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 트윈스 해방일지…첫 페이지는 2000년 가을 잠실
시작은 2000년 10월28일 플레이오프 6차전이었다. 경기 뒤 인터뷰실에 들어온 이광은 LG 감독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어진 패장의 경기 총평. 그 내용이 어떻든 평가자들의 시선은 한곳을 향하고 있었다.
LG가 두산에 4-3으로 앞선 9회초 산뜻하게 아웃카운트 2개를 잡은 상황이었다. LG 벤치는 느닷없이 움직였다. 노련한 볼배합으로 두산 타자들의 타이밍을 흔들던 베테랑 김용수를 내리고 신예 마무리 장문석을 올린 것이었다. 고작 아웃카운트 1개가 아니었다. 장문석은 거짓말처럼 안경현에게 동점 솔로홈런을 맞았고, LG 벤치는 투수 운용의 길을 잃었다. 장문석은 연장 11회까지 버티다 결국 심정수에게 결승 솔로홈런을 다시 맞았다.
LG 벤치는 젊은 마무리의 자신감을 살리려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팀 전체를 죽이고 말았다. 어쩌면 그보다 전날 벤치에 쏟아진 비난을 씻고 가고 싶은 마음이 컸을지 모른다. 이날 6차전은 5차전의 복사판이었다. LG는 5차전에서도 1-0이던 8회 장문석을 올려 동점홈런(우즈)과 역전홈런(심정수)를 내주며 시리즈 전적 2승3패로 몰렸다. 4승2패로 끝낼 플레이오프를 2승4패로 내준 가을. LG가 그 가을 내준 것은, 한국시리즈 티켓만은 아니었다. 1990년과 1994년 우승으로 만든 너무도 ‘당연했던 것들’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LG 야구의 시대 충돌
그땐 몰랐다. 플레이이오프 6차전이 김용수가 LG 유니폼을 입고 등판한 마지막 날이 됐다. 전신 MBC 청룡 강타자 출신 ‘온달’ 이광은 감독의 앞길도 어두워졌다. 이광은 감독은 이듬해 시즌 초반 극도의 부진 끝에 현장에서 물러난다.
LG는 김성근 감독을 ‘소방수’로 불렀다. 감독대행으로 출발해 팀 승률 저지선을 지켜낸 김성근 감독은 ‘스타군단’ 색깔을 뺀 2002년 정규시즌 4위로 한국시리즈까지 올라간다. LG가 이번 가을 29년 만에 한국시리즈 우승 한풀이를 하기 전 치른 마지막 한국시리즈였다.
그때도 마지막이 달랐다면, 그다음도 달랐을지 모른다. 삼성의 한국시리즈 첫 우승으로 유명한 6차전 종료와 함께 김성근 감독은 대구시민구장 3루 더그아웃 왼쪽 벽으로 고개를 돌렸다. 9-6 리드에서 이승엽의 동점홈런과 마해영의 끝내기홈런으로 마무리된 시리즈. 김성근 감독이 눈물을 흘리며 선수 및 미디어 관계자들에게 그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했던 바로 그 장면이다.
LG 구단 수뇌부에도 변화가 컸던 시간이다. 김성근 감독을 선임했던 핵심인사 역시 구단을 나간 뒤였다. ‘한국시리즈 우승’ 아니면 경질될 수 있다는 소문은 현실이 됐다.
#엔딩 장면의 ‘와신상담’ 두 남자
LG는 2002년을 마지막으로 긴 여행을 했다. 여행 종착지에는 반전의 두 인물이 서 있다. 프런트를 이끈 차명석 LG 단장과 현장 지휘봉을 잡고 우승컵을 들어 올린 염경엽 LG 감독 모두 ‘와신상담’의 세월을 보낸 흔적이 짙다.
차명석 단장은 2001년 말 LG에서 방출됐다. 결혼식을 몇 주 앞둔 날이었다. 차 단장은 그날을 잊지 않았다. 지금도 쓰고 있는 일기장 첫 페이지에 굵은 글씨로 ‘구호’ 같은 말을 적어놓는다. ‘잊지 말자, 그날을. 11월26일’.
