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랜C까지 준비 ‘세심한 지장’… 초지일관 뛰는 야구 ‘뚝심의 맹장’[Leadership]

정세영 기자 2023. 11. 20.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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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eadership - 29년 만에 LG의 한국시리즈 우승 이끈 염경엽 감독
뛰는 야구 장착해 ‘닥공’ 진화
팀 타율·팀 득점·팀 타점 등
홈런 빼고 모든 공격지표 1위
끝없는 공부·부지런한 메모광
코치진에게 강한 책임감 심어
호통 한번 없이 선수단 장악해

LG 팬들에게 올해 한국시리즈 우승은 매우 각별했다. LG가 한국시리즈에서 마지막으로 우승했던 것은 1994년. 벼르고 벼르던 LG는 마침내 지난 13일 한국시리즈(7전 4선승제) 5차전에서 KT를 시리즈 전적 4승 1패로 따돌리고 대망의 우승 트로피를 들었다. LG의 통산 3번째(1990·1994·2023년) 한국시리즈 우승이다.

29년 만에 LG의 통합 우승을 이끈 염경엽 감독의 이력은 파란만장하다. 현장과 프런트, 해설위원, 한국야구위원회(KBO)를 두루 섭렵했다. 염 감독은 1991년부터 2000년까지 태평양과 현대를 거친 내야수 출신. 이렇다 할 빛을 보지 못한 비주류였다. 선수 은퇴 후 현대 스카우트(2001∼2006년), LG 스카우트(2008년)와 운영팀장(2009년), 수비코치(2011년) 등을 거쳤다. 2012년 넥센(현 키움)으로 이동해 주루·작전 코치를 지낸 뒤 2013년에야 비로소 넥센의 사령탑에 올랐다. 그의 나이 45세. 염 감독은 1군 사령탑으로서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2016년까지 4년 연속 가을야구에 진출하며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넥센을 떠나 2017년부터 2년간 SK(현 SSG) 단장을 맡았고, 2019년부터 2020년까지 SK 1군 사령탑을 지냈다. 이후엔 KBSN스포츠에서 야구해설위원, 야구대표팀 기술위원장도 경험했다. 아픔도 있었다. 염 감독은 2019년 SK의 팀 창단 최다승(88승)을 지휘했으나 그해 두산에 정규리그 1위 자리를 빼앗겼고, 이어진 포스트시즌 플레이오프에선 허무하게 탈락했다. 염 감독은 이듬해엔 성적 스트레스로 경기 도중 쓰러지기도 했다. 오랜 기간 팀을 비울 수밖에 없었고, 계약 기간을 채우지도 못하고 중도 사임했다. 지도자 이력에 치명적인 흠이었다. 그런데 그는 올해 1군 지휘봉을 다시 잡았고 화끈한 반전을 보여주며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염 감독이 지도자로 대성할 수 있었던 비결은 빠른 두뇌 회전이 첫손에 꼽힌다. 야구에선 임기응변이 요구되는 상황이 자주 연출된다. 특히 투수 교체, 대타 기용은 결정적인 승부를 좌우한다. 그래서 교체 타이밍은 감각, 예술의 영역에 비유될 정도다. 염 감독의 별명은 ‘염갈량’이다. 삼국지 최고의 전략가인 제갈량처럼 신출귀몰한 선수 기용과 계책이 풍부하기에 붙여졌다. 실제 염 감독은 지략이 뛰어나고 ‘판’을 읽는 시야가 넓고 정확하다. 그래서 국내 프로야구에서 대표적인 지장(智將)으로 꼽힌다. 올 시즌을 앞두고 LG 새 사령탑에 오른 염 감독은 플랜A는 물론 플랜B, C까지 마련했다.

