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는 ‘이 열매’를 얻기 위해서 뉴욕을 포기했다 [역사를 바꾼 사물들]
미국이 횡재한 역사적인 ‘3대 땅거래’가 있다. 가장 큰 횡재가 1803년에 미국 정부가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 영토를 1500만달러에 사들였던 사건이다. 이 때 프랑스가 넘긴 루이지애나 땅은 지금의 미국 루이지애나주가 아니라, 북으로 미시간호·이리호에서부터, 미시시피강을 따라 남쪽으로 지금의 루이지애나주에 이르는 미국 중부지역을 모두 포함하는 넓은 땅이었다.
1867년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750만달러에 산 것도 미국에게는 엄청난 횡재였다. 물론 당시에는 얼음 뿐인 땅을 왜 샀냐고 이 거래를 주도한 윌리엄 수어드 국무장관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컸다. 한동안 알래스카는 ‘슈어드의 냉장고’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 땅에 석유와 석탄 등 어마어마한 양의 지하자원이 발견되면서 ‘수어드의 냉장고’가 ‘수어드의 보물창고’가 됐다.
미국 독립 전에 영국이 네덜란드로부터 뉴암스테르담(후에 뉴욕이 됨) 땅을 받아낸 것도 결과적으로는 미국의 횡재가 됐다.
하지만 루이지애나, 알래스카 땅거래와 뉴욕 땅거래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프랑스가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매각할 때는 영국과의 전쟁으로 재정이 악화된 상태였고 식민지 산토도밍고(지금의 아이티)에서 일어난 흑인 노예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실패한 상황이었다. 러시아 역시 크림전쟁으로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알래스카를 매각했다.
반면 네덜란드는 영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도 뉴암스테르담을 영국에게 넘겼다. 승전국 네덜란드는 왜 뉴암스테르담을 영국에 넘겼을까? 당연히 뉴암스테르담보다 더 소중한 것을 지켜야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가 지키고자 했던 것은 인도네시아의 작은 섬, 반다제도(Banda Islands)였다. 면적 42km2에 불과한 보잘 것 없는 섬을 지키고자 네덜란드는 뉴욕을 포기했다. 그 섬에 도대체 무엇이 있었길래?
16세기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대, 잉글랜드의 의사들이 호두모양의 열매가 흑사병 예방과 치료에 효과가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 열매가 바로 육두구(nutmeg)였다.
당시 육두구는 인도와 오스만투르크를 거쳐 지중해를 통해 유럽으로 들어왔다. 이 무역로를 통해서 네가지 중요한 동양의 향신료과 모두 들어왔다. 인도의 후추, 스리랑카의 계피, 반다제도의 육두구, 몰루카제도의 정향이 바로 그것이다. 그중 가격이 가장 비싸고 수익성이 높은 것이 육두구였다. 육두구는 한 줌에 집 한 채, 선박 한 척과 맞먹을 정도로 귀하신 몸이었기 때문에 유럽에서는 부와 사치의 상징이었다.
포르투갈은 더 높은 수익성을 위해서 직접 육두구를 찾아 나섰다. 포르투갈은 인도네시아의 작은 섬인 반다제도에서만 육두구 나무가 자란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1595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향료무역의 중심지인 지금의 자카르타 바타비아에 근거지를 세우고 포르투갈인들을 몰아냈다. 그 때 네덜란드인들의 눈에 들어왔던 향신료가 바로 육두구였고, 육두구가 생산되는 반다제도였다. 몰루카 제도의 남단에 위치한 반다제도는 세 개의 화산 섬과 작은 부속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반다제도를 찾은 유럽의 상인들은 중국상인이나, 인도상인, 이슬람상인과는 달랐다. 그들은 인도양을 항해했던 다른 상인들과 달리 육두구의 ‘무역 독점’을 원했다. ‘독점’은 유럽에서는 이미 보편화한 개념이지만 인도양의 상업적 전통에 비춰볼 때는 반다인들은 도무지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반다인들은 포르투갈 상인이건, 네덜란드 상인이건 그들에게 그런 권리를 허락한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렇게 되면 인도나 중국에서 먼 바다를 건너 오는 종전의 거래 파트너들과의 무역을 거부해야만 하는 것 아닌가? 더구나 그들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식량을 포함해 반다섬 사람들에게 필요한 많은 물건들을 싣고 왔다. 즉 반다제도 사람들은 인도양의 다른 상인집단들과 긴밀한 경제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유럽인들은 집요하게 육두구의 독점을 요구했다. 그 중에 네덜란드인들이 가장 무자비했다. 그들은 독점 권한이 담긴 조약을 강요하기 위해 반다제도에 여러 차례 함대를 보냈다. 반다제도 사람들은 다른 상인 집단의 지원을 받아가며 저항했지만 세계 최강인 네덜란드 해군에 맞서기는 무리였다.
