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인 칼럼] 80년대 ‘중동 붐’ 재판 안되려면
문정인 | 연세대 명예교수
지난 10월 윤석열 대통령이 4박6일간의 중동(사우디아라비아·카타르) 순방을 마치고 돌아왔다. 언론은 “사우디 순방 수주 ‘잭팟’” “제2의 중동 붐 신호탄” 등의 표현으로 대통령의 중동 정상외교를 높게 평가했다. 사우디와 카타르 국빈방문에서 총 63개, 202억달러 규모의 양해각서(MOU)와 계약을 체결했으니 그렇게 부를 만한 성과였다. 그밖에도 사우디와 530만배럴의 원유 공동비축 계약 체결을 비롯하여 방산, 수소 에너지, 디지털 기술, 스마트시티 등 다양한 분야에서 양자 협력을 확대하기로 한 것은 반가운 소식이다.
돌이켜보면 1973년 12월 삼환 엔지니어링의 메카 고속도로 건설 수주를 계기로 시작된 사우디 건설시장 붐은 당시 석유 위기로 허덕이던 한국 경제에 구세주와도 같았다. 벡텔, 빈넬 등 쟁쟁한 미국 건설회사들의 하청업체로 사우디 시장에 진출했던 한국 건설업체들이 5년도 지나지 않아 세계 유수의 원청업체들을 제치고 최다 수주국으로 등극했음은 참으로 놀랄 만한 성취였다. 특히 1977년 9억7천만달러 규모에 달했던 현대건설의 주베일(주바일) 항만공사 수주는 가히 획기적이었다. 중동 건설 붐은 대규모 외환 유입, 인력 송출과 고용 창출, 한국 건설업계의 국제화 등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러나 당시의 중동 붐이 축복만은 아니었다. 1980년대 들어와 사우디 정부의 이른바 ‘사우디제이션’(Saudization) 보호주의 정책, 유가 하락에 따른 사우디의 재정상황 악화와 건설시장 위축, 한국 업체들끼리는 물론 튀르키예(터키) 등 여타 국가 업체들과도 불거진 과당 경쟁 등이 겹치면서 한국 기업 대부분은 철수를 택해야 했다. 주베일 항만공사를 수주한 현대건설도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되면서 사우디 시장에서의 수주가 금지됐고, 이후 이라크 시장으로 다변화를 꾀했지만 전쟁의 와중에 거액의 미수금이 발생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렇듯 사우디 시장은 상황 변화에 따라 블루 오션이 금세 레드 오션으로 바뀔 수 있다.
윤 대통령의 이번 국빈방문 기간에 한국 기업이 사우디 투자부·주택부 등과 체결한 문건은 총 52건으로, 그중 계약이 8건이고 나머지는 양해각서다. 양해각서는 협력의 물꼬를 터주는 효과는 있지만 실제로 이행된다는 보장이 없다. 더욱이 사우디 정부는 같은 과제에 대해 다른 나라 업체들과도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있어 이들과의 경쟁은 피할 수 없다. 네옴시티 프로젝트만 봐도 사우디 정부는 한국 기업으로부터의 투자를 선호하는 반면, 국내 업체들의 목적은 시공 참여에 가깝다. 일본 등 여타 선진국 기업들이 네옴시티 프로젝트 참여에 신중한 이유도 다르지 않다. 사우디에 올인하기 전에 정교하고 신중한 채산성 검토가 선행돼야 한다는 뜻이다.
경제 이외의 변수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사우디는 수니파 이슬람의 종주국이다. 사우디 국왕의 정통성은 통치자라는 정치적 위상뿐만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의 지도자(이맘)’이자 ‘메카·메디나 성지의 수호자’라는 종교적 리더십에서 온다. 사우디 사회에서 이슬람은 그만큼 절대적이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은 어떤가? 경북대에 유학하는 외국 이슬람교도 학생들이 대학교 근처에 모스크를 세우려 하자 일부 현지 주민들은 삶은 돼지머리를 전시하는 등 격렬하게 반대했다. 건립 사업이 적법하다는 법원 판결 이후에도 반대는 이어진다. 중동 국가들 관점에서 보면 종교 차별이자 인권침해가 아닐 수 없다. 홍준표 대구시장까지 나서 이를 비판했지만, 정작 중앙정부는 한 일이 없다. 상대국 종교와 문화에 대한 존중 없이 사우디를 포함한 중동 이슬람 국가들과의 원만한 관계 개선은 어렵다.
자유, 인권, 민주주의를 핵심 기조로 하는 윤석열 정부 ‘가치외교’ 구호의 손익도 따져봐야 할 일이다. 2022년 이코노미스트지의 민주주의 인덱스에 따른 민주국가 순위에서 사우디는 총 167개 국가 중 150위다. 민주주의와 인권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자유에 대한 평가도 다르지 않다. 프리덤하우스는 2023년 사우디아라비아의 자유 지수를 100점 만점에 8점으로 박하게 평가했다. 정부가 가치외교를 소리 높여 강조할수록, 사우디와의 관계 개선에는 악재로 작용할 수 있다. 게다가 그런 행보가 우리 국민과 세계에는 이중잣대로 보이기 십상이다.
‘대한민국 1호 영업사원’ 대통령의 세일즈 외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러나 ‘사우디 건설 시장 잭팟’은 쉽게 터지지 않을 뿐 아니라 빛과 그림자가 병존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당장의 이익에만 주목하는 단타성 거래주의보다는 상호 이해와 존중에 기반한 장기 협력 구도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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