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믿은 게 죄"...빚과 재고 떠안은 종이 빨대 업체의 울분

최은서 2023. 11. 18. 16:0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정부 믿고 적자 견뎠는데 줄도산 위기
기계 대금 등 적자 경영에 수억대 빚
"친환경 정책 기조에 맞춰 준비해 와"
업계 "자금 지원, 판로 확보 등 시급"
13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환경부 앞에서 종이 빨대 제조업체 대표들로 구성된 종이빨대생존대책협의회가 정부의 플라스틱 빨대 규제 계도 기간 무기한 연장에 항의하며 종이 빨대들을 바닥에 쏟고 있다. 세종=뉴시스

# 부산의 한 종이 빨대 생산업체 대표 A씨는 이달 현재까지 18억 원이 넘는 빚을 졌다. A씨는 "종이 빨대 기계 대금 등을 위해 대출을 받은 게 14억~16억 원"이라며 "직원 서너 명이 회사 운영을 위해 자발적으로 2억 원 넘게 대출을 받았다"며 눈물을 쏟았다. 그는 "계약업체들로부터 계속 반품 요청이 들어오고 있어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고 했다.

종이 빨대 생산업체들이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 정부가 당초 23일 종료 예정이었던 플라스틱 빨대 사용 규제 계도기간을 무기한 연장한다고 지난 7일 갑자기 발표했기 때문이다. 계도기간이 끝나면 플라스틱 빨대 사용이 금지돼 종이 빨대 사용량이 늘어날 것으로 기대했지만, 불과 보름을 남겨두고 정책이 뒤바뀌면서 재고 등 피해가 급증하고 있다.


"100평 공장, 종이 쓰레기장 됐다"

지난 4월 1일 오전 서울 관악구의 한 커피전문점에서 고객이 종이 빨대를 가져가고 있다. 최주연 기자

정부 정책 발표 후 업계에는 종이 빨대 반품 요청이 쏟아졌다. 환경부의 '재질별 빨대 생산 단가' 비교 자료에 따르면 플라스틱 빨대는 개당 10~15원, 종이 빨대는 35~45원이다. 개당 2배 이상 차이가 난다. 플라스틱 빨대를 종이 빨대로 바꾸면 월 약 5만 원(매장 평균 소비량 약 2,500개 기준)의 추가 비용이 든다. 종이 빨대 반품 신청을 한 커피전문점 대표는 "종이 빨대 사용이 의무화가 아니라면, 단가가 높은 종이 빨대를 사용할 이유가 없지 않나"라며 "가뜩이나 물가가 많이 올라 재료비, 운영비 등으로 부담이 크기 때문에 줄일 수 있는 건 다 줄여야 한다"고 했다.

재고도 누적됐다. 생산업체들이 계도기간 종료를 앞두고 수요가 늘어날 것에 대비해 미리 종이 빨대를 대량 생산해뒀기 때문이다. 종이빨대생존대책협의회(이하 협의회)는 16일 “(10여 개) 회원사들의 현재 재고량을 종합하면 약 1억4,000만 개”이며 “회원사 이외의 업체 재고량도 더하면 약 2억 개”라고 추정했다. 또 “회원사들의 월 생산량은 약 2억7,000만 개지만 판로가 막혀 생산기계 가동을 급하게 멈춘 상태”라고 했다. 종이 빨대 생산업체인 아성산업의 B 대표는 "재고가 1,000만 개나 되는 상황에서 더 생산할 수도 없고 이에 10명이 넘는 직원들도 더는 함께할 수 없게 됐다"며 "100평이 넘는 공장이 종이 쓰레기 보관소가 됐다"고 토로했다. 한 종이 빨대 생산업체는 정부 발표와 동시에 직원 11명 전원이 퇴사했다.

업체 대부분이 친환경에 투자하기 위해 적자경영을 견뎌 타격은 더 크다. 종이 빨대는 지금까지 대형 프랜차이즈 업체인 스타벅스 정도를 제외하고는 거래처에서 많이 찾는 품목이 아니었다. 하지만 친환경 수요가 늘어나고, 계도기간 종료를 기점으로 종이 빨대 사용이 보편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팽배했다. 종이 빨대 생산업계는 "친환경 정책 기조에 맞춰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환경 보호에도 기여한다는 생각에 대부분의 업체가 미래를 보고 투자를 해왔다"며 "피해 규모는 다 다르지만, 지금까지 돈을 번 곳은 사실상 없는 상황"이라고 호소했다.


"정부 정책 대참사...긴급 자금 지원 등 시급"

종이빨대생존대책협의회가 13일 정부세종청사 환경부 앞에서 정부가 7일 발표한 플라스틱 빨대 규제 계도기간 무기한 연기 철회와 종이 빨대 제조업체의 생존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세종=뉴시스

갑작스러운 정책 변화로 인한 피해인 만큼 정부 책임이 크다. 정종화 네이처페이지 대표는 “정부 정책을 믿고 종이 빨대 사업에 투자한 게 후회된다”“환경부가 계도기간 무기한 연장을 발표한 7일이 공장에 기계를 설치하는 날이었는데, 밤낮으로 연구·개발하면서 환경을 보호하는 데 일조한다는 자부심을 느낀 게 물거품이 됐다”고 분노했다. 또 다른 종이 빨대 생산업체 대표는 "수년간 기술을 개발하고, 연구해서 일궈냈던 사업이 하루아침에 갈 곳을 잃게 됐다"며 "천재지변이나 시장변화가 아니라 정부 정책의 실패 때문에 일어난 참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업계는 긴급 자금 지원, 계도기간 시한 지정, 판로 확보 등을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이상훈 협의회 이사는 "전국 업체 현황을 보면 올해 안에 도산하게 되는 중소업체들이 대부분"이라며 “긴급 자금 지원이 당장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또 "플라스틱 빨대 사용 규제 계도기간의 정확한 일정 발표 및 시행이 시급하다"고도 덧붙였다. 종이 빨대 생산업체 대표 A씨도 “긴급지원금을 받는다면 계도기간이 종료될 때까지 얼마간은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면서도 “중요한 건 이 많은 재고들을 앞으로 어떻게 처리할 수 있을지, 향후 어떻게 판로를 개척할 수 있을지 실질적인 대책을 찾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정책을 발표한 지 열흘이 넘도록 깜깜무소식이다. 환경부 관계자는 "다음 주 업계와 면담을 진행하고, 우대 금리 등 금융 지원 방안을 검토 중이다"고 말했다.

최은서 기자 silver@hankookilbo.com

Copyright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