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의 감옥행…그제야 피해자의 ‘7년 감옥’이 끝났다
시인 박진성 징역형
2심 판결문 보니
“나는 평소처럼 출근하지만, 가해자는 감옥에 있다.”
법원이 지난 8일 시인 박진성씨에게 징역 1년8개월의 실형을 선고하며 그를 법정구속하고 며칠이 지나서야 피해자 김현진씨는 비로소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김씨는 기나긴 법정 싸움이 일단락됐다는 게 실감나지 않는다고 했다. 한 달에 한 번씩 직장에 휴가를 쓰고 찾았던 법원에 더는 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가해자 엄벌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쓰기 위해 증거자료를 찾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막연히 ‘재판이 끝나긴 했구나’ 느낄 뿐이라고 했다.
김씨는 고등학생이었을 때 박씨에게 성희롱을 당했다고 2016년 폭로했다. 그러나 가해자로 지목된 박씨는 되레 피해자인 김씨를 ‘무고범’이라고 주장했다. 몇년을 무고범 낙인에 시달린 끝에 검찰이 박씨를 허위사실 공표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했고 법원은 유죄 판결을 했다. 경향신문은 20일 박씨 사건의 판결문을 확보해 법원이 어떤 판단을 했는지 상세히 살펴봤다. 2심 법원은 11쪽 분량의 판결문에서 박씨가 진정한 반성을 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며 이례적으로 1심보다 형량을 높였다.
이번 판결은 단순히 김씨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미투(#MeToo·나는 고발한다) 운동과 함께 자신의 피해 사실을 공개한 여러 피해자들은 피해 회복은커녕 ‘꽃뱀’ ‘무고범’이라는 시선과 질타에 시달렸다. 여성들은 ‘가해자는 감옥으로, 피해자는 일상으로’라는 구호를 외쳤지만 김씨는 폭로 7년이 지나서야 “과거에 마침표를 찍을 용기를 얻었다”고 말했다.
‘98년생 김현진.’ 박씨가 온라인상에서 김씨를 손가락질하며 조롱하던 호칭이다. 김씨는 ‘문단 내 성폭력’ 고발이 이어지던 2016년, 본인이 고등학생 시절에 박씨에게 성희롱을 당했다고 알리는 글을 익명으로 트위터에 올렸다. 그러자 박씨는 도리어 김씨가 돈을 노리고 ‘허위 미투’를 하는 것이라며 억울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김씨의 주민등록증이나 고향·나이·실명 등을 반복해 올렸다. ‘유명 시인’의 힘은 컸다. 언론과 누리꾼들은 박씨가 자살 소동을 벌일 때마다 김씨가 무고한 사람을 자살로 몰아갔다는 식으로 2차 가해에 가세했다.
김씨는 박씨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고 검찰은 박씨를 기소했다. 법원은 박씨가 2015년 미성년자이던 김씨에게 성희롱이 포함된 메시지를 수차례 전송했다고 인정했다. 또 김씨의 성희롱 피해 폭로 직후 잘못을 인정했던 박씨가 돌연 태도를 바꿔 김씨 폭로가 허위인 것처럼 트위터에 글을 올렸다고 확인했다. 이 같은 행위는 김씨를 비방할 목적으로 공공연하게 거짓의 사실을 드러내 김씨의 명예를 훼손한 범죄(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라고 1·2심 법원 모두 인정했다.
“진정한 반성 하고 있지 않다”며
1심보다 높인 형량 ‘이례적’
피해자 김현진씨 “과거에 마침표”
재판 쟁점은 박씨에게 어떤 형량을 매길지였다. 1심 재판부는 박씨 범행이 심각한 피해를 야기했다면서도 박씨가 범행을 시인하고 반성하는 점을 고려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1심 재판부는 박씨가 김씨 명예훼손 사건 민사소송에서 항소를 취하하고 피해배상금을 공탁한 점을 박씨에게 유리한 양형 요소로 고려했다. 2심 재판부의 판단은 달랐다. 2심인 대전지법 형사항소4부(재판장 구창모)는 박씨가 진지한 반성을 하지 않고 있다며 징역 1년8개월로 형량을 높였다. 성범죄 재판에서 피고인의 ‘진정한 반성’을 감형 사유로 어떻게 반영할 것인지는 그동안 주된 논란거리 중 하나였다. 피고인이 피해자에게 제대로 용서를 구하지 않고 법원에 형식적인 반성문을 제출하거나 피해배상 명목으로 돈을 맡기는 공탁을 감형 사유로 고려하는 게 부적절하다는 비판이 나왔다.
