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걔는 편하게 죽였습니다”… 인육까지 먹은 유영철, 19년째 반성은 없다
1997년 12월30일. 이날은 9살 여아를 강간하고 살해한 임풍식 등 등 흉악범 23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된 날이다. 그 후 국내에서 더는 사형 집행은 없었다. 2007년 엠네스티는 한국을 ‘실질적 사형폐지국’으로 분류했다. 그 사형 제도가, 26년만에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국내에서 잇달아 벌어진 ‘묻지마 살인’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올해 7월,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국회에서 사형제에 관한 질문을 받았다. 그는 “여러가지 고려할 점이 많다”면서도 “영구히 격리해야 할 범죄자가 분명히 있다”고 했다. “대한민국은 사형 제도가 법에 명시돼 있다”고도 했다.
8월이 되자, 한동훈 장관은 사형 시설을 갖춘 교정 기관 4곳에 “집행 시설을 점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어 전국에 흩어져 수감됐던 사형수들이 ‘사형 집행 가능 시설’인 서울구치소로 이감됐다.
법무부의 공식 입장은 “사형제를 존치하는 것만으로 그 나라가 후진적이거나 야만적이라고 볼 수 없다” “사형은 야만적 복수가 아니라 오히려 정의에 합치된다”는 것이다.
현재 국내에서 사형 확정 판결을 받은 사형수는 59명이다. 이들의 면면을 재조명해본다. /편집자주
“저놈을 교수형에 처할 때 저도 참여하게 해주십시오. 제발 부탁입니다!”
2004년 10월 25일 오후 서울중앙지법 청사 417호 대법정 방청석에서 이런 울부짖음이 울려퍼졌다. 이 법정 피고인에게 살해당한 수많은 사람의 유족 중 한 명이었다.
이 법정 피고인은 노인과 여성 등 20명을 살해하고, 시신을 토막 내고, 일부는 먹은 혐의로 기소됐다. 그런 그는 법정에서 유족들을 향해 심드렁한 표정으로 이런 말을 내뱉곤 했다.
“댁의 딸이 어떤 일을 했는지 아세요?”
“걔는 내가 편하게 죽였습니다.”
그는 모든 혐의를 인정했고, 사형 선고에 항소도 하지 않았다. 결국 유족의 바람대로 이듬해 법원은 최종심에서 피고인에게 사형을 확정했다. 판결문엔 이렇게 적혔다.
‘피고인은 유족들에게 구체적인 살해 방법을 고지하며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줬다. 피해 회복을 위해 노력한 것이 전혀 없다’
그리고 19년이 흘렀다. 그는 아직 살아있다. 법원이 선고하고 유족이 기대한 교수형의 집행은, 없었다.
피고인의 이름은 유영철, 연쇄살인마다.
유영철에게 살해 당한 피해자들은 유영철에게 어떠한 해도 끼친 적이 없는,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연쇄살인범이 되기 전, 그는 절도범이었다. 붙잡힌 뒤 신(神)에게 집행유예형을 기도했으나, 실형 선고를 받고 감옥에 갔다. 그는 이때 ‘교회’에 앙심을 품었다고 한다. 이후 아내에게 이혼 당하고 아들 양육권을 뺏기자 살인을 결심했다고, 그는 주장한다.
살인 도구는 직접 만들었다. 큰 개를 구해와 어떻게 죽이면 가장 효과적인지를 실험했다. 그렇게 손잡이가 짧은 4㎏짜리 쇠망치가 탄생했다.
첫 살인은 2003년 9월 24일이었다. 서울 신사동 소망교회 인근 단독주택에 침입해 1층 안방에 있던 노인 부부를 살해했다. 이유는 없었다.
보름 뒤엔 80대 노모, 60대 며느리, 30대 손자 일가족 3명을 살해했다. 그 해 11월 18일에는 혜화동 주택에서 80대 집 주인과 50대 파출부를 죽였다. 범행 후 강도범 소행인 양 꾸미던 중 손가락을 다쳐 방바닥에 자신의 피가 묻자 집에 불을 질러 증거를 없애기도 했다.
사건 현장에서 발자국이 발견되고 CCTV에 뒷모습이 찍히자 유영철은 범행을 4개월 정도 멈췄다.
