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차별 공격에 분노하라, 무차별 테러에 분노한 만큼
“‘목소리가 없음’ 따위는 없다. 의도적으로 침묵을 강요당한 사람들, 선별적으로 들리지 않게 된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인도 작가 아룬다티 로이가 2004년 시드니 평화상 수상 연설에서 한 말이다. 로이는 1997년 첫 소설 <작은 것들의 신>으로 영문학권 최고 문학상인 부커상을 받았다. 그는 정치적 폭력과 신자유주의에 맞서 약자들의 인권을 대변하는 인권운동가이기도 하다.
민간인 피해 최소화 노력은 안중에도 없는 이스라엘
세상에는 목소리가 있으되 들리지 않는 약자, 사회적 소수자가 수없이 많다. 그중에도 어린이야말로 가장 작고 연약한 존재다. 어린이는 질병, 가난, 자연재해뿐 아니라 어른들의 폭력에 한없이 취약하다. 전쟁은 최악이다. 전쟁은 인간의 폭력성이 극한으로 치닫고 묵인되는 사태다. 2023년 10월7일에 시작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 정치조직 하마스의 전쟁도 마찬가지다.
하마스의 기습공격과 이스라엘의 전면전 선포로 시작된 전쟁이 7주째로 접어들었다. 양쪽의 전쟁은 현대판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이다. 구약성경 시대에는 뒷날 이스라엘 왕국의 왕이 된 소년 다윗이 돌팔매질로 블레셋(지금의 팔레스타인) 장군 골리앗을 쓰러뜨렸지만, 지금은 정반대다. 압도적 군사력을 앞세운 이스라엘이 면적이 좁고 인구가 밀집한 가자지구에 일방적 공격을 퍼붓는다. 민간인 거주 지역과 주택은 물론이고 병원과 학교, 심지어 부상자를 태운 구급차까지 공습과 포격의 표적이다. 이스라엘은 하마스가 민간인을 방패로 악용하고 병원 지하 터널을 군사시설로 활용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가자 주민에게 피란 명령만 되풀이할 뿐, 민간인 피해를 회피하거나 최소화하려는 노력이나 전술은 안중에도 없는 모양새다.
하마스가 이스라엘 영토에 침입해 음악축제를 즐기던 민간인 1500여 명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수백 명을 인질로 끌고 간 행태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전쟁범죄다. 변변한 무기조차 확보하기 힘든 피억압자들이 막강한 점령세력에 맞서 비정규전 게릴라 전술을 활용하곤 하지만, 하마스의 민간인 공격은 결코 용인될 수 없는 만행이다. 그러나 ‘자위권’을 앞세워 반격에 나선 이스라엘군의 무차별 공격과 민간인 살상은 훨씬 더 심각하다. 똑같은 전쟁범죄이지만 그 참혹함이 비교되지 않을 정도다.
무장집단이 민간인 밀집 장소에 들이닥쳐 총기를 난사하는 건 ‘야만적 테러’인가? 당연하다. 그렇다면 정규군이 전투기 미사일과 전차와 야포 포탄과 끔찍한 살상무기 백린탄을 민간인 밀집 지역에 투하하는 것은 ‘문명화한 전투’ 행위인가? 발사 무기, 특히 원거리 발사 무기일수록 가해자(공격자)는 피해자(희생자)를 직접 대면하지 않고 살상할 수 있어 죄의식이 무뎌진다. 게다가 직접 손에 쥐는 흉기나 개인 화기가 아니라 첨단 과학기술이 적용된 무기일수록 살상의 야만성이 가려지고 세련되게 보이는 착시현상을 일으킨다. 그러나 희생자가 목숨을 잃는 참혹함은 후자가 더하다. 무기와 전술이 전쟁의 비참함을 상쇄할 수 없고, 모든 전쟁은 그 자체로 절대악이라는 이야기다.
