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1 응원' 중국인 "왜냐고? 페이커잖아!"…승리 환호성, 광화문 흔들었다[르포]
3세트 내내 무표정이던 페이커 이상혁 선수가 입꼬리를 올렸다. 찬 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있던 한 남학생의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그가 못 참겠다는 듯 일어서자 500명가량이 덩달아 돗자리를 밟고 일어났다. 승리를 확정지은 순간, 팬들의 울부짖음이 빌딩에 부딪혀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 메아리쳤다. 해설위원의 음성이 스피커 장비로 터져 나왔지만 목청에 비할 데가 못 됐다.
앞쪽 자리를 차지한 팬들은 인조 잔디 위에 돗자리를 깔고 앉았다. 아예 캠핑 의자를 놓기도 했다. 점심 식사를 걸렀는지 치킨을 포장해 와 먹었다. 자리에 볕이 들자 팬들은 롤 캐릭터 '티모'가 쓴 모자를 본떠 만든 굿즈 모자를 머리에 얹었다. 챙이 넓어 얼굴 주변에 그늘이 생겼다. 응원석 진입을 기다리던 10대 남성은 일행에게 "생각보다 사람 너무 많아서 큰일이야"라며 "그래도 영화관도 맨 앞자리보다 살짝 뒷자리가 더 좋은 거 알지"라고 했다.
중장년층 행인에게는 낯선 광경이었다. 이곳을 지나던 중년 여성은 머니투데이 취재진에 "데모하는 거냐"고 물었다. 한 50대 남성은 진행요원을 붙잡고 "오늘 무슨 날이에요"라고 묻더니 금세 "아. 게임? 페이커 맞죠?"라고 했다.
Z세대에게는 이미 익숙한 축제다. 이날 오전 6시30분, 가장 일찍 광화문광장에 도착해 응원석 앞줄을 차지한 장희종씨(19)는 벌써 7년 차 T1 팬이다. 그가 입은 티셔츠 뒤에는 'FAKER'가 적혀 있었다. 매년 롤드컵을 보면서 침착해지는 법을 배웠다. 그는 "작년에도 준우승을 했다. 설레발은 일부러 떨지 않으려고 한다. 오랜 팬들의 노하우"라면서도 "한국 홈경기에서 롤드컵 우승은 마지막일 것 같아서 간절하다"고 했다.
그의 친구 최지민씨(19)는 올해 대입 재수생이다. 결승전 다음 날 수리 논술 시험을 친다. 응원석에 앉아 경기를 기다리면서도 아이패드를 꺼내 논술 기출문제를 풀었다. 'T1도 올해 결승전 재수생'이라는 말에 그는 "저는 재수가 힘들었는데 T1은 저를 제물로 삼아 쉽게 갔으면 한다"고 말했다. 함께 온 신학과 학생 정문규씨(19)도 "우상숭배를 하면 안 된다고 배웠다"면서도 "오늘은 페이커를 숭배하러 왔다"고 했다.
이날 10명 중 3명꼴로 외국인 팬이 보였다. 오전 8시10분에 입장한 아실(21)은 프랑스에서 왔다. 함께 응원에 나선 외국인 친구 5명과는 한국에 와서 처음 만난 사이다. 혹시 늦을까 아침 식사도 걸렀다. 그가 살면서 본 첫 경기가 프랑스팀과 T1의 경기였는데 그날 T1 팬이 됐다. '페이커가 왜 좋냐'고 묻자 그는 "당연하지 않냐"며 "그는 세계 최고의 선수(world's best player)"라고 했다. 이어 "롤드컵을 월드컵처럼 관람하는 한국 분위기가 쿨하다. 선도적이다"라고 덧붙였다.
이날 오전 8시에 충남 천안 집을 나섰다는 전모군(19)은 "페이커를 영접한 뉴진스가 부럽다"며 "웬만해서는 다 롤을 하니까 롤드컵이 월드컵 같은 느낌이다. 페이커는 메시 이상"이라고 말했다. 최은빈씨(23)도 "페이커도 보고 선수들을 만난 뉴진스가 너무 부럽다"고 했다.
