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과 판소리로 표현한 이순신의 난중일기

조용신 뮤지컬 평론가 2023. 11. 19.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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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 소재로 한 기존 소설·영화·드라마와 차별화한 창작가무극 《순신》

(시사저널=조용신 뮤지컬 평론가)

《난중일기(亂中日記)》는 한국인에게 가장 존경받는 위인으로 꼽히는 이순신 장군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2년 일으킨 임진왜란에서 수군 총사령관(삼도수군통제사)을 역임하며 겪은 이야기를 친필로 기술한 진중일기(陣中日記)다. 1592년 1월 임진왜란 발발 시점부터 1598년 11월 서거 직전인 노량해전까지 총 7책205장의 방대한 필사본으로 이뤄져 있다. 내용은 매일 계속된 교전 상황은 물론이고 서민들의 생활상과 개인적 소희까지 담았고, 특히 장군이 간밤에 꾼 꿈 이야기도 자주 등장한다.

ⓒ서울예술단 제공

이지나·이자람·김문정 등 스타 창작자 대거 합류

사실 이순신을 소재로 한 소설이나 영화, TV 드라마는 그간 적지 않게 나왔다. 이 중에서 강인한 영웅의 모습과 함께 일기 속에서 볼 수 있는 고뇌하는 인간적인 모습까지 잘 드러난 작품으로는 2001년 소설가 김훈이 발표한 역사소설 《칼의 노래》를 꼽을 수 있다. 2004년 TV 드라마로 제작돼 큰 인기를 얻었던 《불멸의 이순신》의 공동원작이기도 하다. 2024년에는 소설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뮤지컬이 초연을 가질 예정이다.

현재 서울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에서는 독특한 분위기의 이순신 소재 공연이 열리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종합공연예술단체로서 1986년 창단 이래 한국적인 가무극을 꾸준히 제작하고 있는 (재)서울예술단(단장·예술감독 이유리)의 창작가무극 신작 《순신》이다. 전통 소재 한국적인 뮤지컬의 대표작인 《바람의 나라》 《서편제》 《잃어버린 얼굴》의 이지나 연출가를 비롯해 작창(作唱)·공동대본의 이자람, 작곡 김문정 등 스타 창작자들의 이름이 눈에 띈다.

내년 초연을 앞둔 뮤지컬 《칼의 노래》는 《명성황후》 《영웅》 등을 제작한 에이콤의 신작이니만큼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위인 캐릭터가 중심이 되는 전통적인 뮤지컬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반면 《순신》은 장르와 형식에서부터 차별점이 있다. 이 작품은 '가무극'이라는 수식어로 뮤지컬 스타일의 연기와 노래, 주인공 캐릭터를 표현하는 무용, 작창 판소리가 이끄는 복합적인 해설, 현대적인 감각으로 편곡된 서구식 시어터 장르 음악 등이 모던한 무대미술과 함께 종합적으로 어우러지는 총체극임을 천명하고 있다.

소설 《칼의 노래》가 이순신의 커다란 인생사를 1인칭으로 서술했다면 《순신》은 《난중일기》에 기록된 이순신의 행적과 꿈 이야기를 모티브로 오히려 그 주변 인물들에 의해 이순신의 생애와 전쟁의 주요 순간들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창작진이 포커스를 두는 부분도 인생사의 나열이 아니라 그가 '초인적으로 이겨낸 극한의 고통' 그 자체다. 이를 위해 이순신 역할을 맡은 무용수 형남희는 극도로 절제된 난중일기 내레이션과 함께 8개의 테마 장면으로 재구성된 여러 꿈을 큰 키를 활용한 수려한 춤 언어로 치환해 이순신의 내면을 표현한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를 연상시키는 5명의 무용수는 이순신의 분신이자 상황을 관조하며 비평하는 이중적 정체성을 지닌 코러스로 그의 심리를 대사, 노래, 움직임 등으로 통합해 객석에 전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이순신은 외부의 적인 왜구와도 힘든 전쟁을 해야 했지만 내부에서도 최고권력자 선조를 비롯해 조정 대신들의 모함과 시기에 시달려야 했다. 무엇보다 계속되는 전쟁 속에서 자신의 수족과도 같은 조선의 수군 부하들이 속절없이 희생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극한의 고통을 견뎌야만 했다. 이러한 이순신의 상황은 죽은 원귀(寃鬼)들의 환영 사이에서 고통스러운 몸짓으로 고뇌하고 때론 격렬함이 공존하는 인상적인 춤으로 보여진다.

