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생 시절부터 축구 국가대표팀 주치의 꿈꿔” 2015년 올림픽 대표팀 ‘신태용호’ 승선 이후 지금까지 꿈 이뤄 “대표팀 주치의는 자부심과 사명감, 열정 없으면 맡기 힘든 자리” “부상 등으로 선수 생명 끊긴 선수들 제2의 인생 찾도록 돕고 싶어”
어렸을 때 TV로 축구 국가대표팀 경기를 보던 소년은 선수가 다치면 경기장으로 뛰어 들어가 돌보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갔다. 그중 한 명이 현직 의사란 걸 뒤늦게 알게 된 소년은 축구 국가대표팀 주치의(팀닥터)도 맡는 의사를 꿈꿨다. 의대에 진학한 후 재활의학과를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재활의학 전문의로 개인병원을 운영하던 30대 중반에 기회가 왔다. 2015년 대한축구협회 의무분과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돼 2016 리우올림픽 축구 본선 진출을 노린 ‘신태용호’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과 인연을 맺은 그는 이후 2017 ‘U-20(20세 이하)’ 월드컵·2018 러시아 월드컵·2020 도쿄올림픽·2023 항저우 아시안게임 대표팀 등 각급 축구 대표팀 주치의로 활약하며 꿈을 이뤘다. 윤영권(44) 에이준재활의학과의원 대표원장 얘기다.
‘황선홍호’가 금메달을 딴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의무팀을 이끌고 이강인(22·파리 생제르맹) 등 주축 선수들이 최상의 몸 상태로 경기에 나서도록 도운 ‘12번째 선수’ 윤 원장과 지난 13일 만났다.
그는 코치도 선수도 아니어서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손에 쥐지 못했지만 우승 자체가 자신에게 엄청난 선물이었음을 내비쳤다. “축구 대표팀 주치의를 맡는 것만으로도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데 우리 선수들이 건강하게 제 실력을 발휘해 우승하는 걸 보니 정말 기뻤습니다. 그 순간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거예요.” 어려서부터 축구를 좋아하고 축구 대표팀 주치의가 되는 게 소원이었던 윤 원장으로선 그럴 만하다.
대표팀 주치의는 대한축구협회 의무위원 중 선발되는데 의무위원으로 위촉되는 것도 쉽지 않다. 윤 원장은 “축구 대표팀 주치의는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닌데 뜻이 있으면 길이 조금씩 열리듯 계속 바라고 관심을 두니 운좋게 일찍 기회가 주어졌다”면서 “처음엔 막내였는데 지금은 주치의 경력만 보면 의무위원 중 가장 오래된 축에 속한다”며 웃었다. 축구 국가대표 의무팀은 성인(A) 대표팀의 경우 주치의 1∼2명에 트레이너 3∼4명, 그 외 대표팀은 주치의 1명에 트레이너 2∼3명으로 구성된다고 한다. 축구협회 의무위원들의 전공은 다양하지만 대표팀 주치의는 주로 정형외과나 재활의학과 출신이 맡는 것으로 전해졌다.
사실 대표팀 주치의는 개인 실리를 따지면 맡기 힘든 자리다. 국내외 훈련과 경기가 있을 때마다 본업을 내려놔야 해 금전적·시간적 손실이 이만저만 아니기 때문이다. 윤 원장도 이번 아시안게임 동안 25일 가까이 자리를 비우면서 다른 의사에게 병원을 맡겼다. 그는 “대표팀 주치의로서의 자부심과 사명감, 열정이 없으면 그 일에 매력을 못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평소에도 신경쓰고 전공 외 공부까지 해야 할 게 적지 않다. 대표팀 선수들의 몸 상태와 관련 정보를 다 꿰고 그들이 최상의 몸 상태를 유지하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강인이 프랑스에서 소속팀 경기 도중 허벅지 앞 부상을 당했을 때도 윤 원장은 바로 파리 생제르맹(PSG) 의무진과 소통하며 이강인의 건강 상태를 계속 살폈다. “대회 두 달 전부터 PSG 쪽 의사와 이메일(전자우편)로 이강인의 회복 속도와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지 등을 주고 받았어요. 강인이가 대표팀에 합류할 때도 PSG 구단이 맞춤형 회복·운동 프로그램을 전달해줘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윤 원장은 이강인이 빨리 회복해 실전 감각을 끌어올리도록 도왔고, 황선홍 감독은 윤 원장과 협의해 이강인의 출전 시간을 조율하며 최고의 결과를 얻어냈다.
