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히지 않기 위한 꽃의 전략

한겨레 2023. 11. 20.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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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김용규의 숲과 지혜]

픽사베이

군말 없이 신의 숙제를 푸는 여름꽃(3)

- 잊히지 않기 위하여 : 모양(形)을 바꾸거나 때(時)를 살피거나

잊히는 존재들의 슬픔

삶에 목적이 있을까? 삶에는 어떤 목적도 없다고 주장하는 견해가 커진 세상이지만 숲을 거닐어보면 그 견해에 동의하기가 어렵다. 최소한 하나의 목적은 분명하다. 생명은 모두 그 자신만의 세계를 펼치고 이루기 위해 태어난다. 삶에 관한 이 최소한의 진실을 알아채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흔한 들풀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씨앗의 껍질을 뚫고 발아한 모든 들풀은 어떻게든 자신의 꽃을 피우려 든다. 꽃 피우고 열매를 맺는 과정을 통해 한사코 그 존재의 세계를 창조하려 한다. 알을 깨고 부화한 새들을 보라. 그들은 모두 대대로 익혀온 자신만의 방식을 따라 홀로이거나 혹은 무리를 지어서 어떻게든 제게 알맞은 땅을 찾아 자신의 높이로 날며 삶을 헤쳐 나간다. 새들은 인가 근처나 들, 또는 숲, 아니면 강가나 바닷가, 혹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은밀한 자리를 찾아 제 삶과 사랑의 흔적을 남기는 길을 살고 떠난다.

산딸나무. 넉장의 꽃잎은 자신의 꽃을 돋보이게 하려고 만들어낸 성형의 결과물이다. 사진 김용규

생과 관련하여 또 다른 진실 하나가 모든 생명의 삶을 지배하니, 그것은 생명 저마다의 길은 결코 순탄하기만도, 녹녹할 수만도 없다는 점이다. 생명 누구나 삶의 길에서 마주하게 되는 이러저러한 사연으로 더러 길을 잃기도 한다. 하지만 생명성이 살아 있는 한 제 씨앗(알) 안에 이미 펼쳐지도록 새겨진 세계를 향하는 행보를 쉽사리 멈추지 않는다. 제 세계를 펼치기도 전에 스러지거나 아무렇지도 않게 파묻히고 잊히려 태어나는 생명이 어디에 있던가. 날아보지도 못하고, 혹은 꽃 피워보지도 못하고, 아니면 자신의 노래 한 번 제대로 부르지 못하고 스러지는 존재들의 생은 그래서 한없이 슬프고 마음 아프다.

산딸나무. 진짜 꽃은 연두색, 우윳빛 흰색의 꽃임을 만들어냄으로써 여름철의 치열함 속에서도 제 꽃의 위치를 분명하게 알릴 수 있다. 사진 김용규

다시 짚는 이야기지만 숲의 생명들에겐 여름이 제 세계를 펼쳐내기에 가장 좋은 계절이다. 그러나 여름이라는 계절의 대극(對極)에는 인자함이 없다. 특별함을 만들어내지 않고는 자칫 묻히기 쉬운 계절이다. 모든 생명이 내뿜는 생장과 자기 현시의 욕망이 가장 무성하게 짙어지며 충돌하는 계절이 바로 여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계절에 성실하지 않거나 게으르거나 볼품을 갖추지 못한 꽃은 자칫 매개자들로부터 외면받거나 주변에 의해 파묻히기 쉽다. 따라서 너무 작은 꽃을 피운다거나, 꽃 색이 주변에 묻힐 만큼 너무 평범하다거나, 같은 시절에 피는 다른 꽃들에 비해 향기가 미약한 꽃들은 주변에 의해 파묻힐 수도 있는 위험을 창의적인 방법으로 넘어서야 한다. 앞서 살펴본 색(色)과 향(香)에 이어 이제 그런 위험에 노출된 존재들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찾아낸 나머지 두 가지의 계책을 살펴보자. 모양(形)을 특별하게 하여 자신을 드러내거나 시간(時)을 잘 활용하여 경쟁 우위를 확보하는 방책이 바로 그것이다.

