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 프리즘] 현실을 자각하는 순간이 올 때

권대익 2023. 11. 18.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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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수의 마음 읽기] 고려대 구로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게티이미지뱅크

요즘 클리닉에서는 그냥 지치고 무기력해진 학생과 직장인들을 자주 만난다. 코로나19 대유행을 거치면서 혼자 이겨내고 참기보다는 누군가를 만나서 상담하고, 필요하면 약도 먹겠다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다.

성인뿐이 아니다. 얼마 전 지인 소개로 방문한 순하게 생긴 중학교 남학생은 스케줄에 따라 하루 몇 개의 학원을 다니는 중인데, 어느 날부터 아무것도 하기 싫고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같이 온 엄마는 아이가 그냥 멍한 것이 집중력 떨어지고 게을러진 것 같아 걱정이라 말한다.

번아웃(Burn-out)이라는 말은 뭔가 하기 위해 에너지를 다 쏟아내며 노력하다가 배터리가 다 닳아버린 것처럼 된 상태를 말한다. 1970년대 미국 심리학자 프로이덴버거가 제안한 개념으로서 주로 구호단체나 상담기관에서 명예와 소명의식으로 일하던 직원들이 어느 날 무기력해지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진이 다 빠지고 에너지가 없어졌다는 의미로 탈진(脫盡) 또는 소진(消盡)이라 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일이나 공부를 열심히 하던 어느 날 갑자기 일의 의미가 없는 것 같고, 이걸 왜 하나 하는 마음이 든다면 요즘 신조어로 소위 ‘현타(현실자각타임)’가 온 것이다.

우선 뭔가 일을 시작하는 것이 이전에 비해 느려지고 어려워진다. 일과 학업에 대해 냉소적으로 되고 짜증이 많아진다. 집중력이 떨어지고, 어쩌다 일이 잘 되었어도 만족감을 느끼지 못한다. 별로 생각하지 않던 ‘일과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잠도 안 오고 두통이나 소화불량 같은 신경성 증상이 자주 생기면서 늘 피곤함을 느낀다.

늘 같은 일을 하며 살다가 이런 증상을 느낀다면 번아웃이 오기 시작하는 것일 수 있다.

물론 매일의 작은 성공 없이 반복적인 일을 하고 산다 해서 모든 사람이 번아웃에 빠지는 것은 아니다. 성격적으로 타고 나기를 꼼꼼해 약간 강박적이거나, 집안이나 직장의 분위기가 완벽을 추구하는 경우에 번아웃이 잘 생긴다. 더구나 본인의 약점이나 실수를 인정하지 못하고 보다 더 노력해서 극복할 수 있다고 자꾸 다짐하는 사람이 역설적으로 양초처럼 타버리기가 더 쉬운 것 같다.

매사에 긍정적으로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의미를 찾아내고 소명의식으로 일을 하는 동료들도 있지만, 즉각적이고 만족스러운 보상이 없이 반복적인 일을 하다 보면 대다수가 지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문제는 번아웃의 후유증이다. 지친 사람은 감정이 메마른다. 좋은 것 기쁜 것을 봐도 심드렁할 뿐이다. 냉소적으로 변해 가까운 미래에 나와 내가 속한 조직의 발전이 있을 거라는 사장님 말씀을 들어도 속으로 ‘좋으시겠어요. 열심히 하세요’라 비아냥거리게 된다. 그런 상태에서는 직무 효능감이 떨어지게 마련이라 일이 잘 되기 어렵다. 결국 그 조직은 천천히 망해 갈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기력이 바닥난 상태에 오래 있으면 자존감도 떨어진다. 스스로를 한심하게 생각하다 보니 타인에 대해 공감하거나 웃어주기도 힘들다. 사람들과 여럿이 함께 있어도 격하게 외로울 뿐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 기운을 좀 회복한 분에게는 이렇게 하라고 권한다. 우선 지금 하는 일들 중에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를 자문해 보는 것이다. 오늘 내가 하는 일에 충실하되 한 번에 하나씩만 하는 것이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그러기 위해 약속과 계획을 정량화해야 한다. 대충 하고 싶은 일을 적어놓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잘 정해 놓고 중간에 끼어드는 일들은 ‘부득이하게 거절’하는 연습도 해야 한다.

세 번째, 마음과 머리가 정리돼 있으려면 혼자 있는 시간, 쉬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일과 시간 중에 끼어드는 급한 만남과 할 일을 다 하려 하지 말고, 부득이하게 자리 비우는 것도 도움이 된다. 네 번째, 적절한 수면시간과 운동, 영양 관리는 기본이다.

마지막으로 필요한 순간에는 도움을 구하는 용기를 내야 한다. 주변에는 행동이나 말로 도움을 줄 선의에 가득하지만, 오히려 부담 느끼고 싫어할까 봐 나서지 않는 동료나 친구, 선배가 여럿 있다. 그들에게 조언이나 도움을 요청하면 흔쾌히 당신을 도와줄 것이다.

번아웃은 자동차의 엔진 상태를 점검하고 배터리를 충전하라고 내 몸이 보내는 신호이다. 잠시 속도를 낮추고 몸을 쉬면서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지고 나면 이다음 10년의 미래가 다시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한창수 고려대 구로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권대익 의학전문기자 dkw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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