살인이 재개된 건 2004년 3월이었다. 유영철은 당시 만나던 여성에게 이별을 통보받자 전화방과 출장마사지 업소 여성으로 타깃을 바꿨다. 불법 업소 여성은 실종돼도 신고할 가능성이 적다는 점을 노렸다.
살인의 방식은 더 잔혹하고 엽기적으로 바뀌었다. 업소 여성들을 자신이 사는 오피스텔로 불러들여 살해했다.
유영철은 범행 장소인 욕실을 ‘죽음의 문턱’이라 불렀다. 해부학 책을 구해다 읽고 시체를 절단해 암매장했다. 피해자의 신원을 확인하지 못하도록 열 손가락 지문을 도려냈다. 시신을 훼손하면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영화 ‘1492, 콜럼버스’의 주제가 ‘낙원의 정복(Conquest Of Paradise)’를 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넉달동안 11명이 유영철의 욕실에서 생을 마감했다. 유영철은 여성의 생전에 미리 혈액형을 물어본 뒤 자신과 혈액형이 같은 여성은 살해한 뒤 그 장기(臟器)를 먹었다고 뒷날 수사기관에 진술했다.
2004년 7월 15일 붙잡혔다. 체포된 뒤에도 반성의 기미는 없었고 도리어 호기를 부렸다.
유영철은 경찰들에게 “여기 있는 형사들 다 특진시켜주겠다”고 과시하며 범행을 자백했다. 계급이 낮은 경찰관을 상대하게 되면 “어느 정도는 돼야 나랑 대화를 한다”고 하기도 했다.
현장검증 때 경찰에게 “에이씨”라며 신경질 내는 장면도 여러 번 포착됐다. 신문 내내 담배를 피우던 검사에겐 “담배 끊으세요. 나보다 검사님이 먼저 죽을 수도 있어요”라고 여유를 부렸다.
법정에서도 그는 달라진 게 없었다.
법관에게 “다음 재판부터는 안나오겠다”고 했다. 법관이 “피고인은 나오도록 돼있으니 돌아가 잘 생각해 보라”고 하자, 유영철은 “생각해 보는 게 아니라 안 나온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곤 자리에서 뛰어올라 법원 직원석에 착지했고, 거기서 다시 재판장 자리로 뛰어가려다 미끄러져 넘어진 일도 있었다.
유족들이 방청석에서 자신을 비난했다는 이유로 “야이 X팔”이라고 소리를지르며 법정 나무 의자 2개를 박살내기도 했다.
교도소에 가서도 그는 무서울 게 없었다.
2004년 서울구치소에서 유영철은 건방지다는 이유로 함께 수감된 조직폭력배들로부터 집단 린치를 당한 일이 있었다. 두들겨맞던 유영철은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밖에서 깡패 새X 하나 못 죽이고 들어온 게 한이다. 씨X!”
당시의 조폭 중 한 명은 올해 9월 언론 인터뷰에서 유영철에 대해 “교도관들도 터치를 안 하고, 아주 안하무인인 데다 남들 머리 위에 있으려고 했다”고 회상했다.
2014년엔 교도관 이름으로 성인물을 불법 반입한 사실이 발각되기도 했다. 이 일로 소지품 검사를 받게 되자 “나는 이미 끝난 사람이다. 건들지 말라”며 소란을 피웠다.
올해는 유영철이 첫 살인을 저지른 지 20년이 된 해다.
그간 유영철이 잘못을 뉘우치고 있단 말은 들리지 않는다.
유영철은 구속 기간 중 월간조선 기자와 나눈 수십통의 편지에 이렇게 썼다. “2003년 출소해서 로또에 당첨이 되었더라도 아마 살인은 멈추지 않았을 거다. 오히려 그 돈으로 완벽하게(?) 아지트라도 만들어 내 목적을 달성했을 것이다.”
지난 9월 25일 대구교도소에 있던 유영철은 서울구치소로 이감됐다. 서울구치소는 현재 실질적으로 사용 가능한 사형 시설을 갖춘 유일한 장소다.
유영철은 이감 사실을 당일에 통보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가 서울구치소에 간 뒤 한 재소자에게 “사형을 기다리고 있다. 이 정부는 독해서 사형을 집행할 것”이란 말을 했다고 한다.
유영철이 19년전 체포된 직후 취재진 앞에서 한 말은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이를 계기로 여성들이 함부로 몸을 놀리거나 하는 일이 없었으면 하고, 부유층들도 각성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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