오후 5시55분 첫 번째 세트가 시작됐다. 캐릭터를 고르거나 상대가 고르지 못하도록 하는 밴픽(Bans Picks) 순간, 곳곳에서 "와 잘 골랐다" "첫 판에 세게 나오네"라는 말과 함께 환호성이 이어졌다. "티원! 티원!" 함성이 터져나오자 지나가는 행인들도 연호에 동참했다.
팬들은 한타(작은 전투)에서 제우스 최우제 선수가 죽자 "이러다 망하겠는데"라며 동요했지만 이내 "그래도 제우스니까 괜찮아. 다 계획이 있겠지"라며 위로했다. 1세트 21분, T1이 모든 적을 처치하고 10대5로 격차를 벌리자 서로 모르는 사이인 외국인과 한국인이 덩실덩실 춤을 추더니 서로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억제기까지 부수고 승리를 확정 짓자 다시금 T1을 향한 연호가 터져 나왔다.
2세트도 T1의 승리였다. 경기 시작 후 7분, T1이 선취점을 가져가자 팬들은 "이번에도 이기겠다"며 두 손에 쥔 막대풍선을 부딪쳤다. 저녁 7시가 되자 낮아진 기온에 팬들은 핫팩을 서로 나눠 가지거나 장갑을 꺼내 꼈다. 광화문 광장을 지나치던 서울시티투어버스 2층에 탄 승객은 진귀한 광경을 마주한 듯 카메라로 관중과 전광판을 찍었다.
1세트보다 수월한 경기에 관중은 여유를 갖기 시작했다. 제우스가 활약하자 팬들은 "그래 이대로 집으로 보내자"며 너스레를 떨었다. 중국팀이 반격을 시도했다가 실패했을 땐 "뭐 어쩔건데!"라며 "우리가 좀 너무한가? 중국팀을 생각하니 마음이 안 좋다"고 했다. 경기 막바지 T1이 웨이보의 기지를 파고들며 승리에 가까워지자 팬들은 응원석 곳곳에서 벌떡 일어나 방방 뛰었다.
T1 승리가 확실해진 3세트 말미는 흥분의 도가니. T1이 중국팀 억제기를 부수는 순간 한 돗자리석 남성이 벌떡 일어나자 옆에 있던 팬들도 약속이라도 한 듯 함께 일어나 환호를 지르며 뛰기 시작했다. 화면 속 T1 선수들이 어깨동무를 하자 팬들도 같이 서로를 끌어안고 승리의 기쁨을 나눴다. "페이커! 페이커!"라며 선수 이름을 연호하는 함성이 광화문 광장에서 울려 퍼졌다.
실제 롤드컵 결승전 동시 시청자 수는 매해 증가했다. e스포츠 온라인 시청자 통계 분석 사이트 'e스포츠 차트'에 따르면 이날 결승전은 최대 640만명의 시청자가 동시에 봤다. 이 숫자는 2022년 약 514만명, 2021년 약 401만명, 2020년 388만명을 기록했다.
지난 8월 롤드컵 개막도 전에 판매한 결승전 좌석 1만8000석은 10분 만에 매진됐다. 온라인에서 암표 거래도 성행하고 있다. 8만원부터 24만5000원까지 책정됐던 티켓이 중고 거래 플랫폼에서는 200만원이 넘는 가격에 거래됐다. 두 개 좌석이 붙은 2연석은 18일 두 장을 합쳐 600만원에 팔렸다.
CGV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전국 30여개 극장에서 롤드컵 결승전을 극장에서 생중계했는데 이 티켓 역시 3시간 만에 주요 극장에서 매진, 암표 거래가 나타났다. 정가 2만8000원 티켓이 4만원 넘는 가격에 거래됐다.
김미루 기자 miroo@mt.co.kr 정진솔 기자 pinetree@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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