염 감독의 뛰어난 지략과 만난 LG는 승승장구했다. 장점은 발전시키고 단점을 보완하면서 전력이 한 단계 향상됐다. 무엇보다 올해 LG는 ‘닥공(닥치고 공격) 야구’를 선보였다. 또한 ‘뛰는 야구’를 장착해 기동력까지 갖춘 팀이 됐다. 이처럼 다채로운 전략전술을 LG의 선수들에게 이식하자 엄청난 시너지가 샘솟았다. 올해 LG는 팀 타율과 팀 득점, 팀 타점 등 홈런을 제외한 모든 지표에서 1위에 등극했다.

염 감독은 지략가이지만 동시에 노력형 인재다. 야구에 특화된 두뇌를 타고났지만 끊임없이 공부했다. 한 가지에 꽂히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집중한다. 답을 찾지 못하면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 잠이 부족하고, 식사 시간을 놓치기 일쑤다.

염 감독은 ‘메모광’이다. 밥을 먹다가, 산책하다 떠오른 생각은 반드시 자신이 애용하는 온라인 노트에 잊지 않고 저장한다. 2011년에는 특히 자신 있었던 수비와 주루 부문을 따로 묶어서 책으로 만들기도 했고, 2015년 이후엔 온라인 노트 프로그램을 활용하고 있다.

게다가 부지런하다. 정규 시즌 중 염 감독의 기상 시간은 오전 7시 전후. 커피와 함께 태블릿PC로 전날의 야구 및 국내외 뉴스 등을 점검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이후 간단한 조식을 하고 야구 관련 데이터를 체크한다. 메이저리그 경기를 보면서 당일의 선발라인업과 투수 로테이션, 수비 포메이션 등을 확인한다. 점심 후엔 코치들과 만나 상의하고 다시 방으로 돌아가 경기를 준비한다. 염 감독은 “지금보다 코치 시절엔 더했다”고 말했다. 김경태 LG 투수 코치는 “염 감독의 머릿속에는 항상 야구가 꿈틀거린다”고 귀띔했다.

염 감독은 과감하다. 한번 결심하면 소신을 굽히지 않고, 뚝심 있게 밀어붙인다. ‘뛰는 야구’가 좋은 예다. 올 시즌 개막 후 많이 뛰는 만큼 주루사와 도루사가 많아지자, 팬들은 “그만 좀 뛰었으면 좋겠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하지만 염 감독은 뛰는 야구를 고수했다. ‘누구든 나가면 뛴다’는 인식이 상대 배터리의 실투를 유도했다. 결과는 대단했다. 지난해 LG의 도루는 2위(102개)였는데, 올해는 압도적인 1위(166개)로 올랐다. 10개 구단 중 경기당 평균 도루수(1.15개)가 1개를 넘는 팀은 LG가 유일했다.

염 감독은 개인별 특성에 따른 불펜 구성 및 양적·질적 다양성에도 주력했다. 스프링캠프부터 치열한 경쟁을 통해 한국시리즈 3∼4명의 ‘필승조’ 구성을 늘렸다. 김진성-이정용-정우영-고우석으로 이어지는 기존 필승조 라인업에 함덕주-유영찬-박병근을 더했다. 자원이 풍부해진 불펜진은 불펜 평균자책점 1위에 올랐다. 염 감독은 한국시리즈 2차전에선 선발 최원태가 조기에 무너졌지만, 이후 정규리그에서 만들어 놓은 7명의 투수를 모두 기용해 승리를 낚았다. 염 감독은 옥석을 가리는 데 탁월한 능력을 선보인다. 선수의 장단점을 파악하는 정확한 눈을 지녔기에 판단이 늘 적중했다. 올해 고교 야구를 졸업한 신인 투수 박명근이 대표적인 예다.

선수단에 대한 장악력도 대단하다. 하지만 선수들에게 호통을 치는 일은 없다. 대신 코치들에겐 엄청 깐깐하다. 염 감독은 훈련의 방향을 제시하고, 세부적인 건 참모인 코치들에게 맡긴다. 코치에게 가장 강조하는 덕목은 ‘책임감’이다. 그리고 자신의 야구 철학을 미리 코치진과 공유한다. “감독 밑에 코치가 아니라, 그 분야에서는 감독이라는 생각을 하고 움직여 달라”는 게 평소 지론.

