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 ‘세계유산’ 걷어찬 설악의 비극

김기범 기자 2023. 11. 20.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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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년 전인 1996년 프랑스 파리에서는 이후 설악산이 맞이할 운명을 결정지었을지도 모르는 일이 벌어졌다. 설악산 인근 지역 지방의회와 주민 등이 파리의 유네스코 본부를 방문해 세계자연유산 등재 반대 의사를 전달한 것이다. 당시 정부는 설악산을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 신청한 상태였다.

하지만 설악산 인근 지자체, 지방의회, 일부 주민 등은 설악산이 세계자연유산이 되면 국립공원일 때보다 더 규제가 강화돼 지역 개발에 걸림돌이 된다며 극렬하게 반대했다. 지방의회가 유네스코에 반대 의견을 제출하고, 투쟁위원회까지 결성해 1996년 5월 유네스코 실사단이 내한했을 때 공항에서부터 반대 집회를 여는 등의 어처구니없는 행태를 이어간 결과는 정부의 신청 포기였다.

이렇게 한국의 첫 세계자연유산이 될 수 있었던 설악산이 이후 맞이한 운명은 주민들의 참여와 환영 분위기 속에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제주도와는 사뭇 달랐다. 이후 설악산은 다양한 개발 압력에 시달려야 했다. 한반도 전체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의 자연 환경을 자랑하는 설악산을 망쳐놓을 가능성이 높은 사업들이 설악산을 끊임없이 위협했다.

반대로 제주도의 세계자연유산 등재는 말 그대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됐다. 2007년 등재 이후 제주를 찾는 방문객이 급증했고, 엄청난 사회·경제적 효과가 발생했다. 세계자연유산 등재 후 해외 유명 언론들이 제주도를 집중 조명하기도 했다. 제주를 찾는 관광객이 너무 많아져 환경오염이 발생하고, 조절이 필요할 정도라는 점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세계자연유산 등재는 제주도민들에게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결과도 일으켰다.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다는 것은 해당 지역이 세계적으로도 인정받을 만한 보편적 가치를 지녔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국내의 세계자연유산 등재 지역이 두 곳뿐이라는 점에서도 이 같은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같은 장밋빛 미래 대신 개발 압력에 시달려온 설악산은 결국 올해 환경부의 오색케이블카 설치 허가라는 날벼락을 맞이하게 됐다. 지난 20일에는 강원 양양군 오색리의 케이블카 하부 정류장 예정지에서 양양군청이 시공사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3억원의 예산을 들여 착공식을 열었다. 연간 예산이 4000억원 정도에 불과한 기초지자체가 현재 972억원으로 예상되고, 실제로는 그 2배, 3배로 늘어날 수도 있는 케이블카 설치 비용을 낭비하면서 스스로 재정을 악화시키겠다는 신호탄을 쏘아올린 것이다.

세계자연유산 등재로 세계적인 명소가 되는 대신 설악산이 맞이한 것이 자연 환경을 훼손하고, 멸종위기 산양과 아고산대 식물들을 위협하는 케이블카 사업인 것도 슬픈 일이지만 그 사업으로 얻을 결과가 막대한 적자라는 점도 안타까움을 키운다. 적자로 인한 재정 부담과 그로 인한 악영향은 고스란히 양양군민들에게 돌아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다행히 한국 사회에는 이처럼 어리석은 행태를 바로잡을 시간이 남아 있다. 양양군이 군민들을 위해 스스로 사업을 접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그게 어렵다면 법원이 환경단체의 사업허가 취소소송에서 현명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환경 재앙임이 분명한 데다 심각한 적자사업이 될 것이 뻔한 케이블카 대신 설악산에 새로운 미래를 안겨주기 위해서 말이다.

김기범 정책사회부 차장

김기범 정책사회부 차장 holjja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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