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섭‧김승기 등…, 명가 원주의 그 시절 식스맨들
올 시즌 초반 가장 뜨거운 팀은 단연 원주 DB다. 13경기에서 12승 1패로 2위 정관장에 3.5게임 앞선 선두를 달리고 있다. 여기에는 절정의 기량을 선보이고 있는 외국인선수 디드릭 로슨(26‧201cm)과 아시아쿼터제 최고의 히트작으로 꼽히는 이선 알바노(26‧185cm)의 힘이 크다는 평가다.
둘은 공수에서 제 몫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것은 물론 빼어난 패싱 센스까지 선보이며 팀플레이의 선봉에서 맹활약 중이다, 그로 인해 김종규(32‧206.3cm)와 강상재(29‧200cm)의 높이까지 위력을 떨치고 있다. 거기에 더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김영현(32‧186cm), 최승욱(30‧192.3cm), 서민수(30‧196.2cm), 박인웅(23‧190cm) 등의 식스맨 군단이다.
이들은 높이가 부활한 DB에서 외곽 지원부대로 불리고 있는데 성공률 높은 3점슛을 통해 잘 나가는 팀에 크게 일조하고 있다. 얼마를 뛰던 간에 엄청난 활동량을 통해 팀의 에너지 레벨을 높여주고 있는 것을 비롯 원주 산성에 더한 양궁 농구의 일원으로 맹위를 과시 중이다.
출장시간이 불안정한 식스맨의 특성상 매 경기 잘할 수는 없지만 이들은 이른바 ‘돌아가면서 터지는’ 상황인지라 상대팀에서 대비가 쉽지 않아 더욱 힘들다. 예전 나래 시절부터 DB가 잘나갈 때는 주전 못지않게 탄탄한 식스맨들의 활약도 상당했다. 그렇다면 과거 허재, 김주성 시대 식스맨으로서 팀에 일조했던 선수들로는 누가 있었을까?
쟝윤섭(53‧187cm)은 원클럽맨이다. 전신 산업은행 시절부터해서 원주 농구단에서만 커리어를 마쳤다. 아마 시절 약체 국민대 농구부를 이끌던 선수 중 한명이었으며 이후 원주에서 쏠쏠한 식스맨으로 활약한다. 정인교, 강병수, 이인규 등과 함께 원년 준우승의 공신으로 활약한 그는 프로 첫 해 '수비 5걸'에도 들어간바 있는 알짜선수였다.
단신 포워드인 장윤섭은 사이즈의 열세를 악착같은 수비와 정확한 슈팅으로 커버해나가며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해나갔다. 하지만 양경민, 신종석 등 신장과 운동능력을 겸비한 젊은 후배들에 밀려 출장기회가 줄어들며 30대 초반의 다소 이른 나이에 조용히 은퇴 수순을 밟을 수밖에 없었다. 원년과 두 번째 시즌 이외에는 별다르게 활약을 하지 못했던 선수인지라 기자 역시 그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다.
그런 가운데 유독 한 경기 만큼은 지금까지도 강하게 뇌리에 박혀 있다. 1999년 1월 16일에 펼쳐진 LG전으로 이날 경기에서 장윤섭은 승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활약을 펼쳤다. 엎치락뒤치락하며 역전과 재역전을 반복하던 양 팀은 종료 직전까지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접전을 펼쳐나간다.
당시 원주 동부(현 DB)는 토니 해리스가 34득점(3점슛 6개)을 기록하며 공격을 이끌었고, LG또한 버나드 블런트가 무려 50득점을 폭발시키며 득점 괴물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날 경기에서는 결국 원주가 84대 83, 1점차로 승리를 가져가는데 승부에 마침표를 찍은 선수는 허재도, 해리스도, 신기성도 아닌 잊혀져 가고 있던 벤치 멤버 장윤섭이었다.
1점차로 뒤지고 있던 경기 종료 7초전, 장윤섭은 상대의 파울로 인해 자유투를 던질 기회를 얻었다. 한 개를 넣으면 동점이면 두 개를 다 넣으면 역전인 상황이었다. 본래 슛이 좋은 선수이기는 하지만 자주 출장하지 않아 경기 감각이 많이 떨어져 있다는 부분과 살얼음 접전이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2구를 모두 넣을 것으로 장담하기 쉽지 않았다.
지켜보는 동료들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흘렀다. 하지만 베테랑 장윤섭은 침착했다. 무표정하게 자유투 라인에 서더니 침착하게 두 개의 슛을 모두 성공시켰다. 장윤섭은 결승골 포함 총 7득점을 해내며 이날 역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허재와 함께 뛰던 시절 그리고 김주성의 커리어 초창기 때 원주 최고의 식스맨을 언급하라면 단연 '터보 가드' 김승기(51‧182cm)가 첫손에 꼽혔다. 중앙대 재학시절, 연세대 이상민과 라이벌 관계를 이룰 만큼 특급 1번으로 꼽혔지만 프로에 와서는 기대치만큼 성장하지 못했다. 하지만 가드가 약한 팀에서는 충분히 주전이 가능한 정도로 기본 기량은 출중한 선수였다.
프로 커리어의 시작은 삼성에서 시작했지만 김승기는 원주맨이라는 이미지가 꽤 있다. 전성기를 원주에서 보낸 이유도 크지만 때로는 리딩가드, 때로는 슈팅가드 상황에 따라서는 상대 에이스 가드를 묶는 스토퍼 역할까지…, 주전 같은 식스맨으로 활약했다.
허재, 양경민과 함께 트레이드를 통해 원주로 들어온 이후 열악한 벤치에서 곳곳의 구멍을 메워주는 소금같은 존재였다. 어려운 시절 누구보다도 고생이 많았던 덕에 창단 후 첫 우승의 순간에도 당당히 공신의 하나로 기억될 수 있었다.
