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 [김영희 칼럼]

김영희 2023. 11. 20.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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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칼럼]한국방송(KBS)의 9시 뉴스 메인 앵커 교체와 ‘더 라이브’ 폐지는 여성을 동등하게 발탁하고 비정규직을 보호한다는 데까지 한 걸음 진전한 방송 환경을 아무 주저 없이 폭력적으로 퇴보시키고 있음을 보여줬다. ‘예의 없는 이별’은 이보다 더 어두운 앞날의 예고편이다.
지난 11월10일 KBS의 뉴스9을 진행하는 이소정 앵커. 그는 시청자와 작별인사도 나누지 못했다. 방송화면 갈무리.

김영희 편집인

2009년 말부터 다음해 초까지 문화방송(MBC)이 방영한 5부작 ‘아마존의 눈물’은 높은 완성도에 20%가 넘는 평균 시청률로 반향이 컸던 다큐멘터리다. 전작 ‘북극의 눈물’에 이어 기후위기 문제에 대중적 관심을 일으킨 계기가 됐고 나중엔 극장판도 개봉했다. 그런데 당시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매달 선정하는 ‘이달의 좋은 프로’에 끼지 못했을뿐더러, 하마터면 연말 한국방송대상 다큐부문 수상마저 불발될 뻔했다. 배경에는 원세훈 국정원의 ‘좌파 연예인 대응 티에프(TF)’가 있었다. 이들은 정권의 눈엣가시였던 ‘피디(PD) 수첩’ 출신 피디가 연출진에 있다며 “시청률을 올리기 위해 원주민들을 누드로 촬영했다”는 의혹을 확산시키고, 보수 성향 심사위원들이 선정성과 사실 왜곡을 이유로 유력 대상 후보였던 이 작품을 수상에서 배제하도록 조처했다. 피디수첩은 문화방송 시사 피디라면 상당수가 한번쯤 거치는 프로인데도 말이다.

지난해 초 문화방송 최승호 전 사장 등 전현직 구성원 10여명이 개인정보 청구를 통해 받아낸 국정원 문건 152건에 포함된 이 내용을 보며 새삼 ‘권력이 이토록 치졸해질 수 있구나’ 절감했다. 그래도 지나간 과거라 생각했지, 다시 그때를 떠올리게 될 줄은 솔직히 몰랐다.

어느 정권에서든 방송사 사장이 바뀌면 프로그램과 진행자 교체를 해온 건 사실이다. 하지만 보도자료를 통해 개편을 예고하는 등 최소한의 절차는 있었다. 그런 점에서 지난주 한국방송(KBS)의 박민 사장 취임을 전후해 벌어진 일은 상상 초월이다.

2019년 11월부터 4년 가까이 평일 밤 9시 메인 뉴스(‘뉴스 9’)를 맡아온 이소정 앵커는 주말에 전격 교체되며 시청자와 마지막 인사도 나누지 못했다. 그가 하차 언질을 받은 건 일요일 밤이고 월요일 오전에야 새 상사의 정식 통보를 받았다. 공중파 뉴스 첫 여성 메인 앵커의 의미를 조금이라도 존중한다면 이런 무례하고 폭력적인 방식이 가능했을까. 2018년 문화방송의 아침 뉴스 여성 앵커가 안경을 끼고 나온 게 화제일 정도로 여성 앵커를 둘러싼 환경은 보수적이었다. 그때, 아이를 키우는 40대 여성 기자의 메인 앵커 기용은 미국의 여성 앵커 바버라 월터스가 수십년간 시청자와 함께 나이 들어가던 모습을 한국에서도 기대하게 했다.

첫 뉴스에서 “작은 목소리도 귀 기울이겠습니다”라 다짐했던 그는 수어의 날에는 수어로 클로징 멘트를 했고, 학교폭력 피해자의 어머니 인터뷰를 소개하다가 울컥하는 모습을 보인 적도 있다. 대선 당시엔 메인 뉴스로는 파격적으로 20분 넘게 후보들과 생방송 정책 인터뷰를 이어갔다. 한국방송의 뉴스에 오보나 아쉬운 점이 왜 없겠냐마는, ‘이소정 앵커 기용’은 시청자 눈높이에서 시청자와 공감하는 뉴스로의 변화 다짐으로 읽힐 만했다.

11월13일 KBS 뉴스9의 새 진행을 맡은 박장범 앵커. 방송화면 갈무리

한국방송2의 ‘더 라이브’ 폐지는 기도 안 찰 정도다. 며칠간 제작진과 시청자를 ‘희망 고문’하더니, 결국 4주간 다른 프로그램으로 대체 편성 뒤 폐지라는 기발한 방안을 내놨다. 누가 봐도 작가 등 프리랜서 보호를 위해 도입했던 ‘방송 폐지 땐 한달 전 통보’라는 계약서 조항 위반을 피하기 위한 꼼수다. 한국갤럽의 ‘한국인이 좋아하는 프로그램’ 시사교양부문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사랑받던 이 프로그램에 굳이 이런 무리수를 둬야 했을까. 앵커 교체 이후 ‘땡윤 뉴스’가 이어지는 9시 뉴스를 보며, 몇달 전 ‘더 라이브’의 진행자가 양평고속도로 의혹 문제를 두고 보수 패널과 설전을 벌였던 일을 떠올리는 이들도 적잖을 것이다.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

한겨레 논설주간을 지냈던 언론인 김선주가 2007년 썼던 칼럼의 제목이다. 당시 열린우리당 분당 사태를 언급하며 쓴 칼럼이지만, 세상 모든 만남과 헤어짐에 적용될 얘기일 터다. 시청자와의 이별도 마찬가지다. 이명박 정권 때는 한꺼번에 출연진이나 진행자를 바꿀 경우 여론이 악화될까 시기를 나누기도 했지만, 이젠 그런 눈치도 안 본다. 이동관 방송통신위원장은 20일치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시청자들과 작별 인사할 시간은 줬어야 하지 않냐는 질문에 “문 정권에서 꽹과리 치며 쫓아낸 사람들이 그런 말 할 자격 있나”라고 답했다. 애초 일반 시청자들은 안중에도 없음을 시인한 셈이다.

이번 ‘예의 없는 이별’은 예고편일 뿐이다. 구성원들의 임명 동의 투표가 필요한 보도국장 등 후보 발표가 늦어지자, 결국 단체협약 파기를 통해 임명 동의제를 없애려는 것 아니냐는 말이 들려온다. 이동관 방통위원장이 “지금 방송의 독립성은 권력과 자본이 아니라 노조로부터의 독립이 문제”라 말했던 걸 떠올리면 억측이라 할 수도 없다. 임명 동의제가 언론 공정성의 유일한 필수조건은 아니지만 정권의 경영진을 통한 방송 장악 때문에 도입된 최소한의 방어 장치라는 점은 분명하다. 12월 초 한국방송2의 방통위 재승인 심사에선 수신료 감소로 인한 경영 위기를 이유로 민영화 주문도 나올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기우라고? 여성을 동등하게 발탁하고 비정규직을 보호한다는 데까지 한 걸음 진전한 방송 환경을 아무 주저 없이 퇴행시킨 이번 사태는 이런 어두운 앞날을 상상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편집인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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