 데뷔 16년 차. 34세. 마지막 우승은 4년 9개월 전. 동갑내기 미셸 위 웨스트(미국)는 올해 은퇴를 선언했다. 취미로 실내 암벽등반을 즐기다 왼쪽 팔꿈치를 다쳤다. 공을 칠 수 없을 만큼 심한 통증에서 회복되기까지 2년쯤 걸렸다. 이 모든 걸 뒤로하고 양희영(34)이 다시 정상에 올랐다. 그것도 올해 가장 큰 상금이 걸린 시즌 최종전. 우승 상금이 200만달러(약 26억원)로 KLPGA(한국여자프로골프) 투어 한 대회 총상금보다 많다.
양희영은 20일 미국 플로리다주 티뷰론 골프클럽(파72·6438야드)에서 열린 CME그룹 투어 챔피언십(총상금 700만달러)에서 합계 27언더파 261타를 쳐 우승했다. 261타는 역대 이 대회 최저타 기록이다. 그는 4라운드를 하타오카 나사(24·일본)와 공동 선두로 출발했다. 3번홀(파4) 보기가 나와 한때 3타 차로 밀렸으나 7번(파4)·8번홀(파3) 연속 버디를 잡았고 10번홀(파4) 버디도 추가했다. 13번홀(파4·337야드) 페어웨이에서 핀까지 80야드를 남겨놓고 58도 웨지로 친 세컨드샷이 홀로 들어가 샷 이글을 기록했다. 이제 1타 차 단독 선두. 17번(파5)·18번홀(파4) 버디로 공동 2위(24언더파)인 하타오카와 앨리슨 리(28·미국)를 3타 차로 따돌렸다. 양희영으로선 LPGA 투어 통산 5번째 우승이면서, 미국 땅에서 치러진 대회 첫 우승이다. 올 시즌 LPGA 투어 대회 우승자 중 최고령이다.
양희영의 아버지 양준모씨는 국가 대표 카누 선수, 어머니 장선희씨는 아시안게임 창던지기 동메달리스트 출신이다. 양희영은 어릴 때부터 골프에 재능을 보여 호주 유학을 떠났다. 부드러운 스윙을 앞세워 2006년 유럽 투어에서 당시 최연소 기록(만 16세)으로 우승했다. ‘리틀 박세리’ ‘여자 타이거 우즈’ ‘호주의 미셸 위’ 같은 수식어가 붙었다.
벅찬 기대를 안고 2008년 LPGA 투어에 데뷔했지만 기대를 충족시키진 못했다. 2013년 한국에서 열린 LPGA 투어 대회에서 첫 우승을 달성했다. 태국에서 열린 혼다 LPGA 타일랜드에 강해 2015·2017·2019년 3차례 우승했다. 메이저 대회 10위 안에 21번 들긴 했으나 정상 정복엔 실패했다. “잘하려고 너무 애쓰고 너무 많은 대회에 출전하다가 번아웃이 오기도 했다”고 전했다.
팔꿈치를 다치고 나선 “선수 생활이 곧 끝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인내심과 긍정적 태도를 가졌다”고 했다. 이날 양희영은 메인 스폰서 로고가 없는 하얀 모자를 쓰고 트로피를 들었다. 이모티콘처럼 생긴 웃는 얼굴을 모자에 작게 새겼다. 부담감을 줄여 골프와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려고 메인 스폰서 없이 활동했다고 했다. “비어 있는 모자보다는 작은 웃는 얼굴을 넣으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고 했다.
꾸준하고 성실하게 선수 생활을 이어온 양희영은 역대 LPGA 투어 한국 선수 중 통산 상금 2위(1388만2919달러·약 180억원)까지 올라섰다. 전체 선수로 따져도 11위. 그보다 상금을 많이 탄 한국 선수는 통산 21승 박인비(35·1826만2344달러·약 236억원·전체 4위) 뿐이다. 오랜 코치인 토니 지글러는 “양희영이 전에는 압박감과 기대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는데 나이가 들면서 방법을 알게 됐고 이젠 스스로 편안함을 느끼며 자기 자신을 위해 경기한다”고 했다.
릴리아 부(26·미국)가 4위(21언더파), 아타야 티띠꾼(20·태국)이 5위(20언더파)였다. 올 시즌 4승을 거둔 세계 랭킹 1위 부는 미국 선수로는 9년 만에 올해의 선수상을 차지했다. 티띠꾼은 LPGA 투어 사상 처음으로 우승 없이 최저타수상(69.53타)을 받았다. 김효주(28)가 공동 13위(14언더파)였고 고진영(28)은 무릎 부상으로 기권했다. 올 시즌 한국 선수들은 LPGA 투어 5승을 합작했다. 고진영이 3월과 5월 2승을 올렸고, 신인상 수상자 유해란(22)과 김효주가 지난달 정상에 올랐다. 작년보다 1승 늘었지만 메이저 대회 우승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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