산딸나무. 사진 김용규

돋보이기 위한 산딸나무의 성형(成形)

모든 나무와 풀의 이파리들이 더없이 무성하여 사방천지 녹색이 범람하는 시절인 여름철에 도드라질 것이라곤 한 구석도 없는 색깔, 즉 연두색 계열로 꽃을 피우는 식물이 있다. 산딸나무가 그 주인공이다. 산딸나무의 꽃은 6~7월에 흰빛이 도는 연두색으로 핀다. 초록(草綠)은 동색(同色) 아니던가, 울울한 여름에 주변 색 속에 파묻히기 딱 좋은 조건이다. 20~30개의 자잘한 꽃을 둥그런 머리모양(頭狀花序)으로 모아서 피우지만, 너무 수수한 색이어서 산딸나무의 꽃 자체로는 눈에 띄기에 매우 불리한 형편이다. 그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해 산딸나무는 아주 특별한 성형을 단행했다.

그가 성형에 성공한 부분은 꽃잎이다. 산딸나무의 꽃잎은 20~30개가 모여서 피는 꽃 크기에 비해 매우 큰 면적을 차지하는 긴 타원형이다. 모두 네 조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색깔은 우윳빛을 띠는 고운 흰색이다. 흰색은 연두로 피는 수수한 자신의 꽃만이 아니라 녹음으로 바뀐 여름 숲 색과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게다가 꽃잎의 크기가 꽃의 수십 배로 매우 넓고 크다. 그 덕분에 비록 연두색으로 피는 꽃이지만 멀리서도 ‘저기 산딸나무가 있구나’하고 그 위치를 단박에 알아보게 된다.

산딸나무. 사진 김용규

흥미로운 것은 흰색의 조명을 밝혀 자신의 위치를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넉 장의 우윳빛 꽃잎이 원래는 꽃잎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산딸나무의 꽃잎은 꽃싸개(苞)를 꽃잎처럼 보이도록 바꿔낸 것이다. 산딸나무의 흰색 꽃잎을 자세히 보면 그곳에 잎이었던 흔적이 남아있다. 알다시피 나뭇잎에는 모두 잎맥이 있다. 그중 산딸나무의 잎맥은 층층나무속(屬)에 속하는 ‘층층나무’나 ‘말채나무’, ‘산수유’가 그렇듯이 ‘나란히맥(平行脈)’의 형태를 띠고 있다. 산딸나무의 하얀색 꽃잎을 자세히 보면 그곳에 잎맥의 흔적, 즉 나란히맥을 찾을 수 있다.(비교적 자세히 드러난 사진의 맨 왼쪽 꽃잎 참조) 게다가 넉 장의 하얀색 꽃잎은 처음부터 흰색이 아니다. 개화 전에는 녹색이었다가 개화가 시작될 때까지 점점 커지면서 흰색으로 변한다. 이러한 점 역시 그의 꽃잎이 본래는 잎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의 근거로 삼을 만하다. 자신의 무엇을 바꿨든 산딸나무는 자신의 수수한 꽃을 더 선명하고 도드라지게 보이는 데 성공했다. 산딸나무는 인간으로 치자면 성형을 통해 더 덧보이는 노력을 펼쳤고 그것에 성공한 셈이다.

여름에 피는 대표적인 꽃의 하나, 산수국, 사진 김용규

좁쌀만 한 크기의 한계를 넘기 위한 산수국의 성형(成形)

비슷한 방식을 써서 자신의 보잘것없는 꽃을 돋보이게 하는 전략을 구사하는 또 다른 식물로 산수국(山水菊)이 있다. 산수국은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물이 흐르는 산의 계곡지나 산기슭의 바위틈 등을 서식지로 삼고 있다. (산수국의 학명은 Hydrangea로 시작하는데, 이 역시 물을 뜻한다) 키는 0.5 ~ 2m 정도 까지 자라고 가을에는 낙엽을 만드는 활엽의 작은떨기나무(灌木)이다. 산수국이 꽃을 피우는 시기는 역시 여러 면에서 가장 유리한 환경이 갖춰지는 7~8월, 즉 한여름이다. 하지만 이 존재가 피우는 꽃 하나하나의 크기는 좁쌀 한 알 정도의 크기로 매우 자잘하다. 이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산수국은 그 작은 꽃들을 다닥다닥 모아서 피운다. 꽃차례도 모아놓은 작은 꽃들을 한꺼번에 드러내는 데 상대적으로 유리한 우산모양꽃차례(繖形花序)나 편평꽃차례(傘房花序)로 피운다.

