웜비어 가족은 받았는데 왜? [편집인의 원픽]

2023. 11. 19.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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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깔린 많은 종이들 가운데 하나를 탁 집어 책상 위에 올려놓는 일. 흔히 언론의 역할로 불리는 어젠다 세팅(Agenda Setting·의제 설정)이 그와 같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에는 수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진다. 그 중에 뉴스 소비자들에게 의미 있는 이야기가 뭘까. 고민과 취재를 거쳐 우리가 내놓는 기사(어젠다)는 독자에 말을 거는 일이다. 뉴스 수명이 갈수록 빨라지는 요즘, 조금이라도 더 많은 독자들과 나누고 싶은 세계일보만의 기사를 소개한다.
북한은 미국인 대학생 오토 웜비어를 ‘국가전복 음모‘ 혐의로 억류해 15년 노동교화형을 선고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5일간의 단체 북한 관광을 떠나기 전, 버지니아 대학 3학년이던 오토 웜비어는 건강하고 큰 꿈을 꾸는 영리하고 사교적인 학생이었지만 북한이 미국 정부 관리들에게 그를 넘겼을 때는 앞을 못 보고 귀가 먹고 뇌사 상태였다. 북한의 과거 가혹행위 사례, 가족과 전문가들의 의견, 주치의들의 소견 등을 종합해볼 때 북한은 웜비어를 인질로 잡고 야만적인 방식으로 고문해 허위 자백을 하게 했으며, 사망에 이르게 했다.” 
2018년 12월 미국 워싱턴DC 연방지방법원 베릴 하월 판사가 내놓은 판결문의 일부다. 하월 판사는 이를 근거로 “북한은 웜비어 부모 등 유가족에게 5억113만달러(약 6511억원)를 배상하라”고 판시했다. 웜비어 유족이 요구한 배상금 11억달러(1조4200억원)의 절반 가량에 해당되는 액수다. 이후 북한 자산에 대한 웜비어 유가족의 추적이 시작됐다. 최근에는 미국 은행에 동결돼있던 북한 자금 220만달러(약 28억원)을 회수한 것으로 확인됐다. ‘韓은 못 받는데...웜비어 유족, 北 동결 28억원 회수’(11월16일자·홍주형 기자) 기사는 웜비어 가족처럼 북한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 이겼으나 배상금을 받지못하는 강제납북자, 국군포로 유족 등의 실태를 지적했다.
17개월 동안 북한에 억류돼 있다가 혼수상태에 빠진 오토 웜비어가 2017년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의 렁킨공항에서 공항 요원들에 의해 비행기에서 내려지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4월 ‘탈북 국군포로 5인의 북한 상대 손해배상 2차 소송 첫 재판 관련 기자회견’에서 원고인 김성태씨가 발언하고 있다. 김씨는 이 재판에서 승소했지만 지난 11월1일 별세했다. 연합뉴스
◆북측 자산 보유한 ‘경문협’과 소송전

지난 1일 국군 포로 김성태씨가 북한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승소한 지 반년 만에 별세했다.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북한에 끌려가 강제 노역에 시달렸던 김씨는 지난 2020년 다른 국군 포로들과 함께 북한과 김정은 위원장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고, 32개월만인 지난 5월 승소했다. 서울중앙지법은 북한이 원고들에게 각 50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시했다. 당시 김씨는 “오늘같이 기쁘고 뜻깊은 날을 위해 조국에 돌아왔지만, 부모님과 형제들은 모두 세상을 떠나 보지 못했다. 앞으로도 죽는 날까지 대한민국을 위해 싸우다 죽겠다”고 했다. 하지만 김씨는 끝내 배상을 받지 못했다. 김씨 뿐 아니라 앞서 북한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승소한 강제 납북자, 국군포로 유족들도 마찬가지다.

현재 원고들은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경문협) 자금에 대한 추심 소송을 진행 중이다. 2004년 만들어진 경문협은 북한에서 저작권을 위임받아 국내 언론사나 출판사가 북한 저작물을 사용하고 낸 저작권료를 받아 관리하는 단체로,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이사장으로 있다. 2005년부터 북측에 저작권료를 보내다가 2008년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씨 피살 후 북측으로의 송금을 중단해 이 자금이 매년 법원에 공탁된다. 올 8월까지 28억5300만원이 공탁돼있다. 사실상 유일한 남한 내 북한 자산이다. 경문협측은 법원에 공탁한 돈이 북한 정부가 아니라 북한에 있는 저작권자 소유이기 때문에 배상금으로 쓸 수 없다는 입장이다. 법원도 1,2심 모두 경문협측 손을 들어줬다. 공탁금을 북한 당국 소유로 단정할만한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오토 웜비어 부모인 프레드 웜비어(오른쪽)와 신디 웜비어가 2019년 11월 서울 중구 코리아나호텔에서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주최로 열린 ‘납북·억류 피해자 공동 기자회견’에서 기자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웜비어 유족이 자금 추적전을 펴는 이유 

“우리의 임무는 북한이 책임을 지도록 전 세계에 있는 북한의 자산을 찾아 확보하는 것이다.”