투수 차명석은 롱런하지 못했다. 그때 만약 ‘누구 때문에’라는 식으로 바깥에서부터 이유를 찾았다면, 지금의 시간은 없었을지 모른다. 또 한번의 참담함을 다시 겪지 않기 위해 사고의 근육을 키웠다. 방송 해설위원, 투수코치를 거쳐 LG 단장 5년 세월을 보낸 차 단장은 선수 시절 공을 쥐었던 손으로 책을 들었다.
염경엽 감독은 현대 유니콘스에서 은퇴한 뒤 구단 프런트로는 홍보팀장을 제외하고 모든 자리를 거쳤다. 스타선수가 아니었다. 코치로 주목받고 출발한 것도 아니었다. 염 감독이 가끔 꺼내는 일화 하나. 2004년 현대-삼성의 한국시리즈 9차전, 폭우 쏟아지는 잠실구장의 승부는 현대의 신승으로 끝났다. ‘기획팀장’ 염경엽은 논바닥보다 나을 게 없는 그라운드로 달려나가 행사를 정리하고, 인근 롯데 호텔로 다시 뛰어가 축승회를 준비했다.
옷 입은 채 샤워라도 한듯 비를 흠뻑 맞은 뒤 호텔 한켠에 주저앉아 담배 한대를 문 그때. 망가진 구두를 보고 스스로 처량했던 감정을 잊지 못한 염 감독이었다. 염 감독은 그 당시 경기인 출신들은 엄두를 내지 않았던 엑셀과 파워포인트 등을 스스로 다루며 지도자로 새길을 연다. 데이터와 자료를 갖고 설명하는 데 ‘유니크한’ 지도자가 된 출발점이었다.
#1~8회를 만든 사람들
염경엽 감독은 통합 우승 뒤 인터뷰에서 “내가 맡았던 팀 중 LG는 우승전력에 가장 가까이 있었다. 난 2% 부족한 것을 채웠을 뿐이다”고 말했다. 염 감독은 LG에서는 정말 쉽지 않은 ‘2%’를 채웠다.
다만 어떤 경기도 9회 승리에 이르기 전, 8회까지 과정이 있다. 우승을 위해 앞서 흐름을 만든 이름들이다.
지난해 10월27일 플레이오프 고척 LG-키움전, LG는 2-0으로 리드하던 6회말 2사 3루. 마운드의 LG 김윤식은 허리를 거듭 만졌다. 주사를 맞고 등판한 경기였다. 노심초사하던 LG 벤치는 외면하지 못했다. 깊은 고뇌로 고개를 한번 숙였다 든 류지현 감독은 교체를 결정했다. 돌아보면 LG가 흐름을 내준 변곡점이었다.
지난해 시즌 중이었다. 류 감독은 “내가 떠나더라도, LG가 강팀으로 계속 갈 수 있는 뎁스는 만들어놓고 싶다”는 말을 했다. 승자만이 살아남는 세계. 감독 앞날만 보자면 ‘왜’라는 물음부터 따라붙는 장면이었지만, 류 감독은 소신을 지켰다.
염 감독의 소감대로, 류 감독의 소신대로 LG는 최근 몇년간 강팀 구조를 만들었다. 2010년대 중반 이후 뎁스 확보에 공을 들인 가운데 최근 몇년 사이에는 현장과 구단이 같은 곳을 바라봤다. ‘결과’ 이상으로 ‘과정’과 ‘시스템’에 신경 쓴 시간. LG가 반짝 우승이 아닌 ‘왕조’를 꿈꿀 수 있는 것도 이 같은 배경에 기인한다.
결과는 지금 나왔지만, 간절함이 힘이 되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오래 전일지 모른다. 2013년 최고령 타격왕으로 ‘으쌰으쌰’ 세리머리로 온몸 다해 후배들을 독려했던 이병규, 툭하면 눈물을 흘리면서도 스마트한 선배로 온갖 노력을 했던 박용택. LG 울타리 밖에 있는 그들이지만, 그들의 노력도 올시즌 행보 어딘가에 녹아있다.
#암흑기도, 시작은 ‘진심’이었다
많은 사람이 LG 역사 ‘실패의 시간’으로 기억할지 모른다. 어느 순간, 누군가는 ‘암흑기’로 그 시대를 구분하기도 했다.