마침 그때 영국 동인도회사도 육두구를 확보하기 위해서 반다제도의 룬섬에 교두보를 마련했다. 네덜란드와 영국의 대치가 일촉즉발의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제 생각에 반다인을 모조리 이 땅에서 쫓아내는 게 최선일 것 같습니다.”
1621년 네덜란드 본토의 정책 결정자들인 17인 위원회는 쿤 총독에게 암보니아(Amboyna•지금의 암본섬•Pulau Ambon)를 포함한 반다제도의 정복을 지시했다.
18척의 네덜란드 선박을 포함해 50여척의 배와 2000여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쿤의 함대는 반다제도로 몰려갔다. 네덜란드 병사와 관리들은 주민들에게 무기를 내려놓고 순순히 강제 추방에 응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반다섬 여러 부족 공동체의 원로들은 쿤의 요구를 거부했다. 쿤은 동인도회사의 고문위원회에 “섬을 파괴하고 그 땅에서 사람들을 몰라내고 그들을 잡아서 우리가 하고 싶은 어떤 일이든 하겠다”고 보고했고 21명의 고문들은 “군대를 파견해 그들의 마을을 싸그리 불사르고 그들의 남은 배를 뺴앗든가 파괴하고 반다인이 우리에게 올 수 밖에 없거나 그 나라를 떠날 수 밖에 없도록 만들겠다”고 선언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때부터 반다인 대학살이 시작됐다. 잔인하고 끔직한 만행을 쿤은 기쁨에 차서 기록했다. 자신의 함선에서 열린 회의에서 쿤은 “신의 은총으로 반다제도의 모든 마을과 요새화한 장소들을 쟁취하고 불태워 없앴으며 약 1200명을 붙잡았다”고 선언할 정도였다.
고지대로 도망친 반다인들은 저항을 이어나갔다. 네덜란드 군인들은 반다인들의 저항 근거지까지 초토화시키기 위해서 붙잡힌 반다인들에게 끔직한 고문도 서슴지 않았다. 그중에는 부족장인 오랑카야의 아들도 있었다. 수많은 독재정권에서 따라했던 물고문의 원형을 만든 것도 바로 반다제도의 네덜란드군이었다. 이들은 포로의 머리에 천을 덮고 계속 물을 부어 이들을 질식시켰다.
가장 처참하게 살해당한 사람들은 8명의 부족 원로들이었는데 쿤의 군대는 원로들을 참수한 뒤 그들의 사지를 찢었다.
네덜란드인들이 이토록 참혹한 짓을 벌인 목적이 고작 육두구라고 하는 향신료의 독점권을 얻기 위해서였다.
하늘이 준 축복으로 여겼던 육두구가 끝내 반다인을 멸절시키는 저주가 돼버린 것이다. 현재 말루쿠제도의 카이섬에는 당시 쿤의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반다족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데 그들에게는 이런 노래가 구전된다고 한다.
우리는 울고 또 울어
당신은 언제, 무슨 요일에
“당신의 길을 떠나는가”
우리, 지혜의 진주
육두구 열매가 죽었네
우리가 말할 수 있도록 그녀는 편지를 띄우네
지혜의 진주
육두구 열매가 죽었네
여기에는 믿음이 없다네
이 섬 안에는 축복도 없다네.
해양대국 네덜란드와 영국의 충돌은 인도양뿐 아니라 대서양에서도 벌어져 4차례의 전쟁, 즉 영란전쟁이 발발했다.
2차 영란전쟁은 1665년 발생해 1667년 6월 1일 템스강 하구에서 벌어진 ‘4일간의 전투’에서 네덜란드가 승리하면서 끝이 났다. 그 결과 1667년 브레다에서 네덜란드에 유리한 평화조약을 체결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브레다조약’이다. 그 주요 내용은 ①양국의 영토는 대략 현 상태를 유지할 것, ②잉글랜드는 뉴암스테르담을 얻고, 네덜란드는 남아메리카의 수리남과 동남아시아의 반다제도를 확보 ③영국의 항해 조례를 수정하고 1662년 통상조약 재확인이었다.
