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철의 나락 한 알] 팔레스타인을 더 많이 이야기하자
“존재가 저항이다(To exist is to resist).” 2014년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의 베들레헴에 갔다. 예수 탄생 성지라 들렀지만, 지금껏 기억에 남는 건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잿빛 콘크리트 분리장벽과 거기 쓰인 절규의 그라피티다. 1948년 건국 이후 지금까지 팔레스타인 땅 대부분을 무력으로 점령한 이스라엘, 대항 수단이 자신들의 존재뿐인 팔레스타인. 지난달 7일 하마스의 기습 공격을 계기로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사람의 존재마저 지우겠다는 듯, 연일 폭탄을 퍼부었다. 학교, 난민촌, 심지어 병원도 가리지 않는다. 이미 가자지구에서 죽은 사람이 1만명을 넘었고, 그중에서 아이들이 절반에 이른다. 유엔 구호 직원도 100명 넘게 죽었다. 이스라엘은 전쟁범죄를 저지르고, 미국은 공범이다.
지난 6일 아키바 토르 주한 이스라엘 대사가 한국 언론에 하마스의 기습 영상을 공개하고 언론 보도가 불공정하다고 지적했다. 이스라엘뿐 아니라 하마스의 공격도 학살이라는 것이다. 싸울 의사도, 능력도 없는 민간인 학살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하지 않다. 하지만 하마스의 학살이 이스라엘의 학살을 정당화하지도 않는다. 더구나 “이번 하마스의 공격이 아무 일도 없던 상태(vacuum)에서 발생한 게 아니다”라는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의 지적처럼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지난 75년간 ‘나크바(대재앙)’를 겪어왔다. 이번 하마스의 기습도 이스라엘에 의한 팔레스타인 강점의 역사를 빼고는 설명할 수 없다.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스라엘이 막강한 군사력으로 얻은 것도 평화가 아니라 무고한 이들의 피뿐이다. ‘힘에 의한 평화’란 결국 이렇다.
없어지면 좋을 사람은 없다
분리장벽으로 세계 최대의 노천 감옥에 갇혀 이스라엘의 무차별 공격을 받는 가자지역 주민의 현실은 게토에 갇혔던 유대인들을 떠오르게 한다. 홀로코스트의 희생을 내세워 이스라엘 건국을 폭력적으로 밀어붙였던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에서 홀로코스트의 가해자로 변했다. 가자지구는 홀로코스트가 역사의 “일시적 광기”가 아니라 “합리적인 현대사회”의 산물이고 그래서 언제든 재발 가능한 사건이라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진단을 다시 확인해준다.
지난 9일 미국은 가자지구 북부 주민이 남부로 대피하도록 매일 4시간씩의 교전 중지를 이스라엘과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지금 가자지구에서 안전한 곳은 없다. 결국 가자 북부의 주민은 강제로 쫓겨나는 것이다. 합의의 효력도 의문이지만, 그러면 나머지 20시간은 죽여도, 죽어도 괜찮은 시간인가? 이스라엘과 미국 정부에 팔레스타인인은 누구인가? ‘호모 사케르’, 죽여도 되는 사람들인가? 없어져도, 아니 없어지면 좋을 사람들인가? 그런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지난달 27일 유엔 총회에서 요르단이 주도한 즉각적인 휴전 결의안에 압도적 다수인 120개국이 찬성했지만, 한국은 결의안에 하마스 규탄과 인질 석방 요구가 빠졌다는 이유로 기권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국제사회의 연대를 강조하며 “공권력과 군사력에 의한 불법 행위로 (중략) 자유 시민으로서의 존엄한 삶이 유지되지 않는다면 모든 세계 시민이 자유 시민으로서 연대”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나라는 누구와 연대해야 할까? 자기 땅에서 죽어가는 고립무원의 가자지구 사람과 연대하지 않는 것은 이스라엘과 연대하는 것과 같다. 그건 연대가 아니다. 연대는 언제나 약한 쪽, 고통받는 쪽으로 흘러야 한다.
역시 서안지구인 예리코에서 만났던 팔레스타인 아이들이 떠오른다. 예리코의 고대 도시 터를 돌아보고 주차장에 돌아오니, 아이들이 버스 안에서 수줍게 웃으며 손을 흔든다. 내게 하는 인사인지 몰라 애매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려보니 뒤편에 또래 아이들이 탄 버스가 또 있었다. 자기들끼리 하는 인사구나, 쑥스러워 얼른 버스에 타려는데, 아이들이 활짝 웃으며 손을 크게 흔든다. 내게 하는 인사였다. 그 천진한 웃음과 손짓에 잠시 행복해졌다. 하지만 이 아이들 앞에 놓인 미래, 그들 부모의 현재를 생각하니 금세 우울해졌다.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모두, 안녕할까.
또 다른 홀로코스트를 막아야
그때의 기억이 무엇이라도 해보라고 채근하지만, 분리장벽만큼이나 거대한 현실 앞에 서면 어느새 무력감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하지만 가만히 있는 건 체념이고, 체념은 무관심이 된다. “아우슈비츠로 가는 길은 증오로 건설되었지만, 무관심으로 포장되었다.”(이언 커쇼) 무관심을 떨치기 위해서라도 무언가를 하는 것은 의미가 크다. “한국에서 우리에게 관심을 갖고 이해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이야드 바르구티 팔레스타인 인권운동가) 우리가 무관심한 사이 가자지구가 또 다른 홀로코스트의 현장이 되는 것을 막으려면 팔레스타인을 더 많이 이야기하고 더 크게 외쳐야 한다. 팔레스타인에 해방을! 평화를!
조현철 신부·서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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