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면도? 네가 재벌이냐?”…이 남자 없었으면 수염 맘대로 못잘랐다 [추동훈의 흥부전]

추동훈 기자(chu.donghun@mk.co.kr) 2023. 11. 18.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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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전-31][브랜드로 남은 창업자들-26] 킹 캠프 질레트

날씨가 추워지며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몸도 무거워지는 계절입니다. 특히 찬 바람에 몸을 녹여가며 씻어야 하는 아침, 남자들은 거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면도를 위해 따뜻한 물로 얼굴을 적시는 게 일인데요. 매일 해야 하는 면도가 귀찮다는 사람들도 많지만, 이처럼 매일 편리하게 면도를 할 수 있다는 사실조차 감사해야 한다는 사실. 왜 그런지 오늘 브랜드로 남은 창업자들, 흥부전에서 살펴보겠습니다.

면도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벽화
면도의 역사는 무척 깁니다. 고대에는 날카로운 조개 껍데기 등을 이용해 수염을 깎았다는 기록이 있는데요. 일부 기록에는 수염을 깎았다기 보다 사실상 뽑았다고 남아있어 무척 아픈 제모 작업이 이뤄진 것으로 확인됩니다.

역사 속에서 면도는 무척 쉽지 않은 작업이었던만큼 아예 수염을 기르는 것을 미덕으로 삼은 시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거울이 발명되고 날카로운 칼이나 손도끼 등을 제작할 수 있게 기술이 발전하며 면도 기술도 함께 진보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면도는 상당히 난도를 요하는 작업이었고, 상류층 등 지배계층의 전유물로 취급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면도의 역사를 완전히 뒤바꾼 혁신이 20세기 초에 등장한 안전면도기입니다. 싼 가격으로 제작돼 한두 번 쓰고 버릴 수 있는 일회용 면도날의 발명은 누구나 손쉽고 편리하게 면도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바로 면도기의 대명사, 질레트를 창업한 킹 캠프 질레트입니다.

킹 캠프 질레트
질레트는 프랑스계 미국인으로 그의 조상들은 1630년대, 미국 매사추세츠 식민지 개발 시대에 북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왔습니다. 그의 자손인 킹 캠프 질레트는 1855년 1월 위스콘신주 폰두락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일리노이주로 이전해 시카고에서 자란 질레트는 1871년 시카고 대화재에서 살아남았지만 그간 모아둔 재산을 모두 잃었습니다. 결국 질레트 가족은 뉴욕으로 또다시 거처를 옮겨 맨바닥에서 새시작을 했습니다. 쉽지 않던 10대 시절을 보낸 질레트는 특허중개인으로 일하던 아버지 밑에서 자라며 발명과 특허에 관심을 키워왔습니다.

형들과 함께 물건을 직접 만들어보고 어떻게 물건이 작동하는지 그 원리를 탐구하고 탐험하던 발명가적 자세는 면도기 개발에도 큰 힘이 됐습니다.

뉴욕에서 철물 도매업을 배우며 돈벌이를 해오던 그는 직접 영업에 나서서 철물을 판매하고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중간 중간 금속 제품과 전기케이블, 베어링 등에 대한 특허를 내놓기도 했지만 눈에 띄는 성과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891년, 30대 중반의 나이가 된 질레트는 아내와 자녀들을 부양하기 위해 36세의 나이에 ‘볼티모어 씰 컴퍼니’ 라는 회사에 취업했습니다.

크라운 코르크 앤 실 컴퍼니
그리고 이 곳에서 귀인을 만납니다. 이 회사의 사장인 윌리엄 페인터인데요. 그는 코르크를 붙인 양철 뚜껑으로 제작된 병마개를 개발한 발명가였습니다. 당시 병뚜껑으로 쓰일 다양한 제품들이 있었지만 윌리엄 페인터가 만든 이 병뚜껑은 금세 인기를 모았고 유리병마개의 표준으로 자리 잡으며 큰 돈을 벌어다 줍니다. 아예 회사 이름을 ‘크라운 코르크 앤 실 컴퍼니’로 바꾼 회사는 승승장구를 이어가며 한해 특허 비용으로만 35만달러를 벌어들였습니다.
크라운 코르크
질레트는 해당 회사의 뉴욕지부 영업팀에서 일하며 영감을 받았습니다. 발명가라는 공통점을 계기로 두 사람은 가깝게 지냈고 페인터는 어려운 상황에 쳐한 질레트를 위해 여러 조언을 했습니다. 특히 병뚜껑을 한번 열면 다시 쓸 수없는 일회병 병마개를 개발한 윌리엄 페인터는 질레트에게도 이처럼 일회용으로 다시 사야만 하는 생필품을 만들어보라고 권했습니다.
질레트 초기 면도기
그런 것이 뭐가 있을까 한참 고민해온 질레트. 그는 여러 차례의 고심과 시행착오 끝은 1895년, 40세의 나이에 번뜩 아이디어를 떠올립니다. 영업을 위해 세수를 하고 면도를 하려던 순간 매일 힘들고 귀찮게 자신을 괴롭혀온 면도기의 혁신을 떠올립니다.