승전국 네덜란드가 유리한 조건에서 맺은 조약임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는 뉴암스테르담을 내주고 수리남과 반다제도를 얻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 기준에서는 모피 무역이나 하는 뉴암스테르담보다는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중심지였던 수리남과 육두구 생산지역인 반다제도가 훨씬 가치가 높았다. 반다제도와 수리남은 당시 네덜란드 최대의 캐시카우였던 셈이다.
이후 뉴암스테르담과 반다제도의 운명은 물론이고 네덜란드와 영국의 운명도 크게 엇갈렸다.
뉴암스테르담을 확보한 영국은 이곳을 영국 요크지역의 이름을 따서 뉴욕으로 바꿔 불렀고 운하를 통해 미국 내륙지역을 잇는 중심 항구, 아메리카 대륙과 유럽을 잇는 중심 항구로 키웠다.
반면 반다제도를 확보한 네덜란드는 육두구 독점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육두구 나무가 섬 밖으로 나가는 것을 철저하게 통제했지만 결국은 실패했다. 육두구가 반다제도 밖에서도 생산되고, 더구나 흑사병의 공포에서도 유럽이 벗어나게 되자 육두구 가격은 급락했다. 반다제도의 중요성 역시 줄어들 수 밖에 없었다.
반면 말루쿠제도와 반다제도에서 밀려난 영국은 인도 아대륙에 집중했다. 향신료 무역보다는 면화와 커피, 차 무역에 더욱 집중했다. 그것이 바로 산업혁명의 동력이 됐고 ‘해가 지지않는 나라’ 대영제국의 기틀이 됐다.
쿤은 주인없는 사무라이, 즉 일본인 낭인 80명을 선발대로 삼아 반다제도를 공격했다. 일본인 용병은 유럽인 병사보다 저렴하고 강인할 뿐 아니라, 참수와 검술에 통달한 고도로 숙련된 전문 검객들이었다.
가일스 밀턴의 <향료 전쟁(원제: 나다니엘의 육두구)>이라는 책에는 당시 동남아시아 바다에서 용병으로 활동한 왜구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일본 배에서 영국 배로 넘어오는 일본인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으나 에드워드와 다른 선원들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동서양의 해적들이 이렇게 화기애애한 가운데 갑자기 칼을 빼든 일본 해적 두목이 곁의 영국인을 후려치는 것을 신호로 일본 해적들은 미친 개처럼 주변의 영국인들을 마구 베기 시작했다. 선상은 삽시간에 도살장처럼 변했다. 일본인들은 기합을 지르며 되는대로 베고 찔렀다.(중략) 기세가 오른 일본인들은 전신에 피를 뒤집어쓴 귀신같은 꼴로 다른 목표를 찾아 선교로 몰려왔다. 영국인들은 다 죽임을 당하고 배의 탈취는 시간 문제인 듯 했다.”
왜구들은 네덜란드의 용병으로만 활동하지는 않았다. 그전에는 포르투갈의 용병으로 활동했고 영국의 용병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돈만 받으면 누굴 위해서도 일할 수 있는 진정한 용병들이었다.
네덜란드가 암보이나 대학살을 저지른 2년 뒤인 1623년, 암보이나 대학살에 가담했던 일본 낭인들이 이번에는 네덜란드군을 공격하고 암보이나를 점령하려는 영국의 음모에 가담했다 적발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쿤은 일본인 낭인 9명을 참수했다. 물론 영국 동인도회사는 이 사건 자체가 네덜란드가 고문으로 조작한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왜구들은 단순히 용병으로만 활동하지는 않았다. 당시 동남아시아의 바다에서 펼쳐지던 열강들의 무역전쟁의 중요한 구성원으로서의 역할도 했다. 당시 해금정책을 펼치던 중국은 물론 일본과의 무역 네트워크를 잇는 역할을 바로 왜구가 맡았다. 당시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는 공식적으로는 쇄국정책을 펼쳤지만 지역의 다이묘들은 왜구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들을 적극 활용했다.
일본이 미국에 의해 강제 개항한 이후 빠르게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왜구를 통해 동아시아의 국제 무역망에 계속 연결돼 있었던 점도 크게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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