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민준의 골프세상] '인고의 골퍼' 양희영, CME그룹 투어챔피언십서 화려한 비상

방민준 2023. 11. 20.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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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2023시즌 최종전 CME그룹 투어 챔피언십 우승을 차지한 양희영 프로가 우승 트로피를 들고 포즈를 취하는 모습이다. 사진제공=Getty Images_LPGA

 



 



[골프한국] 양희영(34·영어이름 에이미 양)을 보노라면 사무엘 베케트(1906~1989·아일랜드)의 난해한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가 떠오른다. 196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 한국에서도 책으로, 연극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나도 책을 읽고 연극을 보았지만 지금도 '고도'가 누구인지, 무엇을 상징하는지 뚜렷한 흔적이 없다. '고도'라는 인물을 기다리는 두 부랑자의 건조한 대화는 가혹할 정도로 관객의 인내심을 시험한다는 기억이 날 뿐이다. 누구인지, 언제 올지도 모르는 '고도'를 기다리는 모습에서 세상의 부조리를 파헤친다는 해설도 와닿지 않았다. 



 



양희영은 2007년 LPGA투어에 뛰어든 지 7년만인 2013년 한국에서 열린 LPGA KEB·하나은행 챔피언십에서 첫 승을 거두었다. 아마추어 신분으로 호주에서 열린 LET(유럽여자프로골프투어) ANZ 레이디스 마스터스에서 최연소 우승기록(16세6개월8일)을 세우며 프로대회 첫 승을 올린 뒤로는 8년 만이다. 부모의 인도로 골프를 시작한 10세 때까지 거슬러 오르면 14년 만이다.



 



주니어시절 그가 남긴 화려한 족적을 보면 그에게 이렇게 긴 기다림이 따를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중학교 3학년 때인 2004년 호주로 골프 유학을 떠난 그는 군계일학의 실력으로 호주 아마추어골프를 점령했다. 2005년 퀸즈랜드 아마추어 챔피언십에서 최연소 우승했고 2006년엔 호주 주니어챔피언십에서 준우승했다. 



 



이어 LET 대회인 ANZ 레이디스 마스터스에 출전, 아마추어로서 최연소(16세 6개월) 우승기록을 세웠다. LET 대회는 만18세가 되어야 출전자격이 주어지는데 LET는 그의 탁월한 기량에 예외를 인정, 출전을 허용했다. 이 대회 우승 이후 바로 프로로 전향해 2008년 LET투어에서 2승을 올렸다. 그는 하이포베라인스뱅크 독일오픈 우승상금 전액을 중국 스촨성의 지진 난민들을 위해 쾌척해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2007년 LPGA 퀄리파잉 토너먼트에 도전, 공동 54위로 제한된 출전자격을 얻었으나 이듬해 다시 도전해 최종전 2위로 풀시드를 땄다.



 



그의 등장은 LPGA투어를 술렁이게 했다. 골프전문 언론인들 사이에 '북반구에 소렌스탐이 있다면 남반구에는 에이미 양이 있다'는 말이 떠돌 정도였다. 이 말의 진원지는 호주의 여자 골프영웅 캐리 웹(49)으로 알려지고 있다. LPGA투어 통산 41승에 5개 메이저 우승으로 슈퍼그랜드슬램 기록을 세운 캐리 웹은 호주 뉴질랜드의 골프발전을 위해 활동하며 한국 유학생이나 교포들에게 많은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키 174cm의 좋은 체격조건에 부드러운 스윙의 대명사 어니 엘스를 연상케 하는 스윙을 구사하는 그에 대한 이런 기대와 촉망은 당연했다.



 



LET에서 3승을 거둔 그녀는 LPGA에서도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우승만 없었다 뿐 중상위권을 유지했다. 그러나 후배들이 승리를 쌓아가는 모습에 초연할 수는 없었다. 인내심을 갖고 우승의 날을 기다리면서도 가슴이 탔다. 한때는 골프를 그만둘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럴 때쯤 용케 우승이 찾아왔다. 2013년 LPGA KEB·하나은행 챔피언십, 2015년 혼다 LPGA타일랜드, 2017년 혼다 LPGA타일랜드, 2019년 혼다 LPGA타일랜드 등으로 징검다리 우승을 이어갔다.



그러나 모두 미국 아닌 지역에서의 우승이다. LPGA투어의 본 마당인 미국 본토 대회에서 한 번도 우승이 없다는 사실은 그를 옥죄었다.



 



그러나 양희영의 길고 긴 인고(忍苦)는 헛되지 않았다. 그 긴 기다림 끝에 LPGA투어 본무대인 미국에서 첫 우승을, 그것도 랭킹 60위 이내 선수들만 출전하는 시즌 최종 왕중왕전인 CME그룹 투어챔피언십 트로피를 품으면서 긴 기다림으로 쌓인 가슴 속 짐을 훌훌 날렸다. 그렇게 기다리던 '고도'가 나타난 것이다.



 



20일(한국시간) 미국 플로리다주 네이플스의 티뷰론GC(파72)에서 열린 대회 최종일 경기에서 6언더파 66타를 쳐 최종 합계 27언더파 261타로 공동 2위 하타오카 나사(일본)와 앨리슨 리(미국)를 3타 차로 제치고 우승한 뒤 양희영 주변에서 벌어진 장면들은 두고두고 LPGA투어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을 만했다.



 



LPGA투어 데뷔 16년 만의 미국 본토에서의 첫 우승이자 마지막 우승(2019년 혼다LPGA 타일랜드) 후 4년 만이다. 통산 5승째. 27언더파는 2년 전 고진영이 우승할 때 기록한 토너먼트 레코드(23언더파)를 4타 나 경신한 신기록이다. 여자골프대회 사상 최대 상금인 우승상금 200만 달러를 차지, 시즌 상금 316만 5834달러(약 41억원)로 상금 랭킹 3위에 올랐다.



 



실수를 모르는 하타오카 나사, 우아한 엘리슨 리와의 숨이 멎는 대결은 올 시즌 LPGA투어의 대미를 장식하기에 충분한 명경기였다. 



더욱 드라마틱한 장면은 양희영이 버디로 우승을 장식한 순간 펼쳐졌다. 챔피언 퍼트를 마치자 김세영 김아림 유해란 김효주 등 한국선수는 물론 하나 그린(호주) 리오나 매과이어(아일랜드) 개비 로페즈(멕시코) 등 외국 선수들이 양희영에게 샴페인 세례로 축하했다. 등장한 샴페인이 10병은 넘는 듯했다. 동시에 홀 주변의 선수들과 갤러리들은 '에이미, 에이미!'를 연호하며 갈채를 보냈다.



 



마지막 홀 주변에서 펼쳐진 이 모든 장면은 늘 미소를 잃지 않는 맏언니 같은 얼굴, 옹이 없는 부드러운 스윙, 아픔을 안으로 삭이며 인내할 줄 아는 품성, 그리고 무엇보다 꿈을 놓지 않는 삶의 자세 등 양희영이 갖춘 많은 미덕에 대한 칭송이었다. 



 



*칼럼니스트 방민준: 서울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했고, 한국일보에 입사해 30여 년간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30대 후반 골프와 조우, 밀림 같은 골프의 무궁무진한 세계를 탐험하며 다양한 골프 책을 집필했다. 그에게 골프와 얽힌 세월은 구도의 길이자 인생을 관통하는 철학을 찾는 항해로 인식된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의견으로 골프한국의 의견과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골프한국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길 원하시는 분은 이메일(news@golfhankook.com)로 문의 바랍니다. / 골프한국 www.golf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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