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D 예산 돋보기]⑰연구장비 국산화는 ‘먼 길’...장관 밀고 부처는 반토막
첨단 연구장비 국산화율 저조한데 예산 깎아
내년도 R&D 예산안은 전년대비 16.6% 삭감된 25조9000억원이다. R&D 예산이 정부 총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9%에서 3.9%로 줄었다. 33년 만의 예산 감축에 과학기술계가 큰 혼란에 빠졌지만, 수십 조원에 달하는 방대한 예산안 앞에서 정작 어디에서, 어떻게, 누구를 위한 예산이 삭감됐고, 이 와중에 어떤 예산은 왜 늘었는지 제대로 아는 국민은 없다. 조선비즈는 국회 예산안 심의 시즌을 맞아 내년도 R&D 예산안에서 꼭 필요한 예산이 삭감된 건 어떤 부분인지, 늘어난 예산 중에 낭비성 예산은 없는지 찾아보기로 했다. [편집자 주]
“이 장비는 어디에서 가져온 겁니까? 국산 장비는 없습니까?”
작년 11월 29일 경기도 수원시 광교의 CJ블로썸파크를 방문한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미생물 분석을 자동화한 설비를 가리키며 물었다. 윤석열 정부가 육성하고 있는 첨단 바이오의 핵심 인프라인 바이오파운드리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장비가 해외에서 수입한 것이란 이야기를 듣고 한 질문이다. 이 장관은 국산 장비가 없는 것을 아쉬워하며 자신이 과기정통부를 이끄는 동안 연구장비 산업을 키우겠다고 연구자들에게 약속하기도 했다.
연구장비 국산화는 앞선 정부에서도 필요성이 제기되는 분야였다. 하지만 이미 시장과 인지도를 모두 보유한 해외 기업에 맞서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육성하기엔 미래가 지나치게 불투명하다는 반대 목소리가 컸다.
실제로 이 장관의 발언이 나온 이후 1년이 지났지만 연구장비 국산화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과학기술계 전반에 폭탄을 던진 내년도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은 연구장비 산업 육성에도 찬물을 끼얹었다. 2022년 시작한 ‘미래선도 연구장비 핵심기술개발’ 사업은 예산이 반토막났다. 올해 117억200만원이던 예산이 내년에는 51억4000만원으로 56.1%가 삭감됐다.
이 사업은 대학이나 정부출연연구기관의 연구자가 국내 연구장비를 이용해 국제 학술지에 논문을 낼 수 있도록 돕고, 첨단 연구장비에 필요한 핵심기술을 개발하는 사업이다. 시료의 원자 이미지부터 물리적 구조, 물성측정, 성분분석까지 가능한 첨단 연구장비를 개발하는 게 최종 목표다.
연구장비는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핵심적인 인프라지만 국산화율이 의외로 매우 낮다. 과학기술사업화진흥원에 따르면 2017년부터 2021년까지 정부 R&D 예산을 통해 구축된 연구장비 가운데 외산 비율이 86%에 달한다. 투과전자현미경, 유전자합성·분석장치, 핵자기공명 분광기, 액체크로마토 그래피질량분석기, 유세포분리·분석장치는 국산 제품이 전혀 없다. 광학현미경이나 방사선물질측정기 같은 아주 기본적인 연구장비도 국산화율이 각각 6.7%, 3.8%에 머물고 있다.
송명원 과학기술사업화진흥원 선임연구원과 최문영 연구원은 지난 7월 발간한 보고서에서 “연구장비의 높은 수입 의존도 때문에 R&D 투자가 해외로 유출되는 문제가 심각하고, 특히 첨단기술 확보를 위한 고부가가치 장비는 외산 의존도가 매우 높다”며 “국내 연구장비 기업들은 대부분 중소기업이라 매출만 수조원대인 해외 연구장비 기업들과 비교해보면 영세한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고질적인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첨단 연구장비 기술개발에 나섰지만, 불과 1년 만에 브레이크를 밟게 된 것이다. 미래선도 연구장비 핵심기술개발 사업에는 당초 내년에도 112억원 정도의 투자가 예정돼 있었다. 첨단 연구장비 3개 분야에서 26개 핵심기술을 확보하기 위한 재원이었다. 하지만 예산이 반토막나면서 이런 구상을 실천하는 것도 쉽지 않아졌다.
사업을 이끌고 있는 강상우 한국표준과학연구원 미래선도연구장비 핵심기술개발 사업단장은 “계속 과제에 투입되는 예산이 줄어드는 것보다 큰 문제는 신규 과제가 하나도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이라며 “사업이 성과를 내면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기업이나 연구자들이 많은데 신규 과제가 없다보니 이런 수요를 충족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연구장비 산업육성 예산도 올해 64억6100만원에서 내년 6억3300만원으로 확 줄었다. 내년 사업종료를 앞두고 예산이 대폭 삭감되면서 사업화 지원 등이 차질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연구산업진흥단지 육성을 위한 예산도 48억원에서 40억원으로 삭감됐다. 연구장비 개발을 포함한 연구산업 육성이라는 기조가 이번 R&D 예산 삭감으로 크게 흔들린 모습이다.
한 국내 연구장비 기업 관계자는 “연구산업은 장비와 재료를 포함해 국내 시장 규모만 20조원에 달하는 큰 산업인데 정부가 큰 고민없이 제도나 정책 방향성을 무리하게 바꾼다는 생각이 든다”며 “정부가 이야기하는 전략기술을 육성하기 위해서라도 연구장비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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