경기력 면에서는 대학 시절에 비해 아쉬웠으나 선수 생활 내내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투지였다. 보통의 선수들은 경기 막판까지 큰 점수차로 끌려가게 되면 해당 승부를 단념하는 경우가 많다. 뒤집기 어려운 경기에 힘을 쓰기보다는 다음 경기를 노리겠다는 의도도 있다. 김승기는 달랐다.
끝까지 덤벼들었다. 이기지 못하더라도 상처라도 하나 더 남기겠다는 의지로 종료 직전까지 송곳니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대학 시절에도, 국가대표 시절에도, 프로에서도 늘 변하지 않았다. 가비지타임에서 김승기의 스틸과 연속 3점슛에 깜짝 놀란 상대 감독이 황급하게 작전타임을 부르고 주전들 일부로 다시 투입시킨 적도 있었을 정도다.
‘김주성 시대’를 기억하는 원주 팬들이라면 신종석(48‧193cm)은 잊을 수 없는 선수다. 1998년 신인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4순위로 지명받은 이후 7년여간의 원주생활 동안 꾸준하게 경기력을 가져가며 포워드진의 마당쇠 역할을 잘해주었기 때문이다. 공격과 수비 양쪽에서 밸런스가 잘 잡힌 선수였던지라 식스맨이었지만 활동도가 높았고 어지간한 주전 못지않은 공헌도를 자랑했다.
원주의 첫우승 당시 신종석은 엄청난 활약을 펼쳤다. 그가 없었다면 과연 우승이 가능했을까라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다. 챔피언결정전 내내 펄펄 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시즌에 몇 번 미치는 경기가 챔피언결정전에서 한번 나왔다. 대구 오리온스와의 2002~03 챔피언결정전 6차전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신종석은 3점슛 5개를 시도해 모두 성공시키는 등 17득점을 2쿼터에 집중시키며 기울어졌던 승기를 끌어 올리는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이른바 지금까지도 회자 되는 ‘종석타임’이다. 그런 점에서 원주의 당시 드래프트는 팀 역사상 최고의 픽운이 작용했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 1라운드 7순위로 신기성을 그리고 2라운드에서 신종석을 지명했기 때문이다.
결과만 놓고 보면 신기성은 전체 1순위가 아깝지 않은 선수였으며 신종석 또한 1라운드에 충분히 지명될만한 가치를 증명했다. 그리고 당시 드래프트에서 건진 ‘신씨 브라더스’는 원주의 굳건한 기둥이 되어주었다. 신종석은 신인 시절부터 주전급 식스맨으로서의 자질을 드러낸바 있다.
첫 시즌 광주 나산전에서 15득점(3점슛 3개), 대구 동양전에서 19득점(3점슛 3개), 8리바운드, 5어시스트를 기록하는 등 수시로 두자릿수 득점을 기록하며 공격적인 부분에서 기복이 있던 양경민을 도왔다. 들쭉날쭉한 출장시간과 공격에만 집중할 수 없었던 팀 사정 때문에 6득점, 2.3리바운드로 시즌을 마쳤지만 3&D 플레이어로 좋은 기량을 보여준 활약을 인정받아 식스맨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첫 시즌 신종석은 3점슛 정확도에서 주전 양경민에 뒤지지 않는 솜씨를 과시했다. 하지만 이후 다양한 부분에 걸쳐 노련해졌지만 슛 만큼은 다운되어버린 경향이 있어 아쉬움을 남겼다. 내 외곽 플레이, 수비 등을 골고루 평균 이상으로 잘했던 것이 외려 비상 대기조가 되어 식스맨 이상의 위치까지 올라가는데 발목을 잡았다는 평가도 있다.
이형주(45‧182cm)는 아쉬운 이름으로 기억되는 선수다. 한때 그는 원년 원주 최고 스타 정인교의 뒤를 이을 슈터 후보 중 하나로 기대를 모았다. 사이즈도 플레이 스타일도 한창때의 정인교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단신 포워드이기는 하지만 정확한 3점슛을 무기로 연세대의 주포로 활약하던 그는 일명 '많이 쏘고, 많이 실패도 하고, 많이 성공도 하는' 배짱 좋은 에이스급 슈터였다.
대학선발에도 꼬박꼬박 선발되며 주득점원 역할을 담당했던 경력도 가지고 있던지라 원주는 2000년 신인드래프트에서 7순위로 그를 선발한다. 과거 신기성처럼 럭키 7순위의 위력을 이어가기를 기대하기를 바라는 팬들도 많았다. 사이즈 때문에 주전은 쉽지 않겠지만 식스맨으로서 외곽슛이 필요할 때 한방 터트려주는 저격수 역할은 충분하다는 것이 당시 평가였다. 하지만 개막을 앞두고 부상을 당한 이형주는 제대로 활약을 펼쳐볼 사이도 없이 침체의 터널 속으로 빠져들어버렸고 상무 입대 후 이동준과 함께 KCC 장영재와 트레이드되고 만다.
그 외…. 큰 키와 커다란 몸을 앞세워 묵묵히 궂은일을 맡아주던 정경호, 기본기가 좋았던 포워드 장영재, 중요할 때 미들슛 한방씩을 꽂아주던 윤제한, 신인 시절부터 당찬 플레이가 인상적이었던 이상준 등도 그 시절 원주의 벤치를 지켜주던 식스맨들이었다. 벤치 멤버의 특성상 쉬이 잊혀지기도 하지만 당시부터 원주를 응원하던 팬들은 이들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박상혁 기자, 유용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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