이 작품의 가장 특별한 구성은 임진왜란의 발발부터 주요 해전인 '한산' '명량' '노량' 장면을 스펙터클한 무대장치 대신 소리꾼 이자람이 작창한 전통적인 판소리로 담아냈다는 점이다. 판소리는 모든 스토리텔링이 그 안에 다 들어있기에 무대에서 고수와 함께 전쟁을 해설하는 것만으로 관객들에게 그 전쟁 상황을 정보와 정서 양면에서 모두 생생하게 전달하는 힘과 효율성을 모두 갖추고 있다. 특히 무대 전면에서 객석 바로 앞까지 접근해 벌이는 판소리가 펼쳐지고 동시에 후면에서 무용수들이 치열한 해전을 칼싸움으로 표현하는 군무가 어우러지는 명량대첩 장면에서는 대극장 퍼포먼스와 결합된 특별한 판소리를 체험할 수 있다.

무용가가 맡은 '말하지 않고 춤추는 이순신'과 그의 너머로 큰 존재감을 드러내는 '판소리 해설하는 무인(巫人)'(이자람, 윤제원 더블캐스팅)이 이 작품의 기본적인 두 축을 담당하고 있다면, 주변 캐릭터들은 좀 더 구체적인 대사와 가사가 있는 노래로 구성된 뮤지컬 장면들을 이끈다.

ⓒ서울예술단 제공

위인의 의미 있는 죽음이 주는 깊은 울림

선명한 악역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왜구들은 화려하게 과장된 의상과 분장을 통해 우화 캐릭터로 등장한다. 왕권 집착에 매몰된 나머지 정세에 대한 상황 판단력의 부재로 이순신을 내치는 선조와 그에 부하뇌동하는 간신들은 무지몽매한 시대의 비극적 인물들로 보여진다. 특히 이순신을 천거한 충신 류성룡과 이순신의 모친, 막내아들 이면과 그의 연인 하연의 이야기는 거의 솔로곡과 듀엣곡 등으로 표현된 뮤지컬 장면으로 이뤄져 있다. 다만 이러한 뮤지컬 구간들은 대사에서 노래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뮤지컬 양식을 취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역동성이 크고 속도감이 느껴지는 무용이나 판소리 장면에 비해 서사의 전개가 느리게 느껴지는 점은 한 작품 안에서 장르가 혼합 나열된 가무극의 약한 고리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마무리를 장식하는 이순신의 최후 해전인 '노량' 장면은 판소리와 뮤지컬의 한국적인 만남이라고 할 수 있는 연출이다. 판소리의 창 서사와 이순신의 춤 서사가 교차하며 무인이 홀로 부르는 애달픈 노랫소리는 이순신의 영원불멸의 정신과 궤를 함께하는 잔잔한 마무리다.

극의 제목이 '이순신'이 아니라 '순신(舜臣)'인 이유는 모친의 대사에서 볼 수 있다. 혼탁한 정세와 시국 속에서 백척간두에 서있는 이 나라 민중을 위해 고통과 시련을 딛고 그에게 충신으로서의 소명을 다하도록 신신당부한다. 그는 세상을 떠난 지 수백 년이 지났지만 우리 모두 그를 기억하는 이유도 의미 있는 죽음이 주는 울림이 여기까지 전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공연은 서울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에서 11월26일까지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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