주치의는 경기 중에도 절대 긴장을 늦추지 못한다. 출전 선수가 갑작스러운 부상으로 교체될 경우 감독이 구상한 전술 변화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수가 통증을 호소하면 신속하게 응급 처치를 하고 감독에게 교체 여부 판단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쓰러진 선수에게 달려갈 때 어떤 부위를 어떻게 다쳤는지 알고 있어야 적절한 조치와 판단을 빨리 할 수 있어서 경기 내내 한시도 눈을 떼면 안 됩니다.”
이와 관련, 그는 아시안게임에서 가장 아찔했던 순간으로 우즈베키스탄과의 4강전에서 엄원상(24)이 상대 수비수의 거친 태클에 쓰러져 고통을 호소했을 때를 꼽았다. 당시 엄원상은 곧 교체될 만큼 심한 부상이 우려됐다. 경기 후 엄원상을 지정 병원에 데려간 윤 원장은 정밀 검사 결과 안심해도 될 정도이자 한숨을 돌린 뒤 트레이너들과 극진히 돌봤다. 그 덕분에 엄원상은 일본과의 결승전에서도 맹활약할 수 있었다. 양 원장은 그때를 떠올리며 “정말 뿌듯했다”고 했다.
주치의는 경기 전후에도 챙겨야 할 게 많다. 선수들을 상대로 부상 여부와 정도를 파악하고, 이강인 사례에서 보듯 필요하면 구단 담당자와도 소통한다. 해외 원정길에는 물이나 음식이 안 맞아 설사, 고열 등에 시달리는 선수도 있는데 직접 처치를 해준다. 또 운동장 잔디를 점검한 뒤 말라 있으면 선수들 부상 위험을 줄이기 위해 운동장 관리 주체 측에 물을 뿌려달라고 요청하기도 한다. “나라와 지역에 따라 경기장이 열악한 곳도 있는데 그럴 경우는 선수들이 안 다치기만을 바라며 기도하는 심정으로 지켜봅니다.“ 경기 후에도 의무팀은 바쁘다. 숙소 제일 큰 방을 2∼3개 잡아 마련한 의무실에서 부상 선수를 치료하고, 찾아오는 선수들에게 마사지 등을 해주며 빠른 회복을 돕는다. 선수 부상이 심각할 경우 주치의가 지정 병원에 데려가 관찰하고, 도핑 검사도 참관해야 한다.
우리 대표팀이 경기에 지면 마음이 정말 안 좋다고 한 양 원장은 “스포츠라는 건 과정도 중요하지만 결국 결과 아닌가”라며 “특히 온 국민이 응원하는 국가대표팀 경기는 지면 아주 안 좋기 때문에 일단 이기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가 경기장에 들어갈 일 없거나 다친 선수가 (의무팀 도움으로) 빨리 회복해서 열심히 뛰어 우리팀이 이기는 경기를 가장 좋아한다”며 웃었다.
대표팀 주치의 경험 덕에 소원 하나가 새로 생겼다고 한다. “축구만 하다 부상으로 선수 생활(생명)이 끊긴 채 뭘 해야 할지 몰라 막막한 친구들이 있어요. 축구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 아는 그들이 축구 관련 영상·마케팅·지도자 등 교육과 경험을 쌓으며 또다른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