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죽이고 40살 연하와 잠자리”···색정광 ‘이 여인’ 역사를 바꾼 거물? [사색(史色)]
[사색-47] 황후의 침실에서는 교성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하루가 멀다고 만족과 기쁨의 환호가 쏟아져 나왔지요. 거친 숨결이 넓은 방을 가득 메웠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추운 나라 중 하나인 러시아에서 가장 뜨거운 공간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왔지요. 러시아 황실의 원자 생산을 위한 ‘애국적 성관계’였다면 좋았겠지만, 세상은 그렇게 동화처럼 흘러가지 않은 모양입니다. 황후의 잠자리를 달군 건 불륜남‘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들’이라는 의존명사를 강조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녀의 상대가 한 둘이 아니었다는 일종의 암시였습니다. 일찌감치 남편과 잠자리를 중단한 그녀는 뭇 남성들과 관계를 이어갔습니다. 성욕에 다소 무심해지는 환갑에도 40살 연하 미남을 침대로 끌어들였을 정도였습니다. 천하제일 색마 대회가 열렸다면, 능히 우승자는 그녀의 차지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또 한 번의 반전이 있습니다. 이 여성이 러시아에서 표트르 대제(46화 사색 참조) 다음으로 존경받는 군주였기 때문입니다. 예카테리나 대제(영어로는 카트린 대제) 이야기입니다. 남편을 폐위시키고 죽인 것도 모자라, 수 없이 많은 잠자리 상대를 가진 ‘색정광’을 러시아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소규모 도시 국가 지배자들이 유럽의 유력 가문으로 성장하는 유일한 방법이 있었습니다. 왕족과 혼맥으로 얽히는 것이지요. 예카테리나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유럽 귀족의 언어로 통한 프랑스어를 배워야 했습니다. 강도 높은 신부수업이었지요.
가문에 빛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러시아 제국의 계승자 표트르 3세와 예카테리나가 첫 만남을 하면서였습니다. 아우구스트는 어떻게든 딸을 그와 맺어주려고 애를 썼지요.
예카테리나는 나약하고 의지가 없는 표트르 3세에게 혐오의 감정을 내비쳤지만, 부모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러시아 최고 권력 엘리자베타 여왕 역시 예카테리나를 표트르 3세의 아내로 낙점지었지요. 하늘이 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1745년 두 사람이 결국 결혼식을 올렸지요. 예카테리나의 나이 고작 15살이었습니다.
독일 지방의 여성이 러시아 황실의 일원이 되는 건 쉬운 과정이 아니었습니다. 러시아어를 배워야 했고, 추운 날씨에 적응해야 했으며, 신교를 버리고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까지 해야 했으니까요. 밤늦게까지 잠도 못 잔 채 공부하고 러시아식 예의를 배우면서 폐렴에 걸려 죽기 직전까지 가기도 했습니다.
가장 아플 때, 가장 위로가 되어야 할 사람은 마땅히 배우자여야 했습니다. 하지만 표트르 3세는 다른 여자 치마 속에 있었지요. 예카테리나도 모르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대 놓고 다른 여자를 만났으니까요. 프랑스 계몽주의자 볼테르의 저작을 읽으면서 마음을 달랬지만, 쉽진 않았습니다.
오죽하면 러시아 내에서는 예카테리나와 표트르의 아들 파벨이 사실은 세르게이의 아들이라는 말까지 퍼졌을까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파벨은 공식적인 아버지 표트르와 똑같이 생겼었지요. 작고 못생긴 모습 때문에 세르게이의 핏줄이라고 믿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러시아 황위 계승자 부부의 모습은 ’막장‘과 다름 없었던 셈입니다.
당시 러시아는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었습니다. 독일의 강대국인 프로이센과 7년 전쟁에서 승리를 목전에 둔 상황이었습니다. 1761년 수도 베를린을 점령했고, 러시아가 최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지요. 당시 프로이센의 전성기를 이끈 ’프리드리히 대제‘를 상대로 이룬 성과여서 의미는 배가 됐습니다.
첫 황제의 취임 일성은 모든 러시아 사람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습니다. 프로이센을 상대로 대승을 앞둔 상황에서 작전 중단(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을 명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프리드리히는 러시아의 결정으로 살아남았고, 다시 프로이센의 전성기를 이끌며 현대 독일의 기틀을 다집니다. ‘역사의 서문’을 쓴 역사학자 칼 구스타브손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표트르는 멍청이답게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랐고, 본의 아니게 현대 유럽을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러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황제 표트르 대제도 승하한 직후, 황후가 그 자리를 계승했었지요. 체포된 표트르 3세는 감옥에 갇힌 뒤 정확히 8일만에 죽었습니다. 부검 결과는 치질과 뇌졸중. 아무도 이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치세 아래 러시아는 비약적으로 성공을 거뒀습니다. 단순히 내치만 잘했던 것도 아니었지요. 여성의 몸으로서 군사강국을 일굽니다. 러시아-튀르키예 전쟁(1770~1774년) 전쟁에서 승리해 흑해 제해권을 빼앗고,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크림반도를 탈환한 것도 그녀의 공이었지요. 오늘날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두고 우크라이나와 대립각을 세운 배경입니다.
러시아를 유럽화하려는 작업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카테리나는 표트르 대제를 참 많이 닮았습니다.)
10살 연하의 포템킨은 그렇게 예카테리나의 침실로 초청을 받았습니다. 예카테리나를 위해 언제나 싸움터에 나갔던 그의 용맹함을 기억해 20세기 러시아 제국은 전함에 포템킨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했습니다. 영화 ‘전함 포템킨’도 그렇게 탄생한 것이었지요.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한 예카테리나의 마지막 남성은 플라톤 주보프였습니다. 예카테리나가 점찍은 마지막 남성이었지요. 둘의 나이 차는 38살. 물론 예카테리나가 연상이었습니다.
ㅇ러시아에서 예카테리나 여왕은 ‘대제’로 불리는(표트르 대제와 함께) 한 인물이다.
ㅇ러시아의 영토를 확장하고, 현대식 국가 체제를 확립했기 때문이다.
ㅇ그러면서도 남편 표트르 3세를 폐위시키고 수 많은 남성들과 염문을 뿌리기도 했다. 60세에는 38살 연하와 내연관계를 맺기도 했다.
ㅇ역사를 움직이는 주체는 도덕군자보다 욕망하는 사람들이었다. 러시아 역사가 증명한다.
<참고문헌>
ㅇ니콜라스 V. 랴자놉스키·마크 D. 스타인버그, 러시아의 역사, 까치, 2011년.
ㅇ다닐로프, 새로운 러시아 역사, 신아사, 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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