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도 돌보지 못하면서"… 극단 선택 뒤에 남겨진 자의 고통

박민기 기자(mkp@mk.co.kr) 2023. 11. 19.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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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ECD 1위 자살률 대한민국
하루 36명 세상과 인연 끊어
"죽게한 죄인" "정신적 문제"
유족에 대한 사회 인식 냉혹
1명 죽음으로 5~10명 고통
"사회 공동 책임으로 풀어야"

김철수 씨(55·가명) 가족은 2021년 8월을 결코 잊지 못한다. 당시 아내와 아들 건우 씨(28·가명), 딸 해린 씨(가명·당시 23세)와 함께 온 가족이 드라이브를 마치고 돌아온 오후 5시쯤 갑자기 베란다에서 '악'하는 비명이 들렸다. 김씨는 다급하게 뛰쳐나갔지만 상황을 돌이키기에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건우 씨가 보는 앞에서 해린 씨는 아파트 8층에서 뛰어내렸다.

김씨 가족의 일상은 하루아침에 지옥으로 변했다.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슬픔과 분노가 번갈아 찾아왔다. '가족들이 얼마나 신경을 안 썼으면 애가 그랬겠어'라는 수군거림은 김씨 가족을 죄인으로 만들었다.

가족의 자살로 고통받는 유족의 상처 치유를 위해 1999년 만들어진 '세계 자살 유족의 날'이 이달 18일 24주년을 맞았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유족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차갑기만 하다. 2016년 10월 아들 이한빛 씨(당시 27세)를 떠나보낸 김혜영 씨(65)도 처음에는 '고립'을 택했다고 한다.

사망 직전 한 방송사 조연출로 근무했던 한빛 씨는 열악한 근무환경을 개선하려다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교사였던 김씨 부부를 향한 사회의 시선은 한층 더 싸늘했다. "자기 아이 하나 제대로 돌보지 못하면서 무슨 교사를 하느냐"는 수군거림이 들렸다. 아들의 죽음 후 김씨는 지인은 물론 친척들과도 관계를 끊었다.

다른 유족들도 비슷한 상황을 겪으며 고통을 더 깊숙이 숨긴다. 한국 사회가 자살에 이토록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이유는 자살을 '정신력 문제'로 보기 때문이다. 우울증 등 정신질환은 치료 없이 의지로도 얼마든지 고칠 수 있다고 몰아세우는 분위기도 한몫했다. 일부 조문객은 자살 사실을 알리면 "귀신이 붙는다"거나 "재수가 없다"는 등 험담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가족이나 가까운 친척 중에서 자살한 이가 있어도 질병으로 사망했다고 아는 경우마저 있다. 한마음한몸운동본부 자살예방센터 유족 담당 예수성심전교수녀회 소속 유명옥 수녀는 "자살한 시아버지 장례식에 참석한 며느리가 사망 원인을 심장마비로 아는 경우도 있었다"며 "며느리가 주변인들에게 따가운 시선을 받을까 염려해 숨긴 것"이라고 했다.

혜영 씨는 5년간의 긴 고립 생활을 마치고 용기를 내 세상에 나왔다. 한국 사회에서 자살 유족에 대한 인식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아들 한빛 씨와 모든 자살 유족을 위해 그는 다른 유족들도 밖으로 나올 것을 독려했다.

혜영 씨는 "죽은 가족이 살아 돌아올 수는 없지만 세상과 소통하고 다른 유족들과 함께하면서 스스로 마음을 정리하는 '애도의 과정'을 거칠 수 있기 때문"이라며 "자살 유족을 기피나 혐오의 대상이 아닌 사회의 일원으로 봐 달라. 우리는 죄인이 아닌 유족들"이라고 말했다.

한국은 '자살공화국'이란 오명을 좀처럼 씻지 못하고 있다. 한국의 자살률은 인구 10만명당 23.6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11.1명)을 크게 웃도는 압도적 1위다. 보건복지부와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이 올해 6월 발간한 '2023 자살예방백서'에 따르면 2021년 한국 자살자 수는 1만3352명으로 전년 대비 157명(1.2%) 증가했다. 하루 평균 36.6명이 자살한 셈이다. 연령대별로는 80세 이상이 61.3명으로 가장 많았지만 최근에는 젊은 층의 자살도 급증하는 추세다. 우리나라 청소년 자살률은 인구 10만명당 11.7명으로 OECD 평균 6.4명보다 1.8배 높다.

세계보건기구에서는 1명이 자살하면 최소 5명에서 최대 10명의 유족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고 보고 있다. 이를 감안하면 지난해에만 가족의 자살로 인해 고통 속에 살아가게 된 유족이 최소 6만4530명에서 최대 12만9060명에 이르는 것이다.

유명옥 수녀는 "자살 유족은 자칫 그 뒤를 따를 만큼 매우 큰 심적 고통을 느끼고 가족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도 갖고 살아간다"며 "자살은 그 가족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모두가 인식하고 사회가 공동 책임을 느껴야 자살 유족에 대한 인식이 개선될 수 있다"고 말했다.

[박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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