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권의 손길] 절차에 대한 무시, 국민에 대한 무시

김만권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2023. 11. 19.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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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진 절차를 잘 준수하는지는
권력이 얼마나 국민을 의식하는지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잣대다
우리가 존재감 없는 국민이 된 걸
증명할 단적인 사례는 KBS 사태다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에서 행위와 결정의 공정성을 만드는 핵심은 뭘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절차다. 적합한 절차가 무엇보다 결정의 투명성을 담보하고, 더 나아가 공정성까지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정치철학자 존 롤스는 <정의론>(1971)에서 어떻게 적합한 절차가 공정성까지 만들어낼 수 있는지 간단한 사례를 보여준다.

합리적 이익을 추구하는 여러 사람이 하나의 파이를 나누려고 한다. 이 파이를 나누는 사람 가운데 누구도 내 몫이 남의 몫보다 적기를 바라지 않으며 자신의 몫을 극대화하려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파이를 나눠야 이런 기대를 만족시킬 수 있을까?

롤스는 이 파이를 나누는 사람이 맨 나중에 자기 몫을 선택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파이를 나누는 사람은 자신이 마지막으로 파이를 선택해야 함을 알고 있고, 합리적 이익을 추구하는 다른 사람들이 먼저 큰 몫의 파이를 선택할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에서 파이를 나누는 사람은 자신에게 돌아올 몫을 최대로 만들기 위해 파이를 최대한 똑같이 가르려 할 것이다. 롤스는 이를 두고 ‘순수절차정의’라고 부른다. 이 간단한 방법은 절차만을 확립함으로써 실질적 결과의 공정성을 보장할 수 있음을 간략하고 분명하게 보여준다.

자유롭고 민주적인 정체는 바로 이런 절차의 힘에 가장 의존하는 체제다. 공적인 조직에서 절차를 위반하며 행사하는 권력은 무효가 되거나 최소한 정치적·도덕적 비난에 직면하게 된다. 이런 이유로 이곳에선 절차 그 자체가 힘 있는 자들이 자의적으로 권력을 휘두르는 일을 가로막거나 그 속도를 늦추는 역할을 한다.

이처럼 민주적 절차의 중요성에 대해 길게 쓴 이유는 며칠 사이 KBS에서 벌어진 일 때문이다.

새로운 사장이 임명되고 하루 만인 지난 12일, 일요일 밤부터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조치는 순식간에 권력이 불편해하던 특정 프로그램 폐지 및 중단과 진행자 교체로 이어졌다. 제작진이 반발하고 청취자와 시청자들도 적극 항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우리 방송법 제4조는 누군가 이런 일을 자의적으로 하지 못하도록 방송편성의 자유와 독립을 보장하고 있다. 2항에서는 “누구든지 방송편성에 관해 이 법 또는 다른 법률에 의하지 않고 어떠한 규제·간섭도 할 수 없다”고, 4항에서는 “방송사업자는 방송 프로그램 제작의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하여 취재 및 제작 종사자의 의견을 들어 방송편성 규약을 제정하고 이를 공표해야 한다”고 말이다.

이 4항에 따라 만들어진 KBS 편성 규약의 경우, 제6조 3항에서 “취재 및 제작 책임자는 방송의 적합성 판단 및 수정과 관련하여 실무자와 성실하게 협의하고 설명해야 한다”고, 4항에서는 “취재 및 제작 책임자는 실무자의 취재 및 제작 내용이 자신의 의견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수정하거나 실무자에게 불이익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런 모든 절차와 제한이 지켜지지 않은 것이다. 이에 그치지 않고 심지어 권력 비판적 보도를 불공정 보도로 일방적으로 규정하며 ‘갑자기’ 대국민 사과까지 이뤄져 KBS 기자협회가 비판 성명을 내는 일까지 일어났다. 이 모든 일이 편성 규약 4조 2항에 “방송과 경영의 최고 책임자로서 외부의 부당한 간섭을 배제하고 방송의 독립을 지킬 책무를 진다”고 규정되어 있는 KBS 사장의 주도하에 이뤄졌다. 편성 규약에 따르면, 권력의 개입을 막고 이 모든 절차의 준수를 관리할 임무를 부여받은 이가 가차 없이 절차 그 자체를 다 엎어버린 것이다.

이런 절차 위반 혹은 생략이 너무나 공개적으로 당당히 이뤄지고 있다는 점은 또 다른 의미에서 민주주의에 아주 좋지 않은 신호다. 권력이, 그리고 그 권력에서 이익을 얻는 사람들이 국민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는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모든 민주적 권력은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 정해진 절차를 최소한이나마 지키는 시늉이라도 한다. 이런 맥락으로 볼 때 민주사회에서 정해진 절차를 잘 준수하는지는 권력이 얼마나 국민을 의식하는지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잣대다. 이번 KBS에서 벌어진 일은 현재 우리가 별다른 존재감 없는 국민이 되었음을 볼 수 있는 단적인 사례란 생각이다.

미국시민자유연맹 설립에 이바지했고 24년간 연방대법원 대법관을 지낸 펠릭스 프랑크푸르터는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에서 절차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자유의 역사는 대체로 절차적 안전장치를 준수한 역사였다.”

김만권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김만권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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