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키려는 일본, 뚫으려는 한국·중국… 동남아 자동차 전쟁
최근 태국에는 중국 자동차 기업들의 투자 열풍이 불고 있다. 태국 동부 라용에선 중국 전기차 1위인 BYD가 5억달러를 투자해 전기차를 연 15만대 만들 수 있는 공장을 짓고 있다. 지난 8월에는 창안자동차가 2억8500만달러를 투자해 10만대 규모 전기차 공장 건설을 발표했다. 방콕에서는 중국 전기차 스타트업 ‘네타’가 공장을 짓고 있다. 미국·유럽 등의 제재나 견제를 피하기 위해 ‘메이드 인 차이나’ 딱지를 떼어내고 중국 내 경기 침체를 극복하는 대안 마련 차원이다.
태국 자동차 시장 점유율이 80%에 육박하는 일본 차도 맞불을 놓고 있다. 도요타 아시아본부장이 최근 세타 타위신 태국 총리와 만나 태국에 전기차 현지 생산을 위한 투자를 약속했다. 최근 중국에서 완전 철수를 결정한 미쓰비시 자동차는 내년 하이브리드 생산 기지를 태국에 두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한국 현대차그룹도 올해 처음으로 현대차 태국 법인을 설립하고, 기아가 현지 연 15만~20만대 규모 생산·조립 공장을 짓는 방안을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태국에 자동차 기업 투자가 잇따르는 것은 미·중 갈등과 글로벌 공급망 재편을 계기로 시작된 아세안 ‘프렌드쇼어링’(friendshoring) 경쟁의 한 단면이다. 정치색이 옅은 아세안은 그동안 미국이나 중국 어디에도 크게 기울어지지 않은 채 경제적 실리를 추구해왔다. 이런 점 때문에 중국에서 철수한 자동차·전자·건설 등 다양한 분야의 한국·일본 기업은 물론이고, 중국 기업마저 아세안에 생산 시설을 이전하고 ‘경제 동맹’을 맺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인도네시아·필리핀·베트남·태국 등 10국이 모인 아세안은 유망한 신흥 시장이자 생산 기지다. 작년 기준 인구가 6억7944만명에 달하고 주요 국가의 중위 연령이 30대 초중반으로 젊다. 이런 점 때문에 미·중 갈등 속에서 앞으로 중국을 대체하거나 보완할 시장으로 더욱 중요성이 커지고, 중국을 대체할 생산 기지가 될 것이란 전망이다.
◇텃밭 지키는 일본, 도전하는 중국
아세안은 원래 일본 텃밭이었다. 일본은 올해 아세안과 우호 교류 50주년을 맞았다. 일본 기업 약 1만5000곳이 아세안 일대에 현지 법인이나 자회사, 공장 등을 두고 있다. 거기에 탈중국 여파로 코로나 사태 때 잠시 주춤했던 아세안 투자는 최근 확대될 조짐이다. 중국에서 지난 10월부터 감산(減産)에 들어간 도요타는 인도네시아에서는 정반대로 2026년까지 전기차 생산 등에 18억달러에 이르는 대규모 투자를 진행 중이다. 소니는 올해 초 중국에서 생산하던 카메라 생산량의 90%를 태국 등 해외로 이전했고, 2024년에는 태국에 차량용 반도체 공장도 짓는다는 계획이다.
이런 일본의 동남아 아성에 도전하는 게 중국이다. 아세안의 최대 교역국이기도 한 중국은 막대한 자본과 영향력을 앞세워 생산 거점을 빠르게 늘리고 있다. 태국에는 중국 전기차 거점이 잇따라 생겨나고, 인도네시아에서는 중국 1위 배터리 기업 CATL이 60억달러를 투자해 전기차 배터리 공장을 짓고 있다. 캄보디아에서는 중국 국영 기업 컨소시엄이 10억달러를 투자해 만든 시엠레아프 앙코르 국제공항이 12월 문을 연다. 이를 계기로 캄보디아에 철도, 재생 에너지, 가스, 데이터 관리 센터 등 추가 투자도 진행할 방침이다. 작년 스마트폰 기업 오포(OPPO)는 가장 많은 소비자가 있는 인도네시아 현지에 연 2800만대 규모 스마트폰 공장을 만들어 현지 점유율 1위 삼성전자를 추격 중이다.
◇거점 늘리는 현대차·LG·삼성
상대적으로 접점이 적었던 한국 기업들은 그간 베트남에 집중됐던 거점을 확대하면서 아세안 비중을 늘리고 있다. 탈중국을 계기로 신시장을 찾는 현대차그룹이 대표적이다. 현대차가 지난해 15만대 규모 인도네시아 완성차 공장과 10만대 규모 조립 공장을 차례로 가동하는 등 생산 기지를 빠르게 늘려가고 있다. 21일에는 싱가포르에서 최대 연 5만대를 생산하면서 새로운 생산 기술을 시험할 수 있는 글로벌 혁신 센터를 추가로 가동한다. 태국 기아 공장이 확정되면 아세안 네 나라에 거점이 생기는 셈이다. ‘K배터리’도 아세안으로 나아가는 중이다. LG에너지솔루션이 인도네시아에서 현대차와 합작 공장을, 삼성 SDI가 말레이시아에 두 번째 배터리 공장을 짓고 있다.
☞프렌드쇼어링(friendshoring)
친구(friend)와 생산 시설을 구축한다는 의미인 ‘쇼어링(shoring)’을 합친 단어. 동맹이나 우방국에 생산 시설을 옮겨 공급망 충격 등에 대비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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