일가족 몰살 흔하지만, 더는 사망자 집계조차 어려워
가자지구 출신의 아흐메드 알나우크는 10월22일 이스라엘군 공습으로 아버지와 형제자매, 조카 14명 등 모두 21명의 일가친척을 한꺼번에 잃었다. 그는 리즈대학에서 ‘국제저널리즘’으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2019년부터 런던에 살면서 저널리스트 겸 팔레스타인 지원단체 활동가로 일한다. 11월11일 그가 <비비시>(BBC) 방송 기자에게 보여준 가족사진에는 티 없이 맑고 예쁜 조카들이 활짝 웃고 있다. 4년 전 고향에서 찍었다. 사진 속 아이들은 이제 이 세상에 없다.
같은 날 영국 일간 <가디언>은 캐나다에 사는 팔레스타인 출신 언론인 파레스 알굴의 비극을 전했다. 가자지구에 사는 친척의 집이 폭격당해 일가친척 중 36명이 숨졌다는 것이다. 일가족이 몰살당하는 참상은 가자지구 어디에나 널렸다. 팔레스타인 주민을 비롯한 아랍인들이 조부모-부모-자녀 세대가 한집(건물)에 모여 살며 독립 세대를 구성하는 전통 때문이다.
알나우크가 활동하는 단체 중 하나가 ‘위 아 낫 넘버스’(We Are Not Numbers), 즉 ‘우리는 숫자가 아니다’이다. 그러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뿐 아니라 모든 전쟁에서 대다수 희생자는, 특히 사망자가 많아질수록, 저마다 가꿔온 꿈과 인생이 말소된 채 차가운 숫자로만 기록될 뿐이다. 11월10일 가자지구 보건부는 전쟁 발발 이래 누적 사망자 수가 1만1078명, 부상자는 2만7490명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사망자에는 어린이 4506명(40.7%), 여성 3078명(27.8%), 노인 678명(6.1%)이 포함됐다. 4명 중 3명이 어린이, 여성, 노인이다. 가자 보건부는 이 발표를 마지막으로 집계를 중단했다. 이스라엘군의 무차별 공격으로 의료 인프라가 붕괴돼 사상자 집계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이날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가자지구에서 평균 10분마다 한 명의 어린이가 사망하고 있다. 어디도,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고 경고했다. 그는 특히 “10월7일 이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의 의료시설에 대한 공격이 250건 이상 확인됐다. (…) 가자지구의 의료시스템이 무너지고 있다”고 밝혔다. 앞서 11월6일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이스라엘군의 지상작전과 계속되는 폭격으로 민간인, 병원, 난민캠프, 이슬람사원, 교회와 대피소를 포함해 유엔 시설이 모두 공격받고 있다. (…) 가자지구가 어린이들의 무덤이 되고 있다”며 즉각 휴전을 촉구했다. 개전 이후 가자지구 전체 학교의 51%에 해당하는 258개의 학교 건물이 피해를 입었다는 발표도 나왔다.
가자에선 10분마다 어린이 한 명이 죽고 있다
이번 전쟁에서 어린이 사망은 앞선 어느 전쟁보다 더 심각하다. 전쟁 발발 3주가 지난 10월29일, 국제 어린이 구호기구 세이브더칠드런은 가자지구에서 보고된 어린이 사망자(당시 3257명)가 2019년 이후 전세계 분쟁 지역에서 1년 새 숨진 희생자 수를 넘어섰다고 밝혔다. 이는 최근 3년 동안 전세계 20개국 이상에서 무력충돌로 사망한 어린이 사망자 수보다 많다. 전쟁 한 달 새 가자지구에선 하루 평균 최소 136명, 10분에 한 명씩 어린이가 이스라엘군 공습으로 목숨을 잃었다. 무너진 건물 잔해 더미에 얼마나 더 많은 어린이가 묻혔을지는 제대로 파악조차 되지 않는다.