염 감독은 원칙주의자지만, 마음속엔 따스함이 넘친다. 무엇보다 제자 사랑이 유별나다. 질책하는 게 아니라 칭찬하고, 단점보다는 장점을 강조하면서 선수단의 사기를 북돋는다. 시즌 중에도 개별 면담을 통해 격려를 아끼지 않고 고충을 함께 나눈다. 물론 동료를 배려하지 않거나 희생하지 않을 땐 불호령이 떨어진다. 박경완 LG 배터리 코치는 “염 감독님의 리더십은 선수들에게는 본인들의 플레이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려고 하신다. 기본적으로 선수들한테 강한 압박을 주지는 않는다. 선수들 본인에게 맡기는 스타일”이라고 설명했다.

■ ‘마당발’ 염경엽 감독

“여러 사람 도움 받아 이 자리에 서 있으니 이젠 도움 주고 싶어”

휴대전화 연락처 3000명 훌쩍

염경엽 LG 감독 주변엔 늘 사람들로 북적인다. 현역 은퇴 후 선수단을 뒷바라지하는 매니저를 시작으로 프런트, 코치, 감독, 단장, 한국야구위원회(KBO) 기술위원장,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며 수많은 인연을 맺은 덕분이다. 또한 서글서글한 성격에, 넉살 좋고 재치가 있으며, 열린 마음이 모든 사람과 두루두루 친분을 맺을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의 스마트폰에 저장된 인맥만도 3000명이 훌쩍 넘는다.

염 감독은 사람과의 관계를 중요시한다. 염 감독은 사람을 많이 사귀는 게 목표가 아니라 타인과 더불어 사는 삶을 위한 관계를 만드는 데 집중했다. 특히 “손해를 보는 경우가 있더라도 서운해하지 말자”가 염 감독의 평소 지론이다. 염 감독은 “사람들에게 상처받을 때마다 배웠다. 권력과 힘을 가질수록 베풀어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보답을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 내가 좋아해서 해주면 그걸로 끝”이라고 말했다.

마당발이 되려면 부지런함이 필수다. 염 감독은 특별한 대가 없이 주변 친한 사람들에게 밥을 사고, 경조사에 부지런히 참석하면서 인맥을 넓혀 왔다. 한번 맺은 인연은 매우 소중히 여긴다.

비단 인간관계가 야구인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한의사 이경재, 가수 이은미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 친목을 다지고, 야구에서 쌓였던 스트레스를 푼다. 염 감독은 탁월한 말주변으로 늘 유쾌한 분위기를 만든다. 걸쭉하면서도 톡톡 튀는 입담은 사람들을 만날 때 빛을 발했다. 또한, 시도 때도 없이 메모했던 버릇이 인맥 관리에도 도움을 준다. 실제 재미있는 얘기를 들으면 메모해 두고, 다른 사람을 만나면서 메모해둔 이야기를 들려준다.

염 감독은 도움이 필요한 선후배에게는 주저하지 않고 도움의 손길을 건넨다. 특히 주변에 자신과 인연을 맺었던 은퇴한 선수, 후배 코치 등이 소속팀을 구하지 못하면 두 팔을 걷어붙이고 새 일자리를 알아봐 줄 정도다. 염 감독은 “혼자 잘 나가는 인생은 성공한 인생이 아니다. 같이 성공하고 발전해야 진정한 성공이다. 나는 여러 도움을 받아 이 자리에 있다. 그런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정세영 기자 niners@munhwa.com

△염경엽 감독 프로필

나이 : 55

출생 : 광주광역시

학력 : 광주서석초-충장중-광주일고-고려대

이력 : 태평양·현대 선수(1991∼2000년), 현대 스카우트(2001∼2006년), LG 코치(2010∼2011년), 넥센 코치(2012년), 넥센 감독(2013∼2016년), SK 단장(2017∼2018년), SK 감독(2019∼2020년), LG 감독(2023∼현재). 2023년 한국시리즈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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