하지만 그렇게 작은 꽃들을 다닥다닥 모아서 피워내는 것만으로는 여름 녹음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게 어려웠든지 산수국은 특별한 성형을 단행했다. 성형의 방식은 산딸나무와 조금 다르다. 산딸나무가 넉 장의 꽃잎 모양을 만들어냈다면, 산수국은 자신의 진짜 꽃차례 가장자리에 가짜 꽃(헛꽃)들을 크고 예쁘게 빙 둘러 피우는 방식을 개발했다. 이 가짜 꽃들은 한 송이 한 송이가 완전히 진짜 꽃처럼 보인다. (산수국 사진 참조) 하지만 그 꽃은 사이비(似而非)다. 전형적인 꽃의 모양이지만 그곳에는 암술과 수술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임성화(不稔性花)나 무성화(無性花)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꽃을 식물의 생식기관이고 볼 때 그것은 진정한 꽃이 아니다. 사람들은 이런 특징을 반영해서 그것을 장식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람들이 그 이름을 무엇이라 부르든, 나는 산수국이 삶을 지배하는 대극(對極)의 문제를 넘어서기 위해 그 가짜 꽃을 장식하고 있다는 점에 특별히 감동한다. 산수국의 가짜 꽃은 여름철 자신이 피우는 작고 보잘것없는 꽃의 크기와 모양 때문에 겪는 불리함을 더 매력적인 꽃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한 일종의 성형 노력인 셈이다. 한여름 산의 계곡 부근 숲에서 피어나는 산수국의 가짜 꽃, 그 속에서 우리는 대극의 숙제를 넘어서는 데 성공한 한 생명의 아름다운 분투를 만날 수 있다.

산수국의 진짜 꽃과 헛꽃. 가장자리에 일반적인 꽃 모양으로 핀 꽃은 장식을 위한 꽃, 진짜 꽃은 중심부에 다닥다닥 모여서 피고 있는 자잘한 부분. 사진 김용규

산수국의 꽃을 유심히 반복적으로 주목해 본 사람들은 기억할 것이다. 어디에서는 분홍색(붉은색 계열)으로 핀 것을 보았는데, 다른 어디에서는 푸른색(청색 계열)으로 피어 있던 것을. 그렇다. 산수국꽃에는 붉음과 푸름 사이에 변주가 있다. 어느 나무는 분홍색을 발하기도 하고, 다른 어느 나무는 연보라, 혹은 푸른색을 발하기도 한다. 그 변주가 재미있고 또 신비한데, 이는 사는 곳의 토양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현상이다. 흙의 산성도(pH), 더 엄밀하게는 흙 속 속에 존재하는 알루미늄의 농도에 따라 이 식물의 반응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다. 토양의 산도가 높을수록 토양 속 알루미늄 이온이 더 많이 녹아 나오게 된다. 흙 내에 알루미늄 이온의 농도가 높아지면 일반적인 식물들의 경우에는 뿌리에 해를 입게 된다. 하지만, 산수국을 비롯한 수국류에는 알루미늄 이온이 뿌리에 집적되는 걸 막고 몸 전체로 이동시킬 수 있는 화학적 능력이 있다. 이 능력 때문에 산도가 높아질수록 꽃에 푸른색이, 낮아질수록 붉은색이 짙어진다. 한마디로 어떤 토양에서 사느냐에 따라 이 존재의 꽃 색이 다른 것이다.

산수국의 꽃은 토양의 산성도에 따라 붉음과 푸름 사이를 오가는 색의 변주를 일으킨다.

산수국에서 우리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특징 하나를 더 만날 수 있다. 진짜 꽃이 수정을 끝내면 더 크고 매혹적으로 보이고자 진짜 꽃들의 가장자리에 빙 둘러 장식처럼 피었던 가짜 꽃이 놀라운 변화를 보여준다. 벌과 같은 매개자들을 힘껏 불러 모으려고 애초에 하늘 방향으로 피었던 헛꽃은 진짜 꽃들이 수정을 마치면 이제 땅을 향해 180도 돌아선다. 가짜 꽃잎이 아래 방향, 즉 땅을 향하는 것이다. 이 모습은 마치 상점의 주인이 재료가 떨어져 영업을 마치면 출입문에 ‘Closed - 재료 소진으로 영업 마감’이라는 안내 표식을 내거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문을 열고 들어서 봤자 헛수고하게 될 고객을 위해 친절하게 상점의 상황을 안내하는 주인처럼, 산수국도 매개자들에게 자신의 상태를 친절하게 안내하는 것이다. 매년 보게 되는 꽃이지만 산수국의 ‘영업 마감’ 표식을 볼 때마다 나는 그 앞에 서서 매개자들의 날갯짓과 호흡량을 줄여주려는 산수국의 창의적인 배려를 향해 가만히 합장하곤 한다.

하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용규(충북 괴산, 여우숲 생명학교 교장)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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