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한 게으른 천재, 다시 날아오를 채비 갖췄다

안양/이영빈 기자 2023. 11. 20.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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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농구 정관장 센터 이종현
이종현이 13일 안양체육관에서 덩크슛 시범을 보였다. 시즌을 앞두고 9㎏을 감량했다는 그는 “처음 농구공을 잡았을 때 마음으로 뛰고 있다”고 말했다. /남강호 기자

아마추어 때는 누구나 원하던 선수였다. 키 203㎝에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고교 시절부터 서장훈(49·은퇴)-김주성(44·원주 DB 감독)-오세근(36·서울 SK)으로 이어지는 한국 정통 ‘빅맨’ 계보를 이을 선수로 꼽혔다. 고2 때 국가대표에 발탁될 만큼 ‘세기의 재능’ 수준이었다. 1경기 42리바운드를 잡은 경기도 있었다. 그 뒤 10여 년. 빛나던 과거는 이미 바랜 지 오래. 이제 그는 새로운 불꽃을 태우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프로농구 정관장 이종현(29)을 두고 하는 말이다.

지난 13일 안양실내체육관에서 만난 이종현은 “뭘 해도 다 될 것 같았던 시절이었다”고 화려했던 과거를 회상했다. 그는 고려대를 거쳐 2016년 프로농구 신인 드래프트 1순위(울산 현대모비스)로 비상(飛上)을 준비했다. 그러나 프로 데뷔를 앞두고 파워를 기르려고 몸무게를 10㎏가량 무리하게 늘린 게 화근이 됐다. 몸이 버티지 못했다. 데뷔 시즌(2016-2017) 발등 골절로 54경기 중 22경기 밖에 못 뛰었다. 그 뒤 아킬레스건, 슬개골, 십자인대 파열이 차례로 찾아왔다. 첫 4시즌 동안 216경기 중 94경기에 출전했다. 경기당 평균 기록도 9.4점 6.0리바운드. 기대 이하였다. 데뷔 4년 차엔 2경기, 5년 차엔 5경기 출전이 전부였다. 그 뒤 고양 오리온과 전주 KCC 등을 거쳤지만 아마 시절 명성을 되살릴 만한 활약은 보여주지 못했다.

◇'게으른 천재’ 늪에서 허우적

그를 따라 다닌 ‘게으른 천재’란 혹평도 점점 그를 옭아맸다. 대표팀과 울산 현대모비스에서 그를 지도했던 유재학 감독은 “중거리 슛을 연마하라고 했는데 연습을 안 했는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고 했다. 추일승 감독은 “재능이 아깝다”고 고개를 저었다. 이종현은 “부상도 있었지만, 연습에 소홀했던 것도 사실이다. 어릴 때는 운동을 조금 안 해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생각해도 게을렀다”고 말했다. 지난 시즌엔 고양 캐럿과 전주 KCC를 전전하며 39경기 3.7점 2.3리바운드에 그쳤다. 천재의 몰락이었다.

올 시즌을 앞두고 은퇴를 고민했다. 아직 뛰고 싶은 마음은 컸지만, 어떤 팀에서도 계약을 제안받지 못했다. 이종현은 “내가 생각해도 나를 원하는 팀이 없는 게 당연했다”고 했다. 지난여름 용기를 내 김상식 안양 정관장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표팀 소집 때 감독과 선수 사이로 봤을 뿐 개인적으로 연락한 건 처음이었다. 그는 “‘농구를 처음 시작할 때의 마음으로 뛰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고 했다. 정관장 역시 올 시즌을 앞두고 서울 SK로 떠난 오세근 공백을 메울 센터가 필요했다. 김 감독은 기꺼이 그를 받아들였다. 구단 내부에서는 반신반의했다. 이종현이 배수진을 쳤다. “이번 한 시즌만 계약하는 건 어떻겠느냐”고 역제안한 것. 보통 자유 계약 신분이면 2~3시즌 계약을 체결하는데 그는 “한 해 하는 거 보고 계약 기간을 다시 짜자”고 결의를 보였다.

이종현은 “농구를 좋아한다. 그래서 농구를 더 할 수 없을까 봐 막막했는데, 마지막 동아줄을 내려 받은 기분이었다. 믿어준 이종림 단장님, 김상식 감독님, 최승태·조성민 코치님께 너무 감사하다”고 했다. 이종현은 올 시즌을 앞두고 그동안 문제로 지적받은 체중을 9㎏ 줄였다. 좋아하던 라면을 끊는 등 탄수화물을 대폭 줄이고, 땀복을 입으면서 100㎏ 정도의 날씬한 몸을 만들어 무릎 부하를 줄였다. “남들을 이기려는 생각보다는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부딪쳐 보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감량하고 각오 다지며 변신 성공

그러자 올 시즌 달라졌다. 전에는 조금만 뛰어도 쉽게 헐떡였지만 이젠 속공에도 참여할 만큼 몸이 가볍다. 긴 팔을 앞세워 쏠쏠한 수비를 보여주고, 공격에서도 위협적인 몸놀림으로 더블 팀(2명이 막는 것)을 당하기도 한다. 약점으로 평가받던 슛 성공률도 55.4%까지 끌어올렸다. 지난 2일엔 1772일 만에 더블더블(13점 10리바운드)을 달성했다. 13분이란 짧은 시간에 달성한 기록이다. 3년 차였던 2018년 12월 26일 이후 처음이기도 하다.

올 시즌 11경기에 나서 평균 19분 동안 8.5득점 4.5리바운드를 기록 중이다. 3년 차였던 2018-2019시즌(20분 7.9점 6.2리바운드) 이후 가장 긴 출장 시간과 많은 리바운드를 걷어내고 있다. 득점은 2년 차였던 2017-2018시즌(10.5점) 이후 가장 많다. 정관장은 믿음직한 주전 센터를 얻은 덕분에 주축이었던 오세근, 문성곤(30·수원 KT)을 떠나보내고, 외국인 선수 오마리 스펠맨(26·미국)이 부상으로 재활 중인데도 리그 2위(8승 4패)를 달린다. 이종현은 19일에도 부산 KCC전에서 7점 9리바운드와 함께 궂은일에 앞장서며 84대74 승리에 일조했다.

그 극적인 변신의 원동력 중 하나는 가장이 된다는 책임감이다. 내년 6월 백년가약을 맺는 예비 신부에게 믿음직한 남편이 되고 싶었다. 그는 “2020년 만난 뒤 부상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예비 신부가 매일 밤을 지새우면서 병실에서 간호해 줬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내가 어떻게든 다시 농구를 잘해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했다. 그의 목표는 올 시즌 완주. “처음에 비행기를 타고 높이 날아가다가 갑자기 바닥에 떨어진 기분이었어요. 그 이유는 어리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겠죠. 하지만 그 시절을 거치면서 마음이 단단해졌습니다. 올 시즌엔 많은 욕심을 부리지 않으려고요. 부상 없이 완주하는 게 목표입니다. 그게 저를 믿어주신 감독님과 구단 분들, 무엇보다 지금 응원해 주시는 정관장 팬 분들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꼭 목표를 이루겠습니다.”

/안양=이영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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