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민·안은진의 멜로 그 이상, '연인'이 소현세자와 환향녀 통해 담아낸 것

정덕현 칼럼니스트 2023. 11. 18.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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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은 왜 소현세자와 환향녀를 동일선상의 비극으로 봤을까

[엔터미디어=정덕현] "이장현 그 자가 이제 보니 여인들보다 못합니다. 힘없는 여인들도 오랑캐와 스치기만 해도 자결하여 떳떳함을 지켰거늘..." MBC 금토드라마 <연인>에서 남연준(이학주)은 이장현(남궁민)이 청나라를 끌어들였다는 오해로 아내인 경은애(이다인)에게 그를 비난하는 말을 한다. 그러면서 "본시 검은 것 한 방울이 맑은 물을 더럽히는 법"이라고 덧붙인다.

그 말은 은애에게는 가슴에 대못을 박는 말이다. 그 역시 병자호란 당시 오랑캐에게 겁탈 당할 뻔한 일이 있었고, 다행히 유길채(안은진) 덕분에 이를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연준의 말은 오랑캐에게 욕을 당하진 않았지만 손목을 잡혔던 자신이 살아돌아온 사실 자체가 떳떳하지 못한 일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었다. '검은 것 한 방울'이란 말이 특히 그렇다. 연준은 심지어 "손목을 잡힌 것이나 그보다 더한 욕을 당한 것이나 정절이 상한 건 마찬가지"라고 한다.

<연인>은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끌려갔다 살아 돌아온 이른바 '환향녀'라 손가락질 당하던 여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원리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유교관의 생각에 갇혀 있는 연준의 이런 확고한 태도는, 그러나 은애 역시 그런 일을 당할 뻔 했다는 사실을 마주하고는 충격과 절망감에 흔들리게 된다. 그는 은애를 사랑하지만, 자신이 갇혀 있는 생각 때문에 예전처럼 아내를 대하지 못한다. 대신 그 분노는 엉뚱한 곳을 향한다.

연준은 이장현을 찾아가 "정명수처럼 신세를 고쳐볼 심산인가? 청나라를 등에 업고 왕 같은 권세를 누리고 싶은게야?" 하고 꾸짖는데, 그 분노는 기묘하게도 오랑캐에 손목이 잡혔다는 아내로 인해 뒤틀린 심사가 겹쳐져 있다. 이장현이 청나라에서 온 각화(이청아)를 만나는 건 여전히 이역만리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조선인 포로들을 위한 일이지만, 연준은 그것이 마치 오랑캐와 손을 잡는 '야합'이라 몰아붙인다.

"아시는가? 어떤 사람들은 밥이 아니라 보람으로 산다네. 그런 사람들 덕분에 이 세상이 짐승의 소굴이 되지 않는 게야. 충심과 정절을 지키며 죽는 사람들 덕분에 아무리 힘센 자라도 제 뜻대로 세상을 가질 수 없음이 증명되는 거야. 나는 오랑캐로 더럽혀진 이 땅을 위해 혼을 바칠 것이다." 그는 병자호란으로 핍박받은 조선을 '더렵혀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심지어는 이장현이 청나라와 손 잡고 조선에서의 권세를 누리려 한다고 착각한다. 그는 유교적 세계관에 갇혀 정작 바라봐야할 핍박받는 민초들을 사람으로 보지 못한다. 심지어 아내까지도.

<연인>이 다루고 있는 이 환향녀에 대한 서사가 중요하고 흥미로운 건 이 작품이 소현세자(김무준)의 비극 또한 같은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어서다. 결국 독살설이 나온 소현세자의 비극이 만들어진 건, 아버지인 인조(김종태)의 의심 때문이었다.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지만 그곳에서 잘 버텨내고 있는 소현세자를 인조는 청나라와 손잡고 자신을 위협할 존재로 생각한다. 청나라에 머리를 찧고 조아리는 충격적인 굴욕을 당한 그 분노와 공포에 짓눌린 인조는 그래서 아들마저 죽이는 비극을 야기한 것.

청나라라는 이역만리 타지에서 핍박받다 겨우 생존해 돌아온 여인들에게 환향녀라는 굴레를 씌워 돌을 던지는 일과, 그토록 바랐던 고국으로 겨우 돌아왔지만 청나라와 야합했다는 의심으로 결국 죽음으로 내모는 일은 그래서 다르지 않다. 또 그 포로들을 끝까지 구해내려 애쓰지만 그것 역시 청나라의 등을 업고 권세를 누리려는 것이라 몰아세우는 연준의 모습 또한 마찬가지다.

그래서 <연인>은 이장현과 유길채의 운명적인 사랑 이야기를 그리고 있지만, 단순한 멜로 사극에 머물지 않는다. 거기에는 병자호란이 만들어낸 조선인 포로들의 비극과 소현세자의 비극을 동일선상으로 바라보는 역사적 관점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저들이 충절이니 절개니 하는 이데올로기에 눈이 멀어 정작 사람을 보지 못했던 것이 어떤 비극으로 이어지는가를 들여다 본다.

"포로들을 조선으로 데려와 줘. 만일 이 약조를 지키지 못한다면 난 세자도 사내도 사람도 될 수 없어. 혹 내게 무슨 일이 생겨 세자도 임금도 될 수 없다 한들 내가 인간으로는 남을 수 있도록 도와줘," 죽기 직전 소현세자가 장현에게 남긴 서한의 글귀는 그래서 남다른 여운으로 다가온다. 저들과 달리 직접 민초들을 겪으며 그들이 '포로'니 '환향녀'니 하는 낙인이 아니라 하나하나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소현세자는 세자나 임금이라는 명목이 아닌 '인간'의 길을 선택한다.

<연인>이 이장현과 유길채의 사랑이야기를 통해 우리 시대에 던지는 메시지는 이토록 묵직하다. 다른 생각과 이념으로 정치와 권력이 만들어내는 갖가지 프레임 속에 이름 없는 대중들이 이리저리 호명되며 때론 유린되기도 하는 현실이 아닌가. "돌덩어리, 풀때기처럼 삽시다. 하찮게. 시시하게. 우리 둘이." 이장현이 유길채에게 하는 이 작은 행복에 대한 속삭임은 그래서 너무나 아프게 다가온다. 그저 평범한 삶을 원하는 것뿐이지만, 그걸 허락하지 않는 현실을 보는 것만 같아서다.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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