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팝의 혁신을 배우자
[한겨레 프리즘]
[한겨레 프리즘] 이정국 | 문화팀장
“MP3 듣는 사람들 보면 부아가 치밀어올라요!”
2007년, 한 일간지의 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한 유명 댄스 여가수의 매니저가 한 말이다. 기사는 엠피스리 때문에 음반(CD)이 팔리지 않아 가요계가 위기라고 전했다. 가수 이적의 멘트도 이어진다. “결국 시디도 수년 내에 사라질 것이다.”
16년이 지난 지금. 이적의 예측은 틀렸다. 디지털 음원을 듣는다고 기획사들이 성을 내지도 않는다. 써클차트에 따르면 올해 케이팝 음반 판매량은 1억장을 넘길 것으로 예측된다. 지금도 유명 아이돌의 음반은 초동판매량(발매 뒤 1주일 판매량)만 수백만장을 훌쩍 넘긴다. 올해 4월 그룹 세븐틴이 발매한 ‘FML’(에프엠엘)은 620만장을 팔아 치웠다. 요새 시디플레이어가 있는 집이 어딨다고?
지난해 국내 케이팝 시장 규모는 8조원에 이르는데 세계 음반 시장의 30% 정도에 해당한다. 전세계 8천여개의 음반사가 가입한 국제음반산업협회의 ‘글로벌 앨범 세일즈’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 10장 가운데 8장이 케이팝이었다.
망해가는 걸 걱정했던 케이팝의 성공은 이례적이다. 기술 개발로 퇴출됐던 미디어가 부활하는 사례는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엘이디(LED) 텔레비전을 보는 지금 브라운관 텔레비전이 다시 잘 팔리는 꼴이랄까.
이런 성공은 ‘콘텐츠’와 ‘패키징’(포장) 두 가지 측면의 혁신이 가져온 결과물로 분석된다. 우선 콘텐츠 혁신이다. 케이팝 가수들의 음반 크레디트를 보면 가수 외에 한국 사람의 이름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작사, 작곡, 프로듀싱은 물론, 리코딩, 믹싱, 마스터링 같은 기술적 완성까지 대부분 외국에서 이뤄진다.
작곡에는 일렉트로닉댄스뮤직(EDM) 장르가 강세인 북유럽 음악인들이 케이팝에 많이 참여하고 있다. 이는 청취자들에게 기존 가요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신선함을 안겨줬다. 국외 팝 시장에 뺏길 뻔한 수요층을 잡아둔 것이다. 흔히 ‘뽕끼’라 부르는 한국풍의 멜로디가 사라지니, 글로벌 시장에서도 경쟁력이 생겼다.
음향 기술적인 완성도도 몰라보게 달라졌다. 예를 들면 글로벌 스타로 올라선 그룹 뉴진스 앨범의 믹싱은 머라이어 케리의 음반 등으로 그래미상을 3회나 수상한 세계 최고 수준의 엔지니어 필 탄이 참여했다. 소수의 ‘히트 메이커’ 작사·작곡가들이 돌려막고, 어깨너머 도제식으로 교육을 받았던 엔지니어들이 제작에 참여했던 과거와는 질적으로 달라진 것이다.
다음으로 패키징 혁신이다. 음반이 팔리고 있지만, 기획사는 결코 음반을 파는 것이 아니다. 어불성설 같지만 이는 사실이다. 시디는 음반이란 상품의 외형적 성격만을 규정할 뿐이다. 케이팝 앨범 안에는 수십~수백장의 화보와 포카(포토카드)가 들어 있다. 화보뿐만이 아니다, 최근 엠제트(MZ)에게 인기인 ‘다꾸’(다이어리 꾸미기)를 할 수 있는 스티커와, 꾸미는 용도로 쓰는 마스킹테이프를 넣은 앨범도 있다.
음원을 내려받을 수 있는 쿠폰을 주기도 한다. 사자마자 시디를 버린다는 비판이 일자, 이제는 시디 자체를 인테리어 소품처럼 활용할 수 있도록 예쁘게 만든다. 음반이 아닌, 실제로는 아티스트를 소재로 한 굿즈를 파는 것이다. 시디플레이어가 사라진 시대에 시디만을 덜렁 상품으로 내놓으면 어느 소비자가 사겠는가. 여기에 멤버별로 다양한 버전의 앨범을 제작해 한 사람이 여러 장의 앨범을 사도록 유도했다. 아이비케이(IBK)투자증권 보고서를 보면 핵심 팬들은 좋아하는 아티스트를 위해 1인당 매년 52만~104만원을 쓴다고 한다.
이밖에 불법 다운로드를 막기 위해 업계에서 저작권 보호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정책적 뒷받침이 이뤄진 것도 좋은 토양을 만들어줬다. 공짜로 음악 듣는 행위를 점점 어렵게 만든 것이다.
케이팝 혁신을 보면서 레거시 미디어 시장의 위기가 떠오를 수밖에 없다. “포털로 뉴스 보는 사람들 보면 부아가 치밀어올라요”라고 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케이팝에서 배울 점이 많다.
jg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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