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면 얼마에 팔지도 못 정해요"…PB로 살길 찾는 유통가

임찬영 기자 2023. 11. 19.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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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리포트]제조-유통 전쟁 1년, 화해에서 독립으로③
[편집자주] 즉석밥 1등인 CJ제일제당이 쿠팡에 햇반 납품을 중단한지 1년이 지났다. 외형은 납품가격 갈등이지만 실상은 오랜 기간 지속된 제판(제조vs판매) 전쟁의 연장선이다. 케케묵은 주도권 싸움이기에 곧 합의점을 찾을 것이란 예상은 빗나갔다. 장기화되면서 양상이 달라지고 있다. 화해 대신 독립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CJ vs 쿠팡 전쟁 1년, 무엇이 달라졌나.

지난달 12일 서울의 한 대형마트에 자체브랜드(PB) 제품이 진열돼 있다./사진= 뉴스1
쿠팡과 CJ제일제당의 납품가를 둘러싼 신경전이 장기화하는 가운데 유통업체들이 제조사로부터 독립을 외치며 PB(자체브랜드)와 NPB(공동기획상품) 확대에 공을 들이고 있다. NB(제조사 브랜드) 제품 의존도를 낮춰 유통사 본연의 경쟁력을 키우려는 의도다.
납품가·판매가까지 결정하는 제조사…2010년 '신라면 전쟁' 승자는 '농심'
19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이마트 등 국내 주요 유통업체들은 제조사로부터 납품가와 판매가 가이드라인을 받고 그 범위 내에서 가격을 결정한다. 제조사에서 유통업계의 통상 마진율에 따라 납품가, 판매가 가이드라인을 정해주는 방식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제조사들이 모든 업체에 동일한 수준으로 납품가, 판매가 가이드라인을 보내는 건 오래된 관례"며 "옛날처럼 최저가 경쟁이 붙은 게 아니기 때문에 유통사도 마진율만 잘 지켜진다면 가이드라인에 맞춰 가격을 형성하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제조사가 납품가뿐만 아니라 유통사의 판매가까지 정하는 상황은 그만큼 제조사들의 입김이 세기 때문이다. 대형마트 등 유통업체들은 주요 매출이 NB에서 나오기 때문에 제조사의 요구를 거절하는 게 쉽지 않다. 특히 1위 상품을 제조하는 제조사일수록 그 영향력은 막강하다.

이러한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2010년 이마트와 농심의 일명 '신라면 전쟁'이다. 대형마트 1위 업체인 이마트는 '오픈 프라이스' 전략의 일환으로 라면 시장 1위 제품인 '신라면'을 납품가보다도 30% 저렴한 가격에 판매했는데, 이에 제조사인 농심이 반발하며 양측의 갈등이 심화했다. 결국 농심이 '납품 중단'이라는 초강수를 두자 이마트가 백기를 들며 갈등이 일단락됐다. 대형마트 업계가 당시 전성기를 누렸다는 점을 고려하면 제조사가 유통사에 미치는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관례 깬 쿠팡의 도전…NB 의존도 낮추려 PB 늘리는 유통업계
이런 유통사와 제조사 간의 관계에 균열을 낸 건 쿠팡 등 e커머스 업체들의 성장이다. e커머스는 공간적인 제약이 있는 오프라인과 달리 무한대로 판매 상품을 늘릴 수 있어 제조사 영향력이 오프라인보다 적다. 제한된 진열대에 유명 NB 상품만 채울 수밖에 없는 오프라인 매장과 달리 2~3위 제품까지도 같이 판매할 수 있기에 모든 제조사 상품을 판매할 수 있어서다.

유통사들은 특히 자체 PB 상품을 적극 육성하고 있다. PB 상품은 대형 제조사에 대한 의존도를 낮출 수 있는데다 독자적인 가격 결정권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통업체들에겐 필수 사업이 됐다. 여기에 중소기업과 상생한다는 명분도 있다. 실제로 쿠팡의 PB 협력사의 90%는 중소기업이다. 쿠팡은 직매입해 판매하는 상품 외에 오픈마켓에도 로켓배송을 적용한 로켓그로스를 통해 중소·영세 제조업체들의 판로를 열어주는 역할도 하고 있다.

오프라인 1위인 업체인 이마트 역시 근본적으로 NB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방안으로 PB인 '노브랜드'와 '피코크'를 중심으로 사업을 확대 중이다. 특히 피코크는 일반적인 가성비 위주 PB에서 벗어나 프리미엄 식품 브랜드로서 성장세를 타고 있다. 노브랜드와 피코크는 현재 1500여종, 800여종의 PB 상품을 선보이고 있는데, 지난해 기준 두 개 사업에서만 1조6900억원에 달하는 매출을 달성한 바 있다.

이마트가 가성비뿐만 아니라 프리미엄으로까지 PB 사업을 확장하는 이유는 유통사 최고 경쟁력은 결국 '가격'과 '품질'에서 오기 때문이다. 경쟁 업체에서 판매하지 않는, 오직 이마트에서만 판매하는 가성비 있는, 품질 좋은 상품을 통해 경쟁력을 키우려는 의도다. 이는 이마트뿐만 아니라 홈플러스, 롯데마트, 11번가 등 국내 주요 유통업체들이 추구하고 있는 주요 전략 중 하나다.

특히 국내 유통업체들의 PB 상품 비중이 20% 안팎에 불과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성장 가능성이 크다. PB 상품이 발달한 유럽·북미 등 대형마트의 PB 비중은 50~100%대에 달한다. 실제 독일 수퍼마켓 알디와 리들의 경우 90% 이상을 직매입해 PB 상품을 판매 중이다.

임찬영 기자 chan02@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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