질레트는 당시만 해도 비싸기만 하고 항상 갈아주고 관리해줘야 하는 면도기 대신 한번 쓰고 버릴 수 있는 면도기를 만들면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이를 위해 그는 기존 면도날보다 훨씬 얇은 대신 한쪽 면이 아닌 양쪽 면에서 절삭이 가능한 양면 면도기를 만드는 아이디어를 냅니다.

질레트 초기 면도기
이를 위해 어떤 소재를 쓸지, 어떻게 대량생산을 할 지, 생산 단가를 낮출지를 여러 차례 고민하며 무려 8년여의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안전면도기라고 불리는 질레트 면도기를 내놓습니다. 사실 일회용 면도기로 칭하는 안전 면도기는 그보다 20여년 전인 1875년 독일 출신 캄페 형제가 미국 뉴욕에서 최초로 발명해 시판한 바가 있습니다. 하지만 질레트는 아이디어를 얻었지만 이를 실제 손잡이에 장착해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게 만들고, 또한 면도날을 대량 생산해 경쟁사보다 훨씬 싼 가격에 쓸 수 있도록 하면서 제품화에 성공한 것입니다.

질레트는 8년간의 연구개발 기간 동안 생업인 세일즈일도 병행하며 버티고 또 버틴 끝에 성과를 냅니다.

하지만 출시 첫해, 시장의 반응은 차가웠습니다. 첫해에 판매한 면도기는 51개. 면도날은 160여개에 불과했습니다. 질레트는 크게 실망했습니다. 하지만 이듬해 반전이 일어납니다. 획기적인 면도 혁신이란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1904년, 한해에만 9만여개의 면도기와 12만개의 면도날이 판매된 것입니다. 이후 질레트는 영국 런던에 해외 사무소를 짓고 프랑스 파리에 신규 공장을 짓는 등 사업을 탄탄대로로 확장해나가며 시장을 압도해나갑니다.

질레트 로고
그리고 또다시 전쟁의 여신이 질레트를 향해 미소 지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국이 모든 병사에게 면도기를 지급했는데 이 납품계약을 질레트가 따낸 것이죠. 시장 인지도와 매출 증대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질레트는 이후 압도적 1위 면도기 사업자로의 입지를 공고히 합니다.

1915년 질레트의 면도기 판매량은 45만 개를 돌파했고 면도날 판매량은 7000만개를 넘었습니다.

다만 그의 말로는 안타까웠습니다. 경영 이사진과의 갈등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으며, 이후 미국에 터진 대공황으로 질레트는 주가가 폭락하며 사실상 재산을 몽땅 잃은 채 사망한 것입니다. 공격적인 사업확장과 무리한 투자 확대가 당시 화근이 된 셈입니다. 물론 질레트 사후 질레트는 여러 전문경영인의 안정적인 운영과 인수합병 등을 통해 글로벌 면도기 회사의 위상은 더욱 높아져 갔습니다. 지금도 질레트는 면도기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하고 있죠.

킹 질레트 라인
그리고 2020년대 들어 질레트의 질주도 다소 흔들리고 있습니다. 창립 당시 값비싼 면도기 부담을 줄이고자 출시된 질레트는, 오히려 지금은 더욱 싸고 저렴하며 성능좋은 저가 면도기 브랜드들의 역습에 고전하고 있습니다. 120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또 산업의 지형도가 뒤바뀌고 있죠. 앞으로 면도기 시장엔 또 어떤 변화의 바람이 불지는 예측불허입니다. 하지만 질레트가 수천년간 고통스러웠던 면도의 시간을 쉽고 편리하게 바꿨다는 혁신 그 자체는 영원할 것입니다.

‘흥’미로운 ‘부’-랜드 ‘전’(傳). 흥부전은 전 세계 유명 기업들과 브랜드의 흥망성쇠와 뒷야이기를 다뤄보는 코너입니다. 기자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더욱 알차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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