2심 재판부는 ‘형식적인 반성’은 감형 요소로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박씨 측은 성폭력 예방교육을 이수했고 선플 달기 운동에 참여하면서 범행을 뉘우쳤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판부는 유튜브 등 인터넷에 박씨가 유포한 김씨 관련 허위자료가 아직 남아 있지만 박씨가 디지털 장의사를 활용하는 등 적극적으로 이를 제거하기 위한 행동을 한 적이 없다고 꼬집었다.
재판부, ‘형식적 반성’ 인정 안 해
“직접 유포한 피해자 정보는 방치
선플 달기 운동 한 게 반성인가”
재판부는 그러면서 “가족이나 친지가 같은 피해를 입었다면 박씨는 그 가해자인 피고인에게 ‘인터넷에서 떠돌고 있는 민증이나 사진은 놓아두고 선플 달기 운동을 열심히 하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박씨가 역지사지의 자세로 김씨 피해에 공감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박씨에게 유리하게 참작할 만한 범행 동기도 없다고 했다. 박씨가 김씨에게 보낸 성희롱 메시지와 말을 모두 망각했을 리 없으므로 김씨의 항의나 사죄 요구를 ‘돈을 노린 허위 미투’로 오해했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또 박씨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김씨의 주민등록증 사진을 공개하고 ‘무고범’으로 몰아갈 이유도 없었다고 봤다. 재판부는 “피해자의 정당한 항의와 사과 요구를 다른 무고성 사건들과 같은 종류로 오인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이 범행을 저지른 게 아닌가 의심스럽다”고 했다.
재판부는 박씨가 2심 판결 선고를 일주일 앞두고 피해배상 명목으로 500만원을 법원에 맡긴 소위 ‘기습 공탁’도 진정한 반성으로 평가할 수 없다고 했다. 박씨 측은 김씨가 합의에 응하지 않아 대신 법원에 공탁한다고 주장했다.
판결 앞두고 500만원 기습 공탁
“공탁이 용서 대체할 수 없어”
형사 판결 직전 민사 취하 ‘꼼수’
그러나 재판부는 “이러한 (박씨의) 상황 인식은 위험하거나 적절하지 않다”고 했다. 민사소송에서는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공탁을 채무 변제와 같다고 보지만, 형사소송에선 공탁을 했다고 피해자와 합의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명확히 밝힌 것이다. 재판부는 “형사상 합의란 피해자에게서 용서를 받았다는 것인데 형사공탁을 했다는 사실이 이러한 용서를 대체할 수는 없다”며 “공탁의 의미는 제한적으로만 양형조건으로 기능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
1심은 박씨가 민사소송 항소를 취하한 점도 반성의 증거로 봤지만 2심 판단은 달랐다. 2심 재판부는 박씨가 항소를 취하한 ‘시점’에 주목했다. 박씨는 2021년 5월 민사소송에서 패소한 뒤에도 계속 책임을 부인하다가 형사 판결 1심 결과가 나오기 직전 돌연 항소를 취하했다. 2심 재판부는 “피고인이 범행을 자행한 뒤 무려 3년5개월이 지난 시점에서야 민사사건의 항소를 취하한 점을 고려하면 이를 피고인에게 유리한 양형의 조건으로 볼 수 있을지 심히 의문”이라고 했다.
더 이상 시를 읽지 못하는 김씨
“과거 사실로 다퉈야 하는 피해자
가해자 처벌돼야 과거와 이별”
시를 좋아해 시인이 되고자 했던 김씨는 아직 시 한 줄도 읽지 못한다. 박씨와 관련한 기사도 계속 검색해보게 된다. 사정을 모르고 가해자를 편드는 글들을 보면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했다고 한다. 피해를 겪을 때 고등학생이었던 김씨는 이제 직장인이 됐다. 그는 “싸움이 이렇게까지 길어질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다”면서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피해자는 과거에 있는 피해 사실을 두고 계속 다투게 된다. 가해자에게 제대로 된 처벌이 이뤄져야만 피해자는 과거와 이별하고 현재를 살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김혜리 기자 ha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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