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人] ㊺ 처벌 대신 교화…소년범에 '예술 치유'하는 엄혁용 교수
"잘못 때문에 희망 품지 못하는 청소년들 예술로 변화해"
[※ 편집자 주 = 학령인구 감소로 인해 지방 대학들은 존폐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대학들은 학과 통폐합, 산학협력, 연구 특성화 등으로 위기에 맞서고 있습니다. 위기 속에서도 지방대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대학 구성원들을 캠퍼스에서 종종 만나곤 합니다. 연합뉴스는 도내 대학들과 함께 훌륭한 연구와 성과를 보여준 교수와 연구자, 또 학생들을 매주 한 차례씩 소개하려고 합니다.]
(전주=연합뉴스) 나보배 기자 = "20년 후의 저한테 하고 싶은 말이요? 사고 치지 말라고. 나쁜 쪽으로 가지 말라고 하고 싶어요."
얇은 천 위로 드리운 검은 그림자. 음성을 변조한 목소리는 자신의 과오를 담담하게 털어놓기도,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을 멋쩍은 듯 짤막하게 말해보기도 한다.
작품명은 '속마음을 나누는 그림자 인터뷰'. 전북대학교 미술학과 엄혁용 교수가 전주지검, 청소년범죄예방위원회와 함께 운영하는 '아트테라피'에 참여한 소년범들의 자기 고백이다.
엄 교수는 지난해부터 아트테라피를 이끌고 있다. 조건부 기소유예를 받은 청소년들이 미술 치료를 통해 자기 잘못을 인식하고 동시에 스스로 돌아볼 수 있도록 하는 맞춤형 예술 교육이다.
기수당 10∼15명의 소년범은 일주일에 한 번, 2시간 30분씩 전북대 예술대학으로 와서 미술 전공자들에게 교육받는다.
어떤 날은 큼지막한 섬유에 살면서 가장 후회가 되었던 순간을 적은 뒤 힘껏 찢으며 나쁜 기억을 도려내고, 또 다른 날은 석고를 채워 만든 풍선을 주무르며 자신과 주변인들의 연약한 마음에 대해 새롭게 인지해본다.
부정적인 말·상처 된 기억과 감정을 적은 컵을 깨뜨렸다가 다시 이어 붙이기도 한다. 과오가 훗날 자기 발목을 잡을지도 모르지만 두려워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자는 의미다.
엄 교수는 "예술로 분노를 표출하면서 청소년들은 생각과 감정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과거를 직면하면서 심리적인 안정감을 갖게 된다"며 "아트테라피는 잘못은 했지만, 어쩌면 그 잘못 때문에 희망을 품지 못하고 있을 청소년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설명했다.
거창해 보이는 맞춤형 예술 교육이지만 시작은 간단했다.
김동원 전 전북대 총장이 문홍성 전 전주지검장과 식사하던 중 소년범 조건부 기소유예 제도와 미술 접목을 논의했고, 미술 치유에 관심이 많던 엄 교수에게 이 일을 맡아달라고 제안했다.
조형미술 박사이자 조각가인 엄 교수는 당시 국립예술치료센터 건립에 열중이었다.
비록 이 사업은 좌초됐지만, 당시 시각예술과 공연·숲과 예술치료를 융합한 교육의 장을 만들면 졸업생 일자리 창출은 물론 지역주민들의 문화예술 향유 기회를 크게 늘릴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엄 교수는 "아트테라피는 오랫동안 품어왔던 이 포부의 연장선에 있었다"며 "별다른 고민 없이 교육을 맡았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아트테라피에 참여하는 소년범들은 대부분 절도나 폭행을 저질렀다.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시동이 켜진 오토바이를 훔쳐 도주하거나 화장품을 훔치다 걸려 검찰의 처분을 받았다.
교육을 수료하지 못할 경우 불이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청소년들은 아트테라피 수업에 끌려오다시피 앉아있곤 했다.
초기 수업에는 크게 집중하지 못하고 산만한 태도를 보이지만, 석 달 뒤 교육을 마칠 때면 눈빛이 달라져 있다고 엄 교수는 전했다.
이 과정을 수료한 청소년들은 '두 번 다시 볼 일은 없어야겠지만 (지도 강사를) 길에서라도 봤으면 좋겠습니다. 경험해 본 적 없던 일을 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거나, '솔직히 처음에는 귀찮고 싫었지만, 하다 보니 새로운 경험도 하고 재미있었다'며 감사 인사를 남겼다.
'깨진 도자기를 다시 붙이면서 새로운 마음을 새기게 되었다. 앞으로 이런 곳을 다신 안 오도록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다짐하는 청소년도 있었다.
엄 교수는 "경직된 마음으로 첫 수업에 참여했던 청소년들은 차츰 강사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새로운 것을 탐색하고 성취해냈다"며 "조각에 관심이 생겨 예술대학 학생들이 작업하는 모습을 구경하러 오는 청소년들도 있었다"고 말했다.
엄 교수는 아트테라피를 오래간 이끌어가고 싶지만 쉽지만은 않다.
재료비와 강사비, 학생들과 인솔자들의 저녁까지 챙기려면 기수당 수천만 원의 비용이 드는데 이를 지원하는 대학의 예산은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전북대는 아트테라피 예산을 1기 2천만원, 2기 2천500만원, 3기 3천300만원으로 차츰 늘렸지만 4기에는 다시 초반 수준으로 줄였다.
엄 교수는 "대학에서 지금까지 물심양면으로 힘을 썼지만 그래도 조금은 아쉽다"며 "아트테라피는 미술은 물론 청소년들의 심리를 다루는 심리학, 사회복지학, 의학 등과도 융합할 수 있는 만큼 대학이 더 전폭적인 지원을 했으면 한다"고 소망했다.
또 엄 교수는 가능하다면 예술대학교 입학생으로 매해 정원외 특별 전형에 아트테라피를 수료한 학생 1명을 선발하고 싶다고 했다.
엄 교수는 "아트테라피 수료생들에게 미술에 관심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라, 돕겠다고 하지만 비용이나 진로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인지 용기를 내는 친구들이 거의 없다"며 "아트테라피가 대학 입학까지 연계할 수 있다면 청소년들에게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심어줄 수 있는 확실한 방식이 될 것이다. 소망이 실현될 수 있도록 힘쓸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war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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