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끝별의 소소한 시선] 이오 이오 우는 당나귀가 건네는 말
[정끝별의 소소한 시선]
정끝별 | 시인·이화여대 교수
엉덩이에 낙인이 찍힌 분홍 돼지들이 뒤뚱뒤뚱 도로를 걸어가고 있었다. 싣고 가던 트럭이 넘어지는 바람에 소방대원들의 안내로 도축장까지 걸어가는 뉴스 속 영상을 보면서 영화 ‘당나귀 EO’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이오(EO)는 울음소리를 음차한 당나귀 이름이다. 회갈색의 겨우 당나귀 가까스로 당나귀인 이오는 카산드라와 서커스 공연을 하며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동물보호단체 투쟁에 힘입어 다른 동물들과 풀려나면서 카산드라와도 헤어진다. 이오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경주용 말들의 마구간에서는 짐수레를 끌다 사고를 치고 당나귀 농장은 적응을 하지 못한다. 자신의 생일을 축하해주러 온 카산드라가 떠나자 이오는 이오 이오 울다 카산드라를 뒤쫓듯 우리를 탈출한다. 사냥꾼과 밤과 숲의 위험을 통과해 낯선 도시에서 이오 이오 울다 소방대원에게 끌려가던 중 축구장에서 이오 이오 울었다는 이유로 패배한 팀에게 린치를 당한다.
동물치료소에서 사경을 헤매다 카산드라와의 다정한 시간을 떠올리며 끝내 살아난다. 모피 농장에서 짐수레를 끌다 또 사고를 치고 결국 살라미 공장으로 끌려가는데 컨테이너 운전자가 사고를 당하면서 청년 신부의 눈에 띄어 청년의 고향 집에 오게 된다. 청년의 귀향 사유가 밝혀지고 이오는 또다시 열린 문을 나선다. 거대한 댐을 지나 커다란 소들 사이에 끼어 건물로 따라 들어간다. 그리고 암전 속 둔탁한 소리!
영화 밖처럼 영화 속 인간은 쉴새 없이 동물을 이용하고 학대한다. 동물보호단체와 동물보호정책은 인간의 폭력으로부터 동물을 보호하고 구조하지만, 구조된 동물을 더 큰 위험에 빠뜨리기도 한다. 승패에 죽임을 당하고 죽이기를 서슴지 않는 인간의 전쟁 같은 패싸움과 성(性)과 돈, 종교와 가족을 무너뜨리는 치정의 사랑, 이오는 늘 그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남겨지곤 한다.
이오는 번번이 그렇게 인간들에 휩쓸려 위기에 처한다. 인간은 그 위기에서 이오를 구해주기도 하지만 이오의 입에 채워진 고삐를 풀어주지는 않는다. 그러함에도 이오의 유일한 위로는 카산드라와의 교감을 추억하는 일이다. 인간들 속 이오는 신 혹은 세계에 던져진 인간과 구별되지 않고, 인간은 동물의 다른 이름인 짐승과 구별되지 않는다.
노년의 거장 감독은 이 아이러니한 인간 삶의 단면을 애틋한 감상이나 묵직한 교훈, 따듯한 휴머니티의 강요 없이 이오의 시선으로 보여준다. 이오의 눈에 비친 세상은 위태롭게 잔혹하고 환상적이고 장엄한 영상으로 포착된다. 또한 이오가 내는 숨소리 씹는 소리 울음소리 걸음 소리, 이오가 듣는 바람 소리 물소리 들이 인간의 말을 대신한다. 인간이 아닌 당나귀-되기를 통해 당나귀의 감각에 닿으려는 감독의 노력일 것이다.
“네 모든 꿈이 이뤄지길 바래. 행복해야 해.” 카산드라가 이오의 생일을 축하하며 건넨 말이다. 이오의 꿈과 행복은 무엇이었을까. 이오의 여정은 그 꿈과 행복을 찾아가는 도전과 모험이었을까, 실패와 절망이었을까. “나랑 같이 갈래? 나는 너를 구하는 걸까, 훔치는 걸까?” 청년 신부가 이오에게 건넨 말이다. 이오의 우연한 운명들은 구원이었을까, 도둑맞은 것이었을까. 또 도살장을 향해가는 이오의 종착지는 이오에게 선택이었을까 강요된 폭력이었을까.
당나귀 시인 프랑시스 잠은 이렇게 기도했다. “주여, 당신은 사람들 가운데로 나를 부르셨습니다. 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는 괴로워하고 사랑하나이다. (…) 나는 지금 장난꾸러기들의 조롱을 받으며 고개를 숙이는, 무거운 짐을 진 당나귀처럼 길을 가고 있습니다.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당신이 원하시는 곳으로 나는 가겠나이다.”(‘새벽의 삼종에서 저녁의 삼종까지’ 서문). ‘EO’가 ‘나’를 뜻하는 이탈리아어 ‘IO’ 발음과 비슷하다니, 시인의 기도는 ‘이오는 나이고 또 우리’라는 감독의 메시지이기도 할 것이다.
“환경과 동물권 문제에 대한 날카롭고 진중한 메시지를 던진다”라는 엔딩크레딧에 기댄 희망 사항 하나. 실험실 철창에 갇혀 죽어가는 실험동물들, 겹겹의 뜬장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는 개 농장의 식용견들과 임신-출산을 반복하는 번식견들, 사고 팔리고 버림받고 학대당하는 반려동물들과 살처분당하는 가축들을 기억한다. 방금, 개 식용 종식을 위한 특별법안이 연내에 통과될 것이라는 속보가 떴다. 반가운 소식이다. 계류 중인 동물 비물건화 민법개정안의 조속한 통과는 물론 동물권을 보호하는 더 많은 법안의 발의 및 입법화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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