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손잡은 미-중 “한쪽의 성공은 다른 쪽의 기회”
우크라이나·팔레스타인 외 더 이상 충돌 없도록 만든 ‘가드레일’
1973년 중국에선 문화대혁명(1966~1976년)의 광기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서양 고전음악은 ‘금기’였다. 그럼에도 저우언라이 당시 중국 총리는 그해 3월 존 프리처드가 이끈 런던 필하모닉의 중국 공연을 성사시켰다. 서구 교향악단의 사상 첫 방중 공연이었다. 이어 4월엔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빈 필하모닉과 함께 중국을 찾았다. ‘핑퐁외교’에 이은 ‘음악외교’였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호놀룰루, 일본 도쿄를 경유한 팬암 707기가 그해 9월12일 중국 상하이에 착륙했다. 지휘자 유진 오르먼디를 필두로 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탄 전세기였다. 미국 언론인 제니퍼 린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중국 초연을 다룬 책 <베이징의 베토벤>(2022년)에서 “저우 전 총리의 목표는 외교였고, 특히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는 게 최우선 과제였다. 그래서 미국 교향악단의 방중 공연을 원했다”고 썼다.
50년 전 냉전체제에서 미-중 해빙의 상징
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가 선택됐을까?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는 뉴욕·보스턴·시카고·클리블랜드와 함께 미국을 대표하는 ‘5대 교향악단’으로 꼽힌다. 중국과 인연도 깊다. 중국 전문매체 <차이나 프로젝트>의 보도를 보면,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는 1940년대에 캐나다 출신 사회주의자 겸 외과의사로 중국 공산당의 항일전쟁에 참전했던 노먼 베순을 위한 자선공연을 한 바 있다. 당시 지휘자도 오르먼디였다.
정치적 측면도 고려했다.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는 1973년 1월20일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의 두 번째 취임식에서 연주했다. 이를 눈여겨본 저우 전 총리가 헨리 키신저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에게 직접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방중 공연을 요청했고, 닉슨 전 대통령이 오르먼디를 별장으로 불러 중국 쪽 초청 의사를 전했다. 미리 확정된 여름 공연을 마친 그해 9월로 중국 방문 일정이 준비됐다.
공연 작품 선정을 둘러싼 내부 갈등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저우 전 총리와 달리 마오쩌둥의 부인이자 이른바 ‘4인방’의 수장 격인 장칭은 미국 교향악단의 방문을 반기지 않았다. 첨예한 갈등을 겪던 소련(러시아) 출신 작곡가의 작품은 배제됐다. 모차르트와 슈베르트는 허용됐지만, 슈트라우스와 드뷔시는 불허됐다. 기준이 뭔지는 알 수 없다. 프랑스혁명의 열렬한 지지자로 알려진 베토벤은 모두가 선호했다. 그해 9월14일 베이징에서 첫 공연이 시작됐다. 가장 중요한 공연인 ‘지도부 콘서트’는 이틀 뒤인 9월16일 열렸다. 장칭의 요구에 따라 베토벤의 6번 교향곡(전원)이 공연작에 포함됐다.
방중 공연 50주년을 맞은 2023년 9월14일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는 보도자료를 내어, 1973년 방중 공연단의 일원이었던 바이올리니스트 데이비드 부스를 포함한 단원 14명이 중국을 방문해 베이징·톈진·쑤저우·상하이에서 공연할 것이라고 밝혔다. 1973년 이후 12번째 방중 공연이다. 2023년 11월10일 중국 베이징에서 공연이 열렸다. 같은 날 중국 외교부는 그간 미뤄온 시진핑 국가주석의 방미와 미-중 정상회담 일정을 공식 발표했다. 6월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의 방중 이후 넉 달여 이어진 외교적 노력의 대단원이었다.
대외 안정 절실한 양국 정상
시 주석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앞둔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2022년 11월14일 첫 대면 정상회담을 했다. 당시 <인민일보> 등 중국 관영매체는 바이든 대통령이 ‘4불1무의’를 약속했다고 전했다. 미국 쪽이 △신냉전 추구 △중국 체제 변경 △대중국 압박을 위한 동맹 강화 △대만 독립 지지 등 네 가지를 하지 않고, 중국과 충돌·대항할 뜻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는 게다.
‘4불1무의’는 해를 넘기기도 전에 ‘5불4무의’로 슬그머니 바뀌더니,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을 앞두곤 ‘6불5무의’란 표현까지 등장했다. <신화통신> 등의 보도를 종합하면, 기존 4불에 더해 중국 본토와 대만의 분열을 지지하지 않고, 대만 문제로 중국을 압박하지 않는다는 점이 포함됐다. 또 1무의에 더해 △중국 경제 발전 방해 △미-중 디커플링(탈동조화) 추구 △중국 과학·기술 발전 방해 △국제사회에서 중국 봉쇄 등 ‘할 뜻이 없다’라는 네 가지가 추가됐다. 중국의 대미 요구가 더 구체화한 셈이다.
‘제로 코로나’ 정책 폐기에도 부동산 위기 심화와 살인적인 청년 실업률 속에 중국 경제는 좀처럼 회복에 속도를 붙이지 못하고 있다. 외교·국방부장의 갑작스러운 낙마는 집권 3기에 들어선 시 주석의 지도력에 물음표를 던졌다. 국내 문제에 집중하려면 미-중 관계를 필두로 한 대외관계 안정이 절실할 수밖에 없다.
2024년 11월 재선에 도전하는 바이든 대통령 역시 비슷한 처지다. 특히 우크라이나에 이어 팔레스타인에서도 전쟁이 벌어지면서, 안정적인 미-중 관계 유지가 더욱 중요해졌다. 양국 관계의 큰 틀은 달라지지 않았다. 양쪽 모두 우발적 사태를 피하기 위한 일종의 ‘가드레일’ 정도를 원하는 것뿐이다. 회담을 앞두고 “양국 관계에 돌파구가 마련되리라 기대하는 건 무리”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우발적 충돌 막기 위해 군사대화 재개 합의
미-중 두 정상은 2023년 11월15일 오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남쪽으로 약 40㎞ 떨어진 ‘파일롤리 에스테이트’에서 만나 오찬을 겸해 4시간가량 회담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경쟁이 충돌로 이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지도자 대 지도자로서 오해와 소통 오류 없이 서로를 분명하게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에 시 주석은 “충돌과 대립은 양쪽에 감당하기 어려운 결과를 낳을 것”이며 “지구는 두 나라가 모두 성공할 수 있을 만큼 넓고, 한쪽의 성공은 다른 쪽의 기회가 될 것”이라고 화답했다.
이날 회담에서 양쪽은 2022년 8월 낸시 펠로시 당시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 직후 끊긴 군사 소통 채널 복원에 합의했다. 2022년 한 해 미국인 10만 명 이상의 사망 원인이 된 마약성 진통제 펜타닐의 중국산 원료에 대한 단속 강화에도 뜻을 모았다. 바이든 대통령은 회견 뒤 기자들과 만나 시 주석이 앞으로 몇 년간 대만을 침공할 계획이 없다는 발언도 했다고 전했다. 앞서 미-중은 전날 양쪽 기후변화 특사들의 합의 내용을 담은 ‘기후위기 대응협력 강화에 관한 서니랜드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일시적 휴전’을 위한 무난한 협상 결과다. 두 달여 앞으로 다가온 대만 총통 선거가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의 첫 번째 시험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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