오토 웜비어의 아버지 프레드 웜비어가 지난 2019년 11월 방한해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가 주최한 기자회견에서 밝힌 내용이다. 그는 “북한이 살아가는 방법은 외부에서 돈을 버는 것이다. 세계 곳곳에서 법을 어기고 있지만 어떤 제재도 받지 않고 있다”며 “북한을 법적으로 압박하면 그들의 행동 변화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웜비어 유족은 독일 베를린의 북한 대사관 부지 내 운영중이던 호스텔에 대해서도 소송을 제기해 독일 법원으로부터 영업 중단 판결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이들 노력만으로 배상금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19년 미국 의회에서 이른바 ‘오토 웜비어 북핵 제재 강화법’을 통과시켜 북한이 거래한 다른 나라(제3국) 금융 자산에 대해서도 피해자들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웜비어 가족은 최근에 회수한 뉴욕멜론은행에 예치된 자금 뿐 아니라 웰스파고, JP모건체이스 등 다른 금융기관에 예치된 북측 동결 자금도 찾아내겠다는 입장이다. 웜비어 가족이 미국 금융권을 장악하고 있는 유대인 인맥이어서 이런 자금 추적이 가능하다는 얘기도 나온다.
2020년 6월 조선중앙TV가 공개한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영상. 통일부는 연락사무소 폭파의 손해배상청구권 소멸시효(3년)를 중단하고 국가 채권을 보전하기 위해 북한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장을 지난 16일 서울중앙지법에 제출했다고 밝혔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웜비어 사례는 잘못된 북한 행동에 실질적으로 책임을 묻기 위해서는 관련 법도 중요하지만 “반드시 책임을 묻겠다”는 당사자들의 의지 또한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피해 당사자들의 끈질긴 노력과 호소가 여론을 움직이고, 여론이 관련 법을 만들고, 법과 여론은 북한의 범법 행위나 반인권 행태를 단죄할 수 있다. 프레드 웜비어는 당시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북한의 선박 압류 사건에서 승소를 해서 보상을 받았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일을 해야 한다. 계속 하다보면 북한의 태도가 변할 것이다.”
P.S. 취재한 홍주형 기자에게 물었습니다. 
 
-웜비어 유족처럼 북한을 상대로 승소한 강제납북자, 국군포로 등이 배상을 받을 방법은 없나.
 
“2019년 미국 의회에서 통과된 ‘오토 웜비어 북핵 제재 강화법’은 제3자 제재(세컨더리 보이콧) 대상 자금에도 피해자들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도록 했는데 웜비어 유족은 아들 이름을 딴 법의 첫 수혜자가 됐다. 세컨더리 보이콧을 주도하고 제 3자 자산을 동결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 등 세계 금융에 영향력이 큰 나라다. 현재 국내 법원 관할권이 미치는 거의 유일한 북한 자산은 경문협이 2008년 이후 북한에 보내지 않고 공탁하고 있는 북한 저작물에 대한 저작권료다. 승소한 강제납북자들이 이를 받기 위한 추심 소송 3건이 진행 중이다.”
 
-‘경문협’이 배상금 추심에 반대하는 근거는.
 
“가장 빨리 진행되고 있는 전시납북자 소송의 경우 2심도 기각된 뒤 상고심이 진행중이다. 항소심은 경문협이 북한 저작물 사용료를 국내 이용자에게 받아 북한에 주기로 합의했다고 볼 증거가 없다는 경문협 주장을 받아들였다. 2004년 경문협이 만들어질 당시 합의서에는 북측이 남측에서의 저작물 사용에 대한 포괄적인 협상 권한을 경문협에 위임한다는 내용만 짧게 들어가 있다. 따라서 경문협이 관리하고 있는 북한 저작물 사용료는 북한 자산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원고들은 북한과 경문협 사이 계약이 없었으면 어떻게 2008년 전까지는 저작물 사용료가 경문협을 통해 북한으로 갈 수 있었겠느냐고 말한다.”
 
-최근 통일부에서 11년만에 납북자대책위 회의를 열었는데 납북자 배상 문제를 공론화할 가능성은.
 
“김영호 통일부 장관은 최근 6·25 납북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보상 문제가 하루라도 빨리 해결될 수 있도록 통일부 차원의 노력과 지원도 열심히 해나가겠다고 밝혔다. 피해자 가족들이 배상을 꾸준히 요구해온 만큼 공론화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통일부는 피해자들과 긴밀히 협의해 나간다는 입장이지만 실질적인 배상·보상은 국회에서 관련 법이 통과돼야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다. 다만 경문협 추심 소송건은 사법부 판단이 필요한 것이어서 정부가 나설 여지는 없어 보인다.”
 
<관련기사>
 
韓은 못 받는데… 웜비어 유족, 北동결 28억원 회수
https://www.segye.com/newsView/20231115521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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