그 시간들도, 시작은 ‘진심’이었다. 1994년 우승 사령탑 이광환 감독 복귀 체제가 2003년 한해로 끝난 뒤 2004년. LG는 이순철 작전코치를 새 감독으로 승격시켰다.
이순철 감독은 유능한 코치였다. 해태 출신 특유의 리더십을 보였던 데다 당시만 해도 일부 지도자 시야에만 있던 데이터를 굉장히 깊게 들여다봤다. 뛰어난 언변으로 표현에도 거침이 없었다. 외국인선수를 찾아 나선 과정에서는 스카우트에 맡겨두는 대신 고추장을 바리바리 싸서 중남미를 구석구석을 직접 다니는 등 전에 없는 열의를 보였다. 인터넷을 통해 팬들에게 질문을 받고 그에 대해 실시간 직접 소통을 한 최초의 감독이기도 하다.
그해 이순철 감독의 나이 42살. 해가 갈수록 전력이 약화되던 LG에서 이 감독의 패기는 오랜 시간 빛나지 못했다. 프랜차이즈 스타와 불편함도 부각됐는데, 프랜차이즈 처우 문제는 앞서 구단 수뇌부가 그려놓은 그림이었지만 얄궂게도 그 프레임에 이 감독이 갇히고 말았다.
LG는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으로 LG를 떠나 현대에서 4회 우승에 성공한 김재박 감독의 리더십을 선택하고, 옆집 ‘화수분 야구’ 두산 색채의 박종훈 감독의 리더십도 앞세워본다. 거듭된 실패 속에 2013년 김기태 감독 체제에서 11년 만에 가을야구를 하기까지 시련의 시간을 보낸다.
마지막에는 차가운 시선이 따랐지만, 시작은 늘 진심이었다. 혹자는 LG의 암흑기를 떠올리며 이들 몇몇 감독을 떠올린다. 그러나 문제의 근원은 LG 안에 도사리고 있었을지 모른다.
#지폐 속 미소와 유광점퍼의 해방
LG는 그룹 차원에서 야구 사랑이 큰 기업이다. 29년 만에 우승 이후에는 고 구본무 회장이 야구 사랑을 담아 남긴 시계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LG가의 야구 사랑은 인간미로 가득했다. 2001년의 일이다. 김성근 감독이 공항에서 우연히 구본무 회장을 만났다. 구 회장은 김 감독에게 무엇이라도 하나 주고 싶었는지, 지갑에서 지폐 한장을 꺼냈다. 고작 지폐 한장이 아니었다. 구 회장은 손으로 지폐를 살짝 접었다 펴는 동작을 반복했다. 그 사이 지폐 속 인물은 얼굴을 찌푸렸다가 웃는 얼굴을 보였다. 그리고 미소로 꺼낸 한마디. “김 감독, 웃으세요.” 김 감독은 구단주 마음이 담긴 지폐를 지갑에 늘 간직했다.
LG가 가을야구조차 하기 어려워진 이후로는, 훈훈한 장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관심이 때로는 간섭으로 팀의 동력을 떨어뜨리는 브레이크가 되기도 했다. 예컨대, 현장 주요 관계자에게 날아오는 문자 하나하나가 굉장히 큰 상처가 되는 경우가 있던 것으로 전해진다. 밖으로 드러내기 어려운, 불편한 문화가 있던 곳이 LG이기도 했다.
이를테면 LG 야구단 사람들은 대입 수능으로는 3수생, 4수생보다 더한 압받을 받는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한국시리즈 5차전이 열린 지난 13일은 그들에게는 ‘해방일’과 다름없었다.
진짜 해방일은 맞은 건, 골수 LG팬일지 모른다. 한국시리즈 5차전이 열린 잠실구장 네이비석. 학원을 미루고 잠실구장을 찾은 16세 A군 일행은 옆자리의 40대 중반 30년 LG 팬과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손뼉치기를 하며 문성주 응원가를 함께 불렀다. LG팬들이 시대 초월 교감을 나눈 날이었다.
LG팬 경력 30년 이상의 직장인 B씨는 오랜 세월 서로 위로하고 의지하는 사이 주변 LG팬들과 축하 문자 주고받으며 가슴이 벅찼다고 한다. “축하한다. 우리 진짜 고생했다. 이제 편하게 야구 보자.”
안승호 기자 siwo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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