남북으로 좁고 길게 뻗은 가자지구는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곳 중 하나다. 약 365㎢ 면적에 237만여 명이 산다. ㎢당 무려 6500명이다. 가자지구 안에서도 인구가 골고루 분포된 것은 아니어서, 북부 도시 가자시티에 인구의 40%가 몰려 있다. 유니세프(UNICEF)에 따르면, 가자 인구의 47%가 18살 미만 어린이와 청소년이다. 이스라엘군의 인명 피해는 상대적으로 적다. 11월14일 이스라엘 방위군은 “가자지구 북부에서 하마스 테러리스트와 싸우던 군인 2명이 추가로 사망해, 이스라엘의 지상작전 사망자 수가 46명으로 늘어났다”고 밝혔다.
이쯤 되면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은 말이 전쟁이지 일방적인 민간인 학살이나 다름없다. 앞서 11월2일 유엔은 성명을 내어 “특히 자발리야 난민캠프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습은 뻔뻔한 국제법 위반이자 전쟁범죄다. 여성과 어린이 등 민간인이 보호받는 수용소를 공격하는 것은 전투원과 민간인의 비례 원칙과 구별 원칙을 완전히 위반한다”고 비판했다.
이스라엘의 가자 침공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6년 팔레스타인 총선에서 하마스가 압승하고 가자지구에서 독점적 권력을 확보한 이래, 이스라엘은 가자지구를 전면 봉쇄하고 물·전기·가스 등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생명줄을 쥐락펴락해왔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사이에는 크고 작은 무력충돌이 일상이 됐고,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로 진격하는 전쟁도 네 차례나 벌어졌다.
특히 이번 전쟁은 ‘네타냐후의 전쟁’이 되고 있다. 11월13일 이스라엘 일간 <하레츠>는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는 가자지구에서 장기간의 전쟁이 비판 여론을 완화하고 자기 권력을 유지하게 할 것으로 믿는다”며 “더 중요한 것은 10월7일의 참사(하마스의 기습공격과 이스라엘의 정보 실패)에 대한 모든 개인적 책임을 회피하고 (하마스에 대한) 비난을 확산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고 짚었다. 네타냐후는 재임 중 부정부패 혐의로 이스라엘의 현직 총리로는 최초로 기소됐고, 극우 시오니스트 정당들과 연정해 집권을 연장하는 방식으로 형사처벌을 회피해왔다.
유대인·팔레스타인인 고통에 치우침 없이 공감하라
10월31일 한국 독일사학회(회장 전진성·부산교육대 교수)는 ‘이스라엘과 독일의 동료 지식인들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의 성명을 한국어·독일어·영어 등 3개 언어로 발표했다. 성명은 먼저 “중동에 대한 유럽의 식민통치의 모순, 나치정권의 반인륜적 범죄 등이 맞물린 착종의 결과로서 이스라엘이 건국한 지도 75년이 흘렀고, 이후 이 지역에 평화란 없었다”며 “하마스의 공격에 대한 슬픔과 분노에 깊이 공감하지만 임계점을 넘어서는 집단적 분노가 휘발성일 수 없다는 사실 역시 잊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이어 “문명이 어디로 갔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는 방식으로 폭력이 폭력을 낳는 현 상황을 멈추기 위한 노력이 절실하다”며 “지금 당장, 가자지구에 대한 봉쇄와 폭격을 멈추고 대화에 나서도록 당신들의 정부를 설득하라”고 촉구했다.
특히 성명의 마지막 대목은 ‘동료 지식인’뿐 아니라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새겨들을 만하다. 다시 옮겨 적어본다.
“모든 인간은 동등하게 존엄하며 모든 이의 고통과 죽음은 동등한 도덕적 잣대로 재어져야 한다. 홀로코스트가 우리에게 충격을 준 것은 그것이 특정 집단에게 시련과 고통을 주어서가 아니라 그야말로 인류에 대한 도발이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도 팔레스타인인도 모두 인류 가족이다. 네타냐후 정권의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비판을 반유대주의와 동일시할 수는 없다. 독일 지식인들은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들의 고통에 치우침 없이 공감하라. 팔레스타인인들 전체에게 하마스 테러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묻지 말라. 하마스의 무차별 테러에 대해서만큼이나 이스라엘의 무차별 공격에 대해서도 분노하라.”
조일준 <한겨레> 토요판 선임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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