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품으로 도약한 달항아리와 변기[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동시대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형태라는 점에서, 달항아리는 한국미를 운운하거나 민족 감정에 호소할 만하다. “하늘에 순응하는 민족이 아니고는 낳을 수 없는” 예술품이다. “조선은 공예 왕국이었고, 조선 공예를 대표하는 것은 백자이며, 백자의 제왕은 달항아리라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백자 달항아리는 조선왕조의 상징이며 나아가서는 한국을 대표하는 유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료가 부족해서 확언하기 어렵지만, 연구자들은 대체로 달항아리가 조선시대에 보관 용기로 사용되었다고 본다. 즉 달항아리는 식재료나 액체류를 담던 일상 용기였지 심미적 완상(玩賞) 대상으로서 예술품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면 언제부터 이 달항아리는 심미적 완상 대상이 되었나. 알다시피, 달항아리는 (고려청자에 비해) 저평가되어 오다가 1920년에 이르러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89∼1961) 등 일본인들이 주목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아무런 장식이나 꾸밈없이 덤덤한 색상과 기형(器形)만으로 아름다움을 표출해 낸 조선백자의 조형 의식은 식민지 미술 사관 아래 묻혀 버렸다”는 단언은 적어도 달항아리에 대해서는 적용할 수 없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이렇게 회고한다. “(달항아리를 사들이는 나에게) 조선 물건 따위를 모으는 짓을 하는, 보는 눈이 없는 놈이라고 험담을 했다. 당시 고려자기의 명성은 여전히 높았고, 조선은 말기의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홍기대, ‘우당 홍기대 조선백자와 80년’) 즉 20세기 초만 해도 달항아리의 아름다움을 인지하고 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렇다면 달항아리가 가진 아름다움의 핵심은 무엇인가. 야나기 무네요시의 말대로, 달항아리는 동양사상의 핵심인 무(無)나 공(空)이 구현된 것인가. 혹은 한국의 일부 연구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주역의 태극(太極)이 구현된 것인가. 그러나 달항아리와 같은 백자가 철학적 개념을 구현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화여대 박물관이 소장 중인 철화백자매죽문시형 항아리(17세기)에는 다음과 같은 시구가 적혀 있다. “中虛足容物(속이 비어 있어서 물건을 담을 수 있네).” 교토 국립박물관이 소장 중인 청화백자시명팔각병에는 “宏其量容於物也(용량이 커서 물건을 담네)”라고 적혀 있다. 이로써 미루어 보건대, 그보다 더 단순하고 큰 달항아리의 부피는 철학적 상징으로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많이 담을 수 있는 실용성 때문에 중요하다. 달항아리의 비어 있음은 철학적 비어 있음이 아니라 도구적 비어 있음이다.
도구면 어떤가, 거기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면 되지! 그리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사학자라는 고유섭은 달항아리에서 “무계획의 계획”을 발견하고, “구수한 맛”을 느끼고, 화가 김환기는 도공의 무심(無心)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형태와 빛깔에 감동했다. 실로 달항아리는 고려청자나 동시대 이웃 나라 자기와 비교해서 계획이 없는 듯하고, 거친 듯하고, 그리하여 구수한 듯하다. 그러나 그런 느낌조차도 오늘날의 미감(美感)이다. 달항아리가 유통되던 시대를 살았던 학자 박제가(朴齊家·1750∼1805)는 ‘북학의(北學議)’에서 중국과 일본 자기에 비해 조선 자기가 거칠다고 한탄했다. 그리고 그 거친 면모는 조선의 순박한 마음과 연결되는 게 아니라 거친 마음과 거친 풍속, 거친 일 처리와 관련된다고 비판했다. 그러면 달항아리는 아름답지 않단 말인가? 나 역시 옛 달항아리가 실로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깊이 있는 백자의 살결”이나 “둥근 맛” 같은 데서만 오지 않는다. 달항아리의 아름다움은, 그것이 원래 예술품이 아니라 그저 기능에 충실한 일상 용기였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 거친 일상 용기가 정교함에 질린 감식가의 눈을 자극하고 말았다는 아이러니에서 온다. 그리하여 결국 무엇을 반드시 담아야 하는 노역으로부터 마침내 벗어나 쉬게 된 